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이 해제되고 6.3 대통령선거가 코앞인데, 내란이 계속되고 있다고들 말한다. 당연하다. 역사를 뒤돌아 보면, 거대혁명을 해 국가권력을 장악해도 기존의 국가기구들이 반동적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태반인 데, 이제 친위쿠테타를 법적으로 저지했을 뿐이고 그 우두머리가 여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며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가능한 법적 탄핵 이전에 '데모스의 힘'으로 하야시키지 못한 파고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더불어민주당이 탄핵과정에서 전개된 대중의 저항과 투쟁을 '빛의 혁명'으로 칭송하며 발 빠르게 대응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과거 박근혜 탄핵 때와 마찬가지로 상이한 영역에서 분출된 대중의 요구와 힘을 법, 제도 안으로 유도하면서 예상되는 선거에서 자신들의 집권을 위한 발판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언술을 접하며 처음에는 '혁명'이니 뭐니 감당할 수 없는 이름을 붙이고 거리나 광장에서 제기된 요구들을 전향적으로 수용할 것처럼 하다가 집권 이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외면하곤, 결국 수구정치세력에게 수모를 당하며 정권을 빼앗겨온 민주당의 정치행태가 어른거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래도 과거와 다른, 의미 있는 변화는 민주당 대선후보 이재명이 자당을 '중도보수'로 규정하며 그에 근거해 정치적 행보를 걷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그 당 안의 다수는 자신들을 진보로, 국민의힘을 보수로 부르는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물론 민주당을 진보로 규정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도 잘 알고 있듯이 국힘과 비교하는 경우에만 그럴 뿐이다. 그런데 이념, 정책 등의 스펙트럼에서 맨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 국힘보다 진보적이지 않은 정치세력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민주당이 자신을 진보라고 역설하는 것을 볼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것과 함께 그 두 당이 양축을 이루고 있는 보수-수구 독점의 정당체제가 지니는 시대착오성을 절감하는 이유이다.
중도보수, 민주당의 정치적 위상에 맞는 이름
그렇기에 이런 기본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국힘으로 표현된 정치세력이 과연 보수인가. 1980년 5.18민중항쟁을 피로 물들이며 등장한 전두환정권과 민정당의 폭압, 1991년 5월투쟁시기에 청년,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노태우정권의 반동적인 공세이후 그 투쟁의 주체들인 노동자-민중들, 청년들을 위해 의미 있는 입법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세력,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을 포함한 페미니즘 일반을 적으로 규정하는 세력, 기후 및 생태 위기를 글로벌 자본의 재생산에 종속시키고 거대자본들, 초부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 성소수자 및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을 혐오, 조롱하는 세력, 그리고 87년 6월항쟁 이후 유지되어온 자유주의적 정치질서, 이른바 '87년체제로 운위되고 있는 최소로 규정된 민주주의조차도 틈만 나면 일그러뜨리고 형해화하고자 공격해온 세력을 보수로 볼 수 있는가.
그들을 보수로 칭하며 정권을 주거니 받거니 해온 것이 지금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정치세력이다. 그렇다면 민주당을 진보로 규정하고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질문하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 세상 어느 정치(사회)학 교과서에 그런 행보를 걷고 있는 정치세력, 그들을 지지하는 자들을 보수로 규정하고 있는가. 그런 이들을 부르는 통상의 용어가 수구, 혹은 극우인 것이다. 기존의 질서들을 과거로 돌리려는 정치, 사회세력을 지칭하는 용어인 것이다.
그에 반해 기존의 자유주의적 질서, 관계들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 보수이다. 그렇기에 보수정치세력의 핵심 모토는 이재명 후보의 현수막에 새겨진 '이제'가 아니라 '조건이 성숙되면'이다. 이번 TV토론에서 민주노동당 후보 권영국의 질문에 민주당 이재명후보가 일관되게 보여준 모습이 그런 것 아닌가. 역설적인 것은 그 조건의 성숙을 만드는 세력은 보수가 아니라 진보라는 사실이다. 지금 일반화된 무상급식, 상가임대차보호법 등을 위해 앞장서 투쟁한 과거 민주노동당의 예처럼 말이다. 보수는 그 조건이 만들어지면 거기에 수저를 얹고 올라탈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행태가 '진정한 보수는 변화를 외면하지 않는다'라는 언술에 함축되어 있는 정치적 의미이다.
