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들이 팔레스타인 서안지구로 현지 활동을 다녀왔다.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최소 6만 8000여 명의 가자지구 주민이 살해됐다. 팔레스타인을 처음 가본 이들이 목격한 팔레스타인 민중을 숫자와 자료가 아닌 삶과 이야기로 풀어낸다. 네 차례에 걸쳐 기고를 싣는다.
낯선 장소에 갈 때 그 지역 이야기를 읽으면서 다니는 걸 좋아한다. 그러나 첫 팔레스타인-여정을 준비하면서 배낭에 종이책을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했다. 짐 검사할 때 팔레스타인관련 책을 가져온 걸 들켜선 안됐다. 고심한 끝에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의 장편소설 <사소한 일>을 챙겼다. 팔레스타인 이야기라는 정보를 크게 주지 않는 표지였기 때문이다. 현지 활동 중에 나는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면 눈앞에서 문학과 현실이 같은 모양으로 공명하고 있는 걸 자주 발견했다.
사소하지 않은 일
'내가 A구역민임을 보여주는 내 초록색 신분증을 가지고 내가 감행한 가장 먼 여행은 우리 집에서 내 새 직장까지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정치적이거나 군사적인 예외 상황만 아니라면 누구나 A구역에서 B구역까지 갈 수 있다. 그런데 이 예외 상황이라는 것이 워낙 자주 발생해서 요새는 그게 정상이고, A구역의 많은 사람들은 B구역에 가는 걸 꿈도 꾸지 못한다.
난 최근 몇 년간 A구역과 B구역의 경계에 있는 칼란디아 검문소까지도 가본 적이 없다. 그러니 어떻게 D구역에 더 가까운 곳으로 간다는 걸 감히 상상이라도 해볼 수 있을 것인가?' (아다니아 쉬블리, <사소한 일>, 92쪽)
소설은 2000년대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 사는 한 지식인 여성의 행동과 생각을 따라간다. 주인공은 나크바 때 벌어진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차를 타고 이동한다. 손발은 축축해지고, 식은땀을 흘리고, 구역질할 것처럼 어지러워하며. 그러나 검문소에선 억지 미소를 지으며 태연한 척 보이려고 애쓴다. A구역에서 B구역으로, B구역에서 C구역으로. '이동의 위험'을 감내하는 것은 예외적이며 대담하고 상상하기 힘든 일로 여겨진다.
팔레스타인 땅을 밟은 지 셋째 날쯤 칼란디아 검문소를 지날 때, 이스라엘 점령군들은 관광객처럼 보이는 우리의 여권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서 통과시켰다. 허무하게 쉬웠다. 그때 옆줄에서 한 팔레스타인 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통행증을 내밀었는데 거부당하는 모습을 봤다. 우리가 그곳을 나올 때까지도 모자는 통행증을 들고 서 있었다. 왜 내가 걸어갈 수 있는 그 길을, 이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사방이 꽉 막힌 채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건가. 내 마음도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여정 내내 그러한 일이 반복됐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동안 어디서든 검문소와 장애물에 가로막혔다. 때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부당한 불심검문을 겪는 모습을 보았다. 팔레스타인에서 이동은 전혀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검문소 앞에서
검문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화는 '아씨라'에서 들었다. 아씨라는 서안지구 북부 도시 나블루스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애당초 계획에 없던 '아씨라'에 가게 된 건 라니아의 부탁때문이었다. 나블루스에서 만난 활동가인 라니아는 자신이 사는 마을이 불법 유대인 정착민으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부탁에 응답하여 우리는 라니아와 그의 파트너인 무하마드가 살고 있는 집에서 일주일 정도 머무르게 되었다.
라니아의 집에 간 첫날, 라니아는 우리에게 팔레스타인 전통 요리 '마클루바'를 대접해주었다. 식사를 하다가 두 사람의 첫 만남에 대해 듣게 됐다. 라니아와 무하마드는 검문소 앞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다. 검문소를 지나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점령군의 허가가 필요한데, 이스라엘 점령군은 임의적인 기준에 따라 통행을 제한했다. 나이, 성별, 결혼 여부, 자녀 유무, 검문소로 진입한 경로와 시기, 신분증 종류, 외모와 옷차림, 심지어는 자동차 브랜드에 따라서 검문소를 통과하는 난이도는 상이했다. 한 예로, 결혼하지 않았거나 자녀가 없는 사람에겐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돌아갈 가족이 없으면 이스라엘에 허가없이 체류할 가능성이 크거나,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당시 라니아와 무하마드는 결혼하지 않은 젊은 청년들이었다. 우연하게도 두 사람은 성씨가 같았다. 그래서 라니아는 무하마드와 결혼한 사이라고 속인다. 이스라엘 점령군은 미심쩍어했고, 두 사람의 여권을 압수한 후에 돌아올 때 같이 오라고 했다. 그래서 서로 번호를 교환했고, 각자 일을 본 후에 같이 돌아왔다. 그때부터 둘의 인연이 시작됐다고 한다.
