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전쟁범죄 연재도 이제 거의 끝이다. △유대인의 죽음을 이용해 이득을 챙기는 행태(이른바 '홀로코스트 산업'), △독일인들의 나치 평가와 집단적 죄의식, △이웃국가들과의 역사 화해와 교과서 문제를 다루고 연재를 마치려 한다. 그동안 몇몇 독자들로부터 항의 메일을 받았다. 짧게 줄이면, "이즈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마당에 지난날 유대인 희생을 다루는 글을 읽기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맞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해마다 38억 달러(5조 4000억 원) 어치의 공짜 군사원조를 건네주는 미국 덕분에 중동의 군사패권국가로 자리 잡았다. 그 자신 유대인이기도 한 노엄 촘스키(MIT 명예교수, 언어학)를 비롯한 양심적 지식인들 사이에선 이스라엘이 '깡패국가'(rouge state)로 낙인찍힌 지 오래다. 필자도 스무 차례 가까이 팔레스타인 현지를 다녀오면서 베냐민 네타냐후를 비롯한 이스라엘 정치군사 지도자들을 '전쟁범죄자'로 꼽아왔다. 본 연재를 꾸준히 읽은 독자분이라면, 지금껏 실린 글 속에서 이런 내용을 짚었음을 아실 것이다.
히틀러는 독일민족의 '생활공간'(Lebensraum)을 넓힌답시고 침략전쟁을 일으켜 유대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평화적 생존권'을 뭉갰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처럼, 히틀러는 편협한 인종주의(게르만민족의 우월성)에 바탕을 두고 국가테러(state terror)를 휘두르다 망했다. 국가테러는 하마스 같은 '비(非)국가 조직의 테러'(non-state terror)보다 훨씬 많은 희생자를 내왔다.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에서 저지른 살상이 다름 아닌 국가테러다. 공짜로 넘겨받은 미국산 최신예 전폭기와 미사일로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마구 죽이고 집을 뭉개는 이스라엘의 국가테러는 곧 전쟁범죄다.
지난 글에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 관련해 '작은 나치', '작은 아이히만'에 대해 살펴봤다. 이즈음 팔레스타인에서의 군사작전에 동원된 이스라엘 병사들이 딱 그런 모습이다. 그들은 이웃과의 평화공존을 생각하지 않는다. 히틀러가 독일민족의 '생활공간'을 내세운 것처럼, 유대민족의 생존권만을 고집하는 배타적 인종주의인 시온주의(Zionism)에 빠져있다. 팔레스타인 원주민과 난민들의 고통이 어떠할지 고민해보지도 않는다.
프로그램이 입력된 로봇처럼 행동하는 병사들의 얼굴에서 다름 아닌 '악의 평범성'이 물씬 묻어난다. 문제는 전범자들을 다루는 국제기구인 국제형사재판소(ICC)가 힘을 못 쓴다는 것이다. 미국의 뒷심을 믿어서일까, 유대인들은 ICC의 기소 움직임을 전혀 겁내지 않는다(김재명,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미지북스, 2021 개정증보판, 204쪽, 216쪽 참조 바람).

"나치 전범들, 법적으로 죽지 않았다"
[가해자들의 이력을 모두 기록하면 성명록 몇 권이 될 것이다. 그런 목록이 없는 상태에서 아래는 단지 몇몇의 이력을 기록한 것이다. 가해자들 대부분의 전후 기록은 없다. 일부는 남미, 호주, 중동으로 도피했고, 일부는 침묵한 채 세상의 이목을 피했다. 대부분은 그저 지나쳤다. 법적으로 그들은 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법적으로 죽은 것도 아니었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2>, 개마고원, 2008, 1523-1524쪽).