이 당연한 점들을 새삼 환기하는 이유는 국힘이 수구, 극우인 것이 12.3계엄에 동조하고 탄핵에 반대했기 때문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잘 알다시피 유신체제, 그 적자인 전두환정권을 자신의 본류로 생각하고 있는 국힘은 그동안 줄곧 수구, 극우의 길을 걸어왔고 12.3계엄과 그 해제 이후 지속되고 있는 반동적 행태들은 그런 역사적 궤적 위에서 그들의 성격을 더 극명하게 확인시켜준 증거일 뿐이다. 따라서 그들을 보수로 호명하는 것은 '수구인 국힘이 보수이기를 바라는 상상된 현실'에 근거하고 있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지금까지 그것이 대중적으로 통용될 수 있었던 것은 '보수인 민주당이 자신을 진보로 생각하는 상상된 현실'에 근거해 그들과 계속 호흡을 맞추어 왔기 때문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민주당 이재명이 자당의 성격을 '중도보수'라고 고백하는 것은 본래의 정치적 성격과 위상에 맞는 이름을 쓰겠다고 선언하는 것인 만큼 그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주는 것에 인색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그 고백은 애초 국힘과의 대비 속에서만 진보일 수 있는 민주당에 그 틀을 넘어서는 진보적 비전을 요구하며 비판하는 것이 허수아비를 상대로 요구, 비판하는 것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와 관련해 한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고백이 지난 총선을 통해 결과한 정의당의 참패, 진보-좌파정치의 빈곤이라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진보정당-정치세력을 양념은커녕, 고명 정도에 불과한 존재로 보는 민주당의 자신감이 그 배경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 주변에 이른바 진보를 자임하는 이런저런 정당들이 장식품처럼 서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그들이 말하는 '빛의 혁명'에 함축되어 있는 정치적 의미를 끄집어내 재전유하며 진정한 진보정치의 새로운 출발의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빛의 혁명', 헌정질서회복을 넘어서는 사회대전환에 대한 요구
물리적으로 빛은 각기 상이한 파장, 색깔 등을 가지고 일렁거리며 존재하기에 거기에는 어떤 고정된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거기에는 그 어떤 하나의 형상을 틀 지을 하나의 준칙, 척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의 구체적인 모습을 이름 있는 정당정치인, 명망 있는 시민운동가들이 앞줄에 서 있던 서울의 중심, 광화문광장에서보다 변방인 남태령과 같은 장소에서 더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농민들의 윤석열탄핵을 위한 트렉터투쟁을 지켜내기 위해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 경쟁에 시달리는 학생과 미래가 보이지 않는 연구자, 크고 작은 정신적 피로에 시달리며 스스로 침잠된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 그리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주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상이한 빛깔의 삶과 고통에 대해 말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조심스럽지만, 분명히 쏟아내었던 그 무박 2일의 '자유-평등한 장소'와 같은 곳에서 말이다.
그럼에도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는 그들을 '하나의 빛'으로 묶을 수 있는 단 한 가지 근거는 그들이 기존의 비대칭적이고 불균등한 사회-권력 관계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 즉 법, 제도적으로 사회 곳곳에 경쟁을 심고 일반화하여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 남성의 지배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가부장체제, 그리고 '평등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는 상상된 현실을 준거로 한 민족-국가주의 이데올로기 등에 의해 정당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존재와 삶을 부정당하고 있는 이들이라는 점이다. 광장에서 공유된 윤석열탄핵이라는 외침이 단지 기존 헌정질서의 회복이라는 차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부당한 현실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 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염원의 표현인 이유이다. 그들은 계엄과 내란으로 위협받고 있다는 기존의 헌정질서가 규범적으로만 강조할 뿐, 실질적으로 외면해 왔던 너무도 익숙한 요구들을 다시 말하고 외쳤을 뿐이다. 이윤,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기타의 신분과 같은 준거, 척도에 의해 더 이상 수탈, 차별, 혐오하지 말라는 것을.
'빛의 혁명'의 주체, 수탈-차별-혐오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
이 지점에 이르면, 탄핵 과정에서 민주당이 역설했던 '빛의 혁명'이라는 언술이 선거과정을 거치며 시나브로 사라진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과거 촛불에 의해 정치적으로 구제된 노무현, 문재인 정권 등이 보였던 행태의 반복이다. 그들은 그 촛불, 응원봉의 모양과 빛깔에 주목했을 뿐이지 그 상이한 빛들이 그 시대 그 거리에 나와 서로 얽히고설켜 하나의 흐름을 만들게 된 원인에 관해서는 의미 있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이 차별과 반칙, 사회양극화, 불평등에 대해 말해 왔다는 점에서 보면, 그런 부당한 현실에 관해 모르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들은 그 부당함에 대한 대중의 요구와 분노를 정권교체가 먼저라며 구축해버리기 일쑤였다. 과거에는 적폐청산에, 지금은 내란진압과 헌정질서회복이 먼저라면서 말이다.
민주노동당 후보 권영국이 이재명에게 차별금지법 제정, 5인이하 사업장을 포함해 근로기준법의 전면적 도입에 동의하냐고 묻자 '그로 인해 새로운 갈등이 생겨 심화되면,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경제상황이 어렵다'는 이유로 반대한 것은 상징적이다. 그것은 지금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외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 사람들이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어나가고 있는데, 여유롭게 조건을 따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그 답변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 그가 자신이 '중도보수' 민주당의 후보라는 점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고 그에 어울리는 정책공약들을 발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도보수정당이 어떻게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법, 제도적인 사각지대에서 가장 고통을 받고 있는 5인사업장 미만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입법 등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이 가능할 정도로 민주당이 '대중의 자기통치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내면화했다면, 촛불이 안겨준 권력들을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수구세력에게 내주고 급기야 오늘의 계엄, 내란으로 이어졌겠는가.
'빛의 혁명'은 결국 '더 많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끊임없는 여정이다. 그것은 '어릴 때 소년공으로서 참혹한 삶을 살았고 윤석열정권에 받은 자신의 고통이 지금 국민들이 겪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눈시울을 붉히며 말하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착취, 차별 등에 눈감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인 이재명, 과거 노동운동의 전설이었음을 강조하지만 지금은 수구파시스트가 되어 고통받는 이들의 존재 자체를 무시, 부정하고 그들의 삶의 목소리를 제거하고자 하는 국힘 김문수, 그와 대동소이해 '젊은 한국판 트럼프'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준석 등으로 대표되는 정치세력들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 아니다. 그 여정의 성과는 지금 이곳에서 수탈-차별-혐오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에 의해서만 구체화될 수 있을 뿐이다. 그 성과는 자신의 직면하고 있는 삶의 고통을 넘어서, 말하지 못하는 자연을 포함한 타자의 그것을 함께 보는 이들이 서로 보듬고 함께 걸어갈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착취-수탈-차별-혐오 없는 세상'을 꿈꾸는 이들에 의해, 그것이 고통받는 대중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민주주의의 역사, 아니 한국의 역사가 확인해주는 유일한 진실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