영화 같은 첫 만남이라고 놀랐지만, 어딜 가도 검문소를 마주칠 수밖에 없는 팔레스타인이니까 충분히 생길 법한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몇십 년이 지났지만, 팔레스타인 곳곳에 바이러스처럼 퍼져 있는 식민 통치 도구인 검문소는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길바닥 위의 시간
"이스라엘은 우리가 길바닥에 시간을 다 버리도록 만들려는 거야."
그 말은 비유나 과장이 아니었다. 팔레스타인에선 자주 가까운 길도 빙 돌아가야 했다. 2km면 갈 길을 10km씩 돌아가야 했다. 우리가 서안지구 남부에 있는 마을 '마사페르 야타'에 머무를 때 이웃 마을 '투바'에 방문하려고 했던 상황이 딱 그랬다. 원래 투바까지 10분이면 갈 수 있지만, 이제는 1시간이 넘게 걸려 가야 한다고 마사페르 야타의 활동가 아니스가 알려줬다. 마사페르 야타는 C구역으로 이스라엘이 완전히 통치하는 구역이다. 완전히 통치한다는 의미는, 팔레스타인 주민이 자신이 소유한 땅에 건물을 지으려 해도 이스라엘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 허가를 얻어내기도 어렵다.
한번은 아니스와 장을 보기 위해 외출했다. 우리는 이스라엘 점령군이 세워둔 장애물에 의해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봉쇄된 걸 발견했다. 아니스는 한숨을 쉬고 돌아가려면 한참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 잠시 뒤 아니스는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더니 울타리같이 생긴 장애물을 치웠다. 그러곤 바퀴에서 큰 소리가 나고 몸이 휘청일 만큼, 액셀을 거세게 밟아 그자리를 떠났다. 익숙한 길에 들어서고 나서야 아니스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식은땀과 거친 숨소리가 이곳의 삶이 얼마나 긴장으로 가득 차 있는지 느끼게 했다. 이러한 이동의 제약은 위급한 상황에선 더 큰 문제가 됐다. 출산을 앞둔 산모가 있다거나, 생명이 위중한 환자가 있는 경우에도 이스라엘 점령군은 구급차를 가로막았다. 심지어는 구급차 운전사를 죽이기도 했다. 지난해 나블루스 남쪽 알 사위야 마을 근처에서 불법 유대인 정착민의 총격으로 다친 사람들을 이송하던 구급차 운전사를 이스라엘 점령군이 고의로 살해한 사건이 보도되기도 했다. 팔레스타인 마을 중에는 의료시설이 없는 곳이 태반이다.
흙먼지가 뿌옇게 떠다니는 비포장도로가 팔레스타인 마을이 의료, 교육과 연결되는 유일한 길일 때가 잦았다. 이동을 통제하는 건 삶을 삶답게 느끼지 못하게 했다. 이 역시 인종 청소의 일부였다.
2025년 1월과 2월에 실시한 OCHA 조사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서안지구에 팔레스타인인의 이동을 방해하는 검문소를 비롯한 이동 장애물 849개를 설치했다고 한다. 전체 장애물 중 288개가 도로 게이트인데, 약 60%가 자주 닫혀있었다. 경기도의 절반 정도 면적인 서안지구에 700km가 넘는 분리 장벽과 849개 이상의 장애물이 팔레스타인인들의 일상을 점령하기 위해 있었다. 불법 유대인 정착민들이 자신들만의 도로를 만들고 이용하며 아무런 검문이나 방해 없이 다니는 동안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도로 위에 정체되어 있거나 원래는 길이 아닌 곳을 가로질러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과수원이나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시골길 한복판을 질주하는 차들을 여러 대 목격했다.
물길을 막는다고 바다가 마를까
하루는 팔레스타인 사람 둘이 수배된 소식을 들었다. 이스라엘 점령군은 검문소에서 지나는 차마다 멈춰 세워 확인했다. 우리를 태운 택시 기사가 계속 중얼거렸다. "알함두릴라, 알함두릴라..." 알라를 찬양한다는 뜻으로 일상생활에서 감사하다 혹은 잘 지낸다는 의미로 흔하게 말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그때는 조금 다르게 들렸다. 미리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렸다.
마샤페르 야타의 아흘람은 점령이 끝난다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큰 잔치를 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들이 평화 속에 살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평화 속에 산다는 건 무엇일까. "선도 경계도 장벽도 없고. 그럼 자유롭게 48년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팔레스타인 땅의 영역)에 갈 수 있고, 알 쿠드스(예루살렘)에도 갈 수 있고..." 아무리 물길을 막아도 바다가 마를 수 없듯이, 이 바람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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