위에 옮긴 글은 홀로코스트 연구자들이 '교과서'라 부르는 라울 힐베르크(전 버몬트대, 1926-2007)의 책(The Destruction of European Jews, 초판 1961, 제3판 2003) 뒤쪽에 실렸다. 힐베르크가 지적했듯이, 나치 전범자들과 그들이 벌인 악행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기록은 많지 않다. 패전 무렵 대대적으로 폐기․소각된 탓이다. 패전 뒤 그들이 어디로 도망쳐 숨었는지는 더욱 알기 어렵다.
힐베르크는 윗글 바로 뒤에다 400명에 가까운 전범자들 명단을 기록해 놓았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패전 뒤 도망쳐 숨었다. 힐베르크의 표현대로라면, 가해자들의 전후 기록은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나이를 감안하면, 이미 대부분이 숨졌을 것이다. 하지만 힐베르크는 '법적으로는 죽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죽은 개인에 대한 물리적 처벌은 없다 하더라도 역사의 심판은 남아 있다.
'작은 나치들'(kleiner Nazis) 감싼 아데나워
한 시대가 막을 내리면, 지난 시대의 잘못을 바로잡는 움직임이 일기 마련이다. 이른바 과거사 청산이다. 우리의 경우, 8.15 뒤 일제 잔재 청산과 더불어 친일파 단죄가 주요 과제였다. 하지만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흐지부지됐다. 미 군정청은 친일파들이 '업무 능력'을 지녔다며 감쌌고, 1949년 6월 친일파 경찰들은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반민특위)를 습격했다. 반민특위가 강제 해산된 뒤 75년이 넘도록 친일파 청산은 미완의 과제로만 남았다.
독일 패전 뒤 승전국들의 주요 관심은 독일의 전쟁범죄자 처벌이었다. 이는 독일에서의 나치 잔재 청산이라는 의미도 지녔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1945년 11월-1946년 10월)은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주요 전범 24명을 피고석에 세웠다. 이어 친위대(SS) 지휘관들과 고위 공무원, 의사, 법률가, 기업가에 대한 후속재판이 벌어졌다(연재 99-103 참조).
승전국들이 만든 법정에서 주요 전범자들에 대한 단죄는 이뤄졌지만, 도망자들과 '작은 나치들'(kleiner Nazis) 처리 등 나치 잔재 청산이 남았다. 문제는 1949년 5월 서독(독일연방공화국, BRD) 정부가 들어서면서 청산 작업은 사실상 멈추었다. 10년 넘게 장기 집권한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1949-1963)는 '실용과 화합 정책'을 폈다. 나치당(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에 가입했다는 사실이 유죄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여겼다. "죄(Schuld)가 없는 일반 당원들은 다시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처벌보다는 국민 통합이 우선"이라 했다.
1951년 9월11일 아데나워는 공무원 지위를 규정한 헌법 131조에다 특별조항을 넣어 패전 뒤 공직에서 쫓겨났던 이들의 복직 길을 텄다. 이에 따라 1945년 5월8일(독일 항복일) 이전에 공무원(교사, 경찰, 판․검사, 군인)이었던 80만 명이 복직 또는 연금을 받게 됐다(민간인 48만, 군인 32만 명). '단순 가담자'(Mitläufer)로 재분류된 이들의 복직은 그동안의 나치 청산이 승전국의 강요에 떠밀린 임시 조치였음을 드러냈다.
돌이켜 보면, 패전 뒤 일본도 같은 과정을 밟았다. 맥아더 군정 시절에 쫓겨났던 민간 공무원과 군인들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뒤 복직 또는 연금을 받게 됐다. 심지어 도쿄 전범재판에서 처형됐던 A급 전범자들도 '공무사'(公務死)로 인정받아 유족들은 거액의 연금을 챙겼다(김재명, <일본의 전쟁범죄>, 진실의 힘, 2024, 523-524쪽).
동독(독일민주공화국, DDR, 1949년 10월)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초기엔 나치에 몸담았던 자들을 공직에서 쫓아내는 등 인적․제도적 청산이 서독보다는 단호했다. 하지만 그 기간은 짧았다. 이와 관련, 최승완(중앙대, 역사학)의 글을 보자.
