시온주의 이스라엘의 점령을 넘어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바라며

[민교협의 새로운 시선]

2023년 10월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 전쟁이 일어나고, 최근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공방전이 벌어지면서 팔레스타인 문제는 더더욱 심각한 난제로 부상하였다. 도대체 어떤 전망과 해법이 가능할까?

제국주의 유산으로서 팔레스타인 문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전쟁이라 할 수 없는 참담한 사태가 지속되고 있다. 1948년 현대 국가 이스라엘의 탄생 기점부터 78년, 1917년 밸푸어선언(Balfour Declaration)부터 그 기점을 잡자면 100여 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현재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은 언제나 제국주의가 만들어 놓은 구조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요인들을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해명되어야 할 것이 시온주의 운동이다. 시온주의 운동은 유럽 사회에서 전개된 반유대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형성된 유대 민족주의 운동으로, 유대인의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여 성서에 나오는 '약속의 땅'을 그 귀착지로 삼았다. 옛 조상들의 땅이라 여겨진 곳에 다시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유대인들의 목표는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과 후원으로만 가능한 것이었다. 밸푸어선언으로 가시화된 제국의 후원 약속으로 독립국가의 염원을 안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 정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땅은 '임자 없는 땅'이 아니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만 이미 100만 명에 이르는 아랍인들이 있었다. 1936년 아랍인의 대규모 항쟁이 실패로 끝난 후, 1947년 국제연합(UN)의 팔레스타인 분할안 통과와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은, 시온주의와 제국주의의 커넥션에 맞서는 팔레스타인 및 아랍 민중들에게 중대한 기점이 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무슬림, 기독교도, 유대교도를 통합하는 독립국가를 주장하였고, 이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려는 원칙을 폐기할 것과 독립국 정부가 이민 정책을 결정할 때까지 시온주의자들의 이주 중단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분할안과 이스라엘 국가의 수립은 그와 같은 요구를 가볍게 묵살해 버린 결과였다. 그 결과 험난하고 지루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한이스라엘대사관 앞에서 팔레스타인과연대하는한국시민사회긴급행동 회원들이 이스라엘에 전쟁 중단을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착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로서 시온주의와 기독교 신학의 공모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식민화를 정당화하는 '시온주의'는,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한 유대 국가 멸망 이후 흩어진 유대인들이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약속의 땅'에 귀환하여 자신들만의 민족국가를 형성하는 것을 요체로 한다. 오늘날 시온주의는 단순히 종교적 열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정당화하는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애초 시온주의의 원형이라 할 만한 '시온에 대한 열망'은 백성의 거듭남을 지향하는 종교적 이상을 함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 박해가 심화하면서 그 운동은 점차 정치적 운동으로 변모하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유대인들의 그 시온주의의 모체가 기독교의 시온주의에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천년왕국을 믿는 이들은 그 성취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이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마침내 메시아의 재림으로 심판이 이뤄지기 이전 유대인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야 했다. 그것은 유대인을 옹호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고, 그 믿음 자체로 반유대주의의 표현이었다.

유대인의 귀환은 유럽 열강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도 부합했다. 유럽 사회에서 골칫거리로 여겨진 유대인은 추방해야 한다는 견해가 공공연히 제기되었다. 그와 같은 일련의 맥락 가운데서 애초 반유대주의와 연결된 시온주의 사상은 거꾸로 유대인의 자기 결속의 이념으로 변화되었다. 더불어 명확하게 실현가능한 정치적 운동으로 변화하였다. 나치 독일에 의한 반유대주의가 극에 달했을 때 그 운동은 더욱 강력한 동인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시온주의를 배태하고 자극한 기독교 신학의 공모는 이스라엘 국가 형성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성서의 서사는 의심 없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그 전제하에 이뤄진 성서 해석은 유대인의 귀환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유럽 사회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죄의식 탓이었다. 유럽과 북미의 주류 신학계에서 이를 의심하는 해석은 쉽사리 수용될 수 없었다. 이를 더욱 확고히 입증하는 방편으로 성서 고고학이 동원되었다. 성서의 서사를 고고학적으로 입증하고자 하는 야심찬 시도였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국가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고고학적 발굴이 시도될수록 성서의 서사와 고고학적 증거 사이의 일치보다는 괴리가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예컨대 장엄하게 묘사된 출애굽 사건의 실체는 모호했고,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제국으로서 유대 국가 또한 그 존재가 의심받게 되었다. 성서가 서술하고 있는 고대 왕국 시대부터 유일신 신앙과 유대인의 정체성이 확고하게 형성되어 있었다는 전제도 의심받게 되었다.

이로부터 1980년대 이래 일군의 '신역사학자들(New Historians)'이 등장하게 되었고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연구 결과들은 이스라엘 역사가 성서에 기록된 것과 곧바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내고 있다. 또한 유대인 귀환의 근거로서 고대 유대인의 정체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신역사학파는 유럽 등으로 흩어진 유대인이 종족적·민족적 집단이라기보다는 개종을 통해 확산한 종교 집단으로 이해한다. 이들을 민족 집단으로 볼 수 있다면 유럽 사회에서 민족주의 열풍과 더불어 일어난 시온주의를 통해 비로소 민족의식을 형성한 그 시점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대 국가 멸망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유대인들이 아예 사라진 것일까? 유대 국가 멸망 당시 대다수의 유대인은 본토에 남아 역사의 부침 속에서 변모하였다. 유대교인, 기독교인, 무슬림 등 유일신교를 믿는 몇 집단으로 분화하였고 이슬람제국 지배 이래 다수가 무슬림이 되기는 했지만, 그들이 원주민의 후예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굳이 말하자면 팔레스타인인들이야말로 오히려 고대 유대인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 이해에 따르면 귀환을 정당화하는 믿음 자체가 일종의 신화일 수밖에 없다.

