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반복해 죽어야만 하는 직업을 가진 청년의 이야기. <미키 17>은 자연스럽게 현대 사회의 노동권 문제를 거론한다. 야심차게 개장한 마카롱 가게가 폭망하고 거액의 빚에 쪼들려 지구를 떠나 극한 직업을 택할 수밖에 없던 미키의 전사前史는 현재를 살아가는 MZ 세대들의 극한 상황을 빗댄다. 인간 복제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 제기와 종교적 파시즘이 자본과 엮였을 때 어떤 기행적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흥미롭게 묘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표면적 요소들은 <미키 17>을 대중적으로 관람하기 위한 좋은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다. <미키 17>은 분명 현 시대를 풍자하고 있는 작품임에 틀림없고 굳이 이러한 사실을 감출 의도 없이 노골적으로 지리멸렬한 시대적 풍경을 SF 장르 속에 잘 녹여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봉준호 감독의 장기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현실의 구석 틈새로 묵직한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고 그 어떤 가치도 발견하지 못했던 미시적 순간들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펼쳐내곤 했다. <미키 17> 또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적 세계의 한 조각으로서 세상에 대한 그의 시선을 충실히 담아낸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끊임없이 마음 한구석을 건드린 대사 한 줄이 이 작품 전체를 새롭게 고민하도록 만든다. 모든 사건이 해결되는 마지막 순간, 주인공 미키(로버트 패틴슨)는 내레이션으로 되뇐다. "나도 이제 행복해도 괜찮아." 미키의 죄책감은 운전 중 자신이 누른 버튼 때문에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다는 오해에 뿌리를 둔다. 그것이 오해인지 진실인지 영화는 굳이 관심 두지 않는다. 영화적 관심은 미키의 반복된 죽음과 재생이 중단될 수 있는지, 고통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지, 그 여부에 있다. 고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미키의 심리적 원인보다 그 원인을 야기하는 사회 구조적 문제, 시스템의 모순을 해체하고 그곳에서 미키의 고통을 중단시키는 것만이 서사의 주된 관심사다. 힘없는 개인이 혁명을 일으키고 세상을 바꾸는 영웅 모험담은 영화 서사의 근간이다. 관객은 큰 스크린을 통해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또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가 현실화하고 극복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미키 17>은 그러한 작법을 충실히 따르고 그래서 대중적이다. 봉준호 감독의 모든 작품은 대중적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해피엔딩의 공법을 따른 경우는 흔치 않다. 그래서일까? 만약 미키의 마지막 대사가 없었다면 이 작품은 무척 낯설고 이질적인 봉준호 표 영화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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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미키의 마지막 대사는 미키 18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미키 17이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토로할 때도 미키 18은 진실이 아니라며 화를 낸다. 이전의 미키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호방하고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며 과감하기까지 한 미키 18은 진정한 빌런이다. 어쩌다 이전의 소극적이고 순응적이며 소심하기까지 한 미키들과 전혀 다른 미키가 탄생할 수 있었는지는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다. 단지 영화적 설정을 통해 그냥 어느 날, 어느 순간에 이런 미키가 탄생했을 뿐이다. 미키 18은 사건을 일으키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끄는 불온한 존재다. 탄생해서는 안 되는 존재이며 시스템 오류의 결과 값이다. 영화 제목에서조차 인정하지 않고 감춘 존재이지만 그는 온몸으로 파국을 막아내고 모든 사건을 종결시키는 진정한 영웅이기도 하다. 봉준호의 작품 세계에서 이러한 존재들은 대체로 안타고니스트이거나 혹은 공포의 대상으로 묘사되곤 했다. 가장 대표적인 캐릭터가 바로 <기생충>(2019)의 근세(박명훈)다. 대대손손 자본을 이어가며 상층부의 호화 저택에서 살아갈 것만 같았던 동익(이선균) 가족과 시스템에 기생하여 그들의 피를 빨아먹고 살려 했던 기택(송강호) 가족 모두를 해체하는 진정한 빌런이 바로 근세였다. 미키 18은 분명 근세에 버금가는 빌런임에도 <미키 17>은 그를 서사적으로 소비하거나 터부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통해 서사를 완성하고 미키 17의 계몽적 자각을 이끌어 낸다. 이 근본적 차이가 <미키 17>을 봉준호 작품 세계 속에서 무척 이질적으로 느끼도록 만든다.