[1950년 냉전의 본격화로 체제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동․서독 정권은 (국가)재건에 주력하는 것을 당면과제로 여겼다. 이에 따라 동․서독 정권은 나치 과거청산의 고삐를 늦추고 구 나치인력의 사회복귀를 용인했다. 타협적 정치노선의 실행과 함께 과거청산 논의는 두 독일(동․서독) 사회에서 사라져갔다](최승완, '냉전기 동독의 대 서독 선전공세-나치 과거청산 문제를 중심으로', <역사와 경계> 제54집, 2005년 3월).
서독 총리의 측근은 '히틀러의 법률가'
나치 정권에서 내무부 차관과 법률고문을 지냈던 한스 글롭케의 이력은 논란거리다. 그는 인종차별법안인 '뉘른베르크법'(1935)의 초안을 만들어 유대인을 '2등 시민'으로 떨어뜨렸다. 법안이 통과되자, 글롭케는 그의 상관이던 빌헬름 슈투카르트(당시 내무부 차관, 패전 뒤 징역 3년)과 함께 법안을 풀이한 <해설서>(1936)를 만들었다. 히틀러의 하수인이 됐던 나치 법률가들을 비판하는 헤린더 파우어-스투더(오스트리아 빈대학, 윤리학․정치철학)의 책(Justifying Injustice, 2020)에서 관련대목을 보자.
[뉘른베르크법에 대한 해설서에서 빌헬름 슈투카르트와 한스 글롭케는 '보편적인 인간 평등의 원칙, 그리고 국가로부터 제약받지 않는 개인의 자유 원칙에 대해 민족사회주의(Nazism)은 인간의 자연적 불평등과 이질성을 가혹하지만 불가피한 조건으로 인정한다'고 언급했다](헤린더 파우어-스투더, <히틀러의 법률가들>, 진실의 힘, 2024,164쪽).
이 대목에서 1973년 유신헌법 초안을 만들고 가다듬은 헌법학자 한태연, 갈봉근 같은 '박정희의 법률가'들이 떠오른다. 이들은 박정희 장기독재의 길을 연 유신헌법의 '당위성'과 '역사적 의미'를 치켜세웠고, 박정희는 그 보답으로 둘에게 유신정우회 소속 금배지를 달아주었다. 글롭케도 흔히 말하는 관운(官運)만큼은 좋았다. 힐베르크의 평가를 보자.
[독일 유대인들에게 (남자는) '이스라엘', (여자는) '사라'라는 중간 이름을 부여했던(그래서 유대인임을 쉽게 알아채도록 했던) 독일 내무부의 글롭케는 전후의 서독에서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성공 가도를 달렸다. 아헨 시청의 재무국장으로 전후 경력을 개시한 그는 총리실 국장으로 임명되었고, 1953년 아데나워 내각의 차관이 됐다](라울 힐베르크, 1523쪽).
그 뒤 글롭케는 아데나워의 최측근으로 총리행정실장(비서실장과 정책실장, 국무장관에 해당하는 요직)을 지냈다. 제롬 콘(뉴스쿨대 '한나 아렌트센터' 소장)은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가 미 뉴욕의 뉴스쿨대에서 강의할 때 그의 조교였다. 콘은 1975년 심장마비로 타계한 스승이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쓴 글들을 편집한 책(Responsibility and Judgement, 2003)을 냈다. 아래는 글롭케를 비롯한 나치를 감싼 아데나워 정권을 비판한 대목이다.
[서독 행정부의 모든 직위에 전직 나치들이 득시글했던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비밀이 아니었다. 한스 글롭케라는 이름은 뉘른베르크 법에 관한 그의 악명 높은 논평 때문에 유명세를 탔다. 서독의 평판과 권위에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큰 피해를 입힌 국정업무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여론이 나도는 것은 놀랍지 않다. '대어'(大魚)는 승승장구하고 '치어'(稚魚)들만 잡혔다'](한나 아렌트, <책임과 판단>, 필로소픽, 2019, 404쪽).