그 경로가 특이하기는 하지만 이미 형성된 유대 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원주민의 자결권을 부정하는 기초 위에 성립되는 것이라면 정당화될 수 없다. 더불어 그 현실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일이 용인될 수 없다.

팔레스타인의 저항과 해방의 전망

이스라엘은 유대인 국가를 표방하며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일방적 지배 정책을 강화하고 있고, 그에 맞서는 팔레스타인은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 해방의 목표를 내걸며 대결하고 있다. 결코 대등한 대결이라 할 수 없는 일방적 지배와 저항의 점철 과정이다. 그 일방적 지배와 저항의 구도가 바뀌어 그 땅의 사람들이 대등한 관계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미래 전망은 가능할까?

팔레스타인의 역사가 라시드 할리디(Rashid Khalidi)는 그의 저작 <팔레스타인 100년의 전쟁: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을 통하여 그 주요 국면을 여섯 시기로 나누고, 정착민 식민주의 국가로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향하여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관점에서 각 국면을 '선전포고'로 규정하고 있다. 첫 번째 1917-1939년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 두 번째 1947-1948년 이스라엘 국가의 형성, 세 번째 1967년 전쟁으로 이전에 강탈하지 못한 땅의 점령, 네 번째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팔레스타인 난민 학살, 다섯 번째 1987-1995년 팔레스타인 민중의 자발적 저항(인티파다)과 오슬로 협정, 여섯 번째 2000-2014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성립의 지체와 식민화의 강화 국면이 그것이다. 그가 미처 다루지 못한 현재 상황을 포함한다면 일곱 번째로 2023년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대결 국면이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어느 편에서든 배타적 지배와 말살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 동등한 관계 안에서의 평화로운 공존이 유일한 해법이다. 그러나 100여 년의 역사에서 그 공존의 정신은 사실상 심각하게 왜곡되어 왔다. 이스라엘의 편에서 그 정신은 사실상 완전히 부정되어 왔다. 오슬로 협정은 외견상 상호 존재의 인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사실상 근본적 해결보다는 현재의 '야만적인 불균형' 상태를 고착화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오슬로 협정 이후 '두 국가 방안'이 해법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대등한 관계의 형성보다는 팔레스타인의 일방적 투항만 강요되고 있는 실정이다.

역시 가장 근본적인 해법은 아래로부터의 동력, 곧 민중들의 저항일 수밖에 없다.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저항(인티파다)이 항상 긍정적 결과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지만, 그간 모든 현상 변화의 국면마다 그 저항이 근본적 동인이 되어 왔다. 그 동력이 그나마 자치정부의 수립과 외교적 과정을 이끌어내는 기반이 되어 왔다. 물론 현재 파타(서안)와 하마스(가자)로 대표되는 팔레스타인의 정체 세력이 과연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위하여 적절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또한 이스라엘과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는 팔레스타인의 경제구조와 노동인구 구성의 한계 탓에 팔레스타인의 저항이 이스라엘의 식민화 정책을 얼마나 제어할 수 있는지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과거 남아공이 다수의 흑인 노동자를 기반으로 자본을 축적한 만큼 흑인 노동자들의 저항이 인종주의 체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양상과는 다른 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팔레스타인 민중 저항의 동력을 부정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국면 전환의 계기는 항상 아래로부터의 저항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팔레스타인 민중의 저항은 항상 주변 아랍국가 민중들을 고무하는 효과를 지녔고, 동시에 아랍 지역 민중들의 저항이 일어났을 때 팔레스타인 문제는 늘 핵심 구호로 등장하였다. 예컨대 2000년 2차 인티파다가 일어났을 때 이집트에서는 민주주의 권리를 요구하는 운동들이 펼쳐졌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대와 지원 활동이 이뤄졌다. 아랍국가들 대부분이 왕정이거나 권위주의 국가체제를 형성하는 가운데 서구 제국주의 세력과 유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의는 아랍 혁명을 관통하는 핵심 쟁점이 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더욱 광범위한 국제적 연대의 중요성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국제적 연대와 지원은 팔레스타인의 시민사회와 노동조합이 호소하는 BDS(Boycott, Divestment, Sanctions; 보이콧, 투자철회, 제재)운동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 운동이 국제적으로 확산할 때 이스라엘의 인종주의적 시온주의 체제에 균열을 내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도 다양한 국제적 연대활동이 이뤄지고 있고, 더불어 각 사회에서 적절한 연대의 방안이 요청되는 상황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특별히 정부를 향하여 대이스라엘 무기 판매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환기하는 것과 더불어 팔레스타인의 완전한 자결권 인정을 요구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지금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볼 때 팔레스타인 해방의 전망은 쉽사리 낙관하기 어렵다. 그 해방의 전망은 다양한 가능성 안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결국 그 해법은 서로 얽힌 당사자들의 역관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가시화될 가능성 안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고통을 겪고 있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생존권과 자결권이 온전히 보장되는 조건 안에서 평화적 공존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관심과 연대는 바로 그 방향에 집중하여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최형묵, "시온주의의 해체와 팔레스타인의 해방", <신학사상> 208(2025/봄)을 기초로 하여 대폭 축약한 것입니다. 더 상세한 내용은 해당 논문을 참조 바랍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