수없이 복제된 미키들처럼 미키 17과 미키 18은 결국 다르면서 같은 존재다. 유전학적으로는 동일자이나 존재론적으론 서로 낯선 타자다. 그들의 동일성은 과학적 근거를 따른다.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결과물로서 그들은 절대 다른 자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캐릭터, 사상, 추구하는 바는 전혀 다르다. 가장 극명히 나뉘는 점은 서로의 욕망을 표현하는 데 있다. 미키 18은 이전 미키들은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욕망에 충실한 자다. 미키 17의 마지막 대사에 언급된 '행복'이야말로 미키 18이 추구한 가장 근원적 가치다. 미키 18에게 행복은 사회가 부여한 목표를 달성하는 것, 또는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 목표엔 관심도 없고 오직 욕망을 따르는 것만이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사회적 시선 속에서 미키 18과 같은 존재들은 터부시되고 불편한 존재로 치부되어 버린다. 과거 봉준호 감독의 작품 속 미키 18과 같은 존재들이 모두 안타고니스트, 적대적 존재로 내비친 이유다. 하지만 <미키 17>은 그런 미키 18을 통해 혁명을 완수한다. 그리고 관찰자인 미키 17 자신을 해방한다. 미키 17이 자각한 행복의 가치는 노동 해방에만 머물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이를 실현하는 것, 그 가치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으로까지 나아간다.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자아 발견이야말로 미키 17이 추구한 행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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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마지막 미키 17의 대사에 언급된 '행복'은 그 원류가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행복에 대비되는 '불행'의 순간에는 단지 죽음을 반복해야 하는 극한의 노동 조건만 포함되지 않는다. 자신 때문에 부모님이 희생되었다는 씻을 수 없는 죄책감도 포함된다. 그 죄책감은 미키가 자신의 불행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원동력이다. 자신 때문에 부모님이 죽었으니 부모님의 보호 없이 살 수밖에 없는 현실, 사업이 망하고 그 빚으로 인해 극한의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모든 현실적 조건들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다. 이 논리는 봉준호의 작품 세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논리다. 봉준호의 작품 세계 속 인물들은 모두 운명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옥자'는 먹잇감으로 개발된 동물이기에 도축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희봉(변희봉)이 운영하는 매점은 강두(송강호)를 거쳐 현서(고아성)로까지 이어지며, 기택(송강호)의 가족과 동익(이선균)의 가족은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자본 계급으로 선명히 나뉘어 있다. 봉준호의 작품들이 비극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주인공이 그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서 도전장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신이 설계한 운명에 맞서는 순간 모든 신화 속 인물들은 변신이라는 심판을 면치 못했다. 변신은 신이 내린 벌이며 죄를 지은 자로서 소멸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봉준호는 그 신화적 공식을 해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수많은 빌런들을 통해서 구조를 전복시키려 노력했다. 동시에 그 노력이 얼마나 힘겹고 불가능에 가까운 것인지 또한 잘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이 범죄자임을 알고 있음에도 기억을 잊는 침을 놓고 미친척 관광버스 춤을 춰야 했던 '마더'(김혜자)의 몸짓이 만든 처절함이 그 증거다. 봉준호에게 영화는 현실을 넘어서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넘어설 수 없는 현실의 잔혹함을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다. 봉준호의 그로테스크함은 그 모순으로부터 비롯한다.
그랬던 봉준호 감독이 드디어 행복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그리고 자아실현을 깨닫고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조금 낯설지만 그럼에도 반갑게 다가온다. 현실에선 실현 불가능한 행복을 영화 속에서라도 맛보고 싶은 마음이 관객의 마음이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영화를 통해서 현실을 살아가고 버틸 수 있는 동력을 얻고자 하는 관객의 마음 때문이라 여기고 싶다. 판타지로서의 영화는 현실을 외면하고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너무 잔혹한 현실이라면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잠시 거리를 두는 것은 필요하다. 영화 속에서 만끽한 행복의 감각들이 극장에 불이 밝혀지고 긴 통로를 빠져나가 현실로 돌아가는 관객들에게 또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관습, 또는 대중성이란 이름으로 폄하하기에 <미키 17>은 충분히 귀엽고 깜찍하다. 그래서 사랑스럽고 미워할 수 없다. 잔인한 현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비관적 태도를 유지했던 봉준호 감독의 변화가 반가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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