울름 재판과 중앙전범수사국
이렇듯 1950년대와 60년대의 서독은 나치 청산보다는 경제성장을 중요시했고, 실제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많은 독일인들은 나치 전범재판을 불필요하다고 여겼고, 과거사와 관련된 불편한 진실에는 눈을 감으려 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일까, 1950년대에 나치 전범을 단죄한 재판으로는 독일 서남부 울름에서 열린 '울름 재판'(1958-1961)이 거의 유일하다.
1941년 독일-리투아니아 국경지대 틸지트에서 5500명의 민간인들이 악명 높은 기동학살부대(Einsatzgruppen)에게 떼죽음 당했다. 울름 재판은 증인으로 나온 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더욱 관심을 끈 끝에, 10명의 피고가 3~15년 사이의 유기징역형을 받았다(윤용선, '나치 과거의 사법적 정리: 나치 범죄 규명을 위한 주 법무부 중앙국 설치에 관한 논의', <역사학보> 제206호, 2010년 6월호 참조).
울름 재판이 갖는 의미는 나치 전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작은 나치' 단죄의 물꼬를 텄다는 점이다. 또한 나치 전범을 보다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다룰 전문 조사기관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1958년에 문을 연 루트비히스부르크 중앙전범수사국은 지금도 나치 전범을 추적 중이다(초대국장은 울름 재판에서 검사로 활동했던 엘빈 쉴레가 맡았다. 1965년 쉴레 국장이 지난날 나치 돌격대SA 대원이자 나치 당원이었다는 사실이 문제가 돼 자리에서 물러났다).
'집념의 유대인 검사' 프리츠 바우어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돌프 아이히만(친위대 중령) 재판은 그때껏 처벌받지 않은 나치 전범자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키웠다. 그런 분위기를 타고 열린 것이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1963-1965)이다. 이 재판의 검사로 부지런히 일했던 인물이 프리츠 바우어(프랑크푸르트가 속한 헤센 주 검찰총장, 1903-1968)다. 독일사회에 동화된 유대인 출신인 바우어는 1933년 히틀러 집권 초기에 지방법원 판사로 일했다. 하지만 정치범으로 몰려 8개월 동안 호이베르크 수용소에 갇혔고, 풀려나자말자 덴마크로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그는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있다는 정보를 이스라엘 모사드에 넘겨줘 체포에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고 알려진다(독일 라스 크라우메 감독의 2015년도 영화 <집념의 검사 프리츠 바우어> 참고).
바우어 검사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홀로코스트 생존자' 181명의 진술을 녹음하는 등 치밀한 준비 끝에 나치 친위대원들을 법정에 세웠다. 지난날 수용소 수감자들을 죽이고 학대했던 이들은 한결같이 "우린 단순히 명령을 따랐을 뿐이고, 그것이 형법상 잘못된 일인지 알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는 상투적 변명을 늘어놓았다(한나 아렌트는 이런 논리를 '조무래기들'이 펼치는 '졸개 이론'이라 꼬집었다. <책임과 판단> 405쪽).
아렌트가 말하는 '졸개'란 그가 앞서 말했던 '치어' 또는 '작은 나치'와 같다. 프랑크푸르트 법원은 "단순한 명령 수행자도 법적 책임이 있다"고 처벌 기준을 분명히 했다. 당시 살아있다고 추정된 8200명의 친위대원 가운데 789명이 재판을 받았고 750명에게 실형이 내려졌다. 주요 피고들을 보면 △빌헬름 보거(친위대 중위, '보거 그네' 고문자, 무기징역) △에밀 베드나레크(카포, 무기징역) △조세프 클레르(친위대 위생병, 페놀주사로 수백명 살해, 무기징역) △로버트 물카(아우슈비츠 부소장, 징역 14년) 등이다. 친위대 의사 프란츠 루카스는 가스실로 보내는 선별작업을 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징역 3년3개월에 그쳐 논란을 불렀다.
판사들의 '제 식구 감싸기'
나치 법률가들은 지난날 히틀러와 나치 이념을 옹호하고 '어용 재판'을 이끌었다. 이들은 '살인자의 비수를 법복으로 감추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후속재판에서 16명의 나치 법률가들이 무기징역 등의 처벌을 받았지만, 법률가 단죄는 그걸로 끝이었다. 패전 뒤 법복을 벗었던 판․검사들은 아데나워의 관용정책에 따라 다시 법조계로 돌아갔다. 1950년대 서독 판사의 80%가 나치 시절의 판사였고, 상당수가 나치 당원이었다. 이들 가운데 법의 심판대에 섰던 이는 거의 없다.
1956년 6월19일 서독 법원은 전직 나치 친위대 판사였던 오토 토어벡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토오벡은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 목사로 반나치 활동을 했던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형을 선고해 악명을 떨쳤다. 본회퍼 목사를 기소했던 나치 검사 발터 후펜코텐도 오토벡과 함께 병합심리를 받았다. 후펜코텐은 게슈타포 간부로도 일하면서 많은 이들을 감옥으로 보냈던 골수 나치였지만, 독일 패전 뒤 미군 방첩대(CIC) 고문으로 재빨리 변신해 처벌을 피했었다.
그 재판에서 나치 검사 후펜코텐에겐 징역 7년 6개월이 선고됐다. 하지만 나치 판사 오토벡은 무죄로 풀려났다. '당시 실정법에 따라 판결을 내렸던 판사에게 그 실정법에 복종했다는 사유가 유죄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논리에서였다. 그렇다고 검사에게도 같은 논리가 적용되진 않았다(당시 판사의 생각에 검사는 '같은 식구'가 아니었다).
판사들의 '제 식구 감싸기'로 풀려난 또 다른 나치 판사가 한스 레제다. 그는 지난날 나치 정권 아래서 민족재판소(인민재판소) 배석판사로 있을 때 반체제 인사들에게 적어도 321건의 사형판결을 내릴 때 함께 서명했다는 혐의로 붙잡혀 1967년 재판에 넘겨졌다. 그의 상관인 민족재판소장 롤란트 프라이슬러(1893-1945)는 '미치광이 롤란트'라는 별명이 말해주듯이, 나치 법정을 지배했던 '히틀러의 법률가'였다. 프라이슬러는 독일 항복 직전인 1945년 2월 베를린 공습으로 죽었다(연재 102 참조).
1957년 베를린 지방법원은 '모살 방조'를 이유로 레제에게 5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곧 뒤집혔다. 이재승(건국대법학전문대, 기초법)에 따르면, 1968년 봄 연방통상법원(BGH, 한국의 대법원)에서 파기돼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판결문에서 파기 이유를 보자.
[민족재판소의 배석판사는 당시 실정법에 비춰 볼 때 독립적이고, 재판장과 동등한 권한이 있으며, 법률에 복종했으며 자신의 양심에 책임을 지는 상태에 있었다. 행위의 주관적 측면을 말하자면, 피고인이 비열한 동기에서 사형에 동의한 경우에만 처벌이 가능하다](이재승, <국가범죄>, 앨피, 2010, 328쪽에서 재인용).
위 글을 풀어쓰자면, 나치 정권이 범죄 집단이라도 판사는 당시의 실정법에 따라 판결한 것이니만큼 죄가 없다는 논리다. 박정희 유신독재 아래서 사법부가 민주인사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것을 두고, 보수적 법조인들이 '법에 따라 판결했을 뿐'이라 감싼 것과 빼닮았다. 레제가 무죄를 받으면서 그 뒤로 '나치 판사' 처벌 논의는 사라졌다.

'과거사 청산' 외친 독일 젊은이들
1960년대 후반은 미국이 개입한 베트남전쟁의 도덕성이 도마에 오르면서 세계적으로 비판의 목소리가 높을 때였다. 유럽에서는 이른바 '68운동'이 거세지면서 독일 젊은이들도 부모 세대가 '감추고 싶은 과거사'에 관심을 쏟았다. 그 무렵 다시 떠오른 주요 담론이 '과거청산(Vergangenheitsbewältigung)이었다. 그런 분위기에 물꼬를 튼 것이 독일 시사잡지 <슈테른>의 고발 기사다.
1968년 2월25일자 <슈테른>은 기민련(독일 기독교민주연합) 대표 하인리히 뤼브케가 '나치 수용소의 건설 설계자로 서명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대학생들은 물러나라며 시위를 벌였고, 뤼브케도 마지못해 사실이라 털어놓았다. 아데나워 총리의 14년 장기 집권 기록을 지닌 기민련(1950년 창설)은 이 파동 뒤 1969년 처음으로 야당이 됐다. 새로 집권한 사회민주당은 나치 범죄의 공소시효를 없앴다. 나치 잔재 청산을 바라는 분위기가 높아지자, 몇몇 나이든 판사들이 은퇴했다. 하지만 법조계의 구조적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와 관련, 도널드 더튼(브리티시 콜롬비아대, 심리학)은 그의 역저(The Psychology of Genocide, Massacres, and Extreme Violence, 2007)에서 서독 정부 아래서 나치 전범 처벌이 너무 미약했고, 더구나 '나치 판사'들에 대한 징벌을 전혀 없었다고 개탄했다.
[1959년과 1969년 사이에 전쟁범죄로 재판 받은 1000명의 나치 중 징역형은 100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쳐 6000명이 재판을 받았지만, 단지 157명만 징역형을 받았다. 이것을 나치 판사들의 재판과 비교할 때 매우 모순된다. 나치 판사들은 히틀러 정권을 비판하는 '농담'도 범죄라면서 2만 6000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전쟁 뒤 단 한 명의 판사도 유죄판결을 받지 않았다](도널드 더튼, <제노사이드와 대량학살, 극단적 폭력의 심리학>, 금정굴 인권평화재단 인권평화연구소, 2022, 281쪽).
위에서 1950년대 서독 판사의 80%가 나치 시절의 판사였다고 했다. 또 다른 참고자료 하나. 2012년 독일 법무부는 <로젠부르크 파일>(Die Akte Rosenburg)라는 조사 보고서 내놓았다. 만프레드 괴르테마커(포츠담대, 법학)를 비롯한 민간 연구자들로 이뤄진 위원회가 만든 보고서였다. 이에 따르면, 서독 정부가 출범한 1949년부터 1973년까지 법무부 고위직에 있던 170명의 법률가 가운데 나치당원 출신은 90명(53%), 돌격대(SA) 출신은 34명(20%)으로 나타났다(1973년은 나치당 출신 22%, SA 출신 8%). 나치 법률가들의 이런 인적 연속성은 나치 전범 처벌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사법부 안의 분위기를 말해준다. (바로가기 ☞ : 클릭)
수용소 회계사와 경비원은 '학살체계의 일부'
2005년 5월 독일 유력지인 <슈피겔>(Der Spiegel)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회계 장교였던 오스카 그뢰닝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그뢰닝은 2년 동안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유대인들이 남긴 돈을 세었고, 화물 열차에서 비참한 '인간 화물'이 내릴 때 경비를 섰다. 그런데도 그는 아우슈비츠에서의 2년 생활이 지극히 평범했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안정되어 갔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그 지역사회의 일원이 됐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생활은 지극히 평범했어요. 그곳은 작은 도시 같았어요. 거기에는 뼈 수프도 살 수 있는 채소가게도 있었어요. 아우슈비츠의 삶에는 두 가지 측면(죽음과 일상)이 있었고, 그 둘은 어느 정도 분리돼 있었어요"(이스라엘 차니, <폭력의 전염>, 선인, 2024, 179쪽에서 재인용).
그뢰닝은 독가스실에서 비명소리가 들렸을 때 공포를 느꼈지만,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고 했다. 그런 그가 운 적이 있다. 사람이 아닌 새 때문이다. 그의 우편함에 둥지를 튼 새를 누군가 공기총으로 쏴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서였다. <슈피겔> 기사 끝에 눈길을 끄는 대목 하나. "지난 60년 동안 그뢰닝은 '죄책감'(Schuldgefühle)이란 단어를 검색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 뒤 그뢰닝은 '죄책감'이란 단어를 곱씹어볼 상황에 빠졌다. 2015년 뤼네부르크 지방법원은 당시 98세의 그뢰닝에게 살인방조 혐의로 징역 4년형을 내렸다(2018년 옥사). 그뢰닝의 변호사는 고령과 건강 문제로 풀어줄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작은 나치'를 다룬 재판들도 건강상의 이유가 참작은 됐지만 무죄 석방은 없었다.
요한 데마뉴크(존 데마뉴크, 1920-2012) 재판은 나치 전범재판에서 하나의 기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전범 피의자인 당사자가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더라도 '나치 학살 체계의 일부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유죄'라는 판례를 세웠다. 우크라이나 출신인 데마뉴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군으로 징집됐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 살아남기 위해 그는 '부역'을 했다. 나치 친위대의 보조 경비원으로 트라브니키 수용소를 시작으로 소비보르, 마이다네크, 플로센뷔르크 등 여러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을 감시했다.
전쟁 뒤 데마뉴크는 미국 클리블랜드에서 자동차 공장 노동자로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하지만 수용소에서의 잔혹한 학대로 악명 높았던 '공포의 이반'(Ivan the Terrible)으로 잘못 꼽혀 1988년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았고, 교수형 직전까지 갔다. 막판에 그가 '공포의 이반'이 아니라는 게 소련 KGB 문서로 밝혀져 1992년 미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수용소에서 일했다는 사실 때문에 독일로 추방됐고, 2011년 금고 5년형을 받고 항소 중에 숨졌다. 참으로 고달픈 말년이었다(넷플릭스 다큐 5부작 <공포의 이반> 참고).
"늦더라도 정의는 실현돼야 마땅"
데마뉴크 재판 2년 뒤엔 그보다 한 살 많은 한스 리프시스(수용소 경비원)가 붙잡혔지만 노인성 치매로 재판에 넘겨지지 않았다. 앞의 그뢰닝이나 데마뉴크에서 보듯 2000년대 넘어 잡힌 나치 전범자들은 나이가 많고 건강이 좋질 못하다. 앞서 살펴본 루트비히스부르크 중앙전범수사국이나 나치 추적단체인 '시몬 비젠탈 센터'의 전범 목록에 오른 이들도 거의 사망 또는 사망 직전의 연령대다. 골수 나치 '대어'들은 다 도망가거나 죽었는데 '작은 나치'를 붙잡는 게 무슨 의미냐는 얘기들도 나온다. 그럼에도 큰 흐름은 "늦더라도 정의는 실현돼야 마땅하다"는 쪽이다.
독일 검찰은 고령자라도 일단 죄상이 드러난 경우라면 기소 절차를 밟는다. 당사자가 직접 학살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나치 학살기계의 작은 톱니바퀴'였다는 논리에서다. 전범 처벌은 홀로코스트 희생자와 그 유족들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된다. 독일 검찰의 무게 중심은 처벌보다는 사과와 속죄 쪽이다. 그런 과정을 지켜보는 시민들에겐 살아있는 역사교육이 되기 마련이다. 이른바 '기억 문화'의 형성이다.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 사례에서 보듯이 '기억 문화'엔 진한 아픔과 함께 깊은 뜻이 담겼다. 누군가는 과거사는 이제 그만 덮고 잊자고 하지만, 지난날의 어둡고 불편한 기억들을 보존하고 역사의 거울(교훈)로 삼는 방향만큼은 바람직하다. 글이 길어졌기에 홀로코스트 부정론(수정론)을 둘러싼 논란과 문제점은 다음 주 글에서 살펴보려 한다.(계속)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