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좌파'니 '우파'니 하는 구분들에 크게 관심없지만, 이 글의 서술을 위해서 특별히 스스로 '우파'라 규정하는 사람들이 타자로 설정한 '좌파'를 보는 방식, 즉 '한국 우파 세계관'을 따라가 볼 생각이다.
한국에서 '내란'은 오랜 기간 '좌파의 전유물'로 여겨져 왔다. 1945년 광복 이후 이승만 우파 정권부터 시작하면 1998년 단군 이래 첫 정권 교체가 발생하기 전까지 53년 간 좌파는 대한민국을 전복해 북한에 헌납하려는 세력이었다.
98년 이후 평화적 정권 교체로 우파와 좌파가 정권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도, '좌파 전복론 및 나라 헌납론'은 보수 정당 내에서 소수 지분을 차지하면서도, 막후에선 정치적 영향력을 꽤 크게 발휘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런 '우파식 음모론'은 21세기에도 청와대, 국회, 정부 각 부처(특히 문화부)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사람들을 당황케 했는데, 뉴라이트 출신 대통령실 직원의 튀는 발언이라든가, 공적인 국회 세미나 장에서 등장한 '5.18 북한군 개입설', 전광훈 목사의 '보수정당 경선 개입' 같은 사건이 그랬다.
어찌됐든 우파는 '좌익 척결'을 외치던 권위주의 정권 시절 '완장'을 차고 호령하던 시대를 지나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라는 '좌파 이단 정권'을 겪은 후 뜨거운 아스팔트 길거리로 나서게 된다. '좌파'의 전유물이던 아스팔트 투쟁 방식을 습득한 우파는 이제 장외에 서서 보수 정당에 압박을 가하는 방식으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은 건 '민주당 간첩들이 나라를 망하게 해 북한 김정은에 헌납하려 한다'는 굳건한 테제였다. 일부 극우 기독교계의 자금을 지원받은 그들은 제도권 보수 정당을 압박하는 전략과 전술을 사용해 자신들만의 '혁명 운동'과 슬로건을 다듬어나갔다. '우파 지지세'가 과거 20세기만 못하다는 걸 깨달아가면서 위기감에 젖어 있던 한국의 제도권 보수 정당(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국민의힘 등)은 안일하게도 이들과 연을 끊지 못했고, 오히려 이들을 적극 활용해 '좌파'들의 집권 시도를 분쇄하는 데에 이용했다. 그것이 '독약'인 줄 알면서도.
'탁' 치면 '자백'이 줄줄이 나오던 시대, 무시로 간첩단을 외과 수술하듯 뽑아내던 군사정권 공안 검사들의 시대는 갔다. 2000년 이전의 공안 사건들의 형태와 다른 양상의 공안 사건들이 2000년 이후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그 대표적인 게 '이석기 내란 음모 사건'이다. 북한 연계설을 입증하지 못한 수사 당국은 등산 모임을 '산악 훈련'으로 둔갑시키고 총기 탈취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이들을 기소했다. 통합진보당은 정당 자체가 해산되고 만다.
이석기 전 의원 등이 주도한 몇몇 모임과 그 모임에서 나온 과격 발언, 합법적인 북한 백두산 등반을 가지고도 중형을 선고한 수사 당국은 득의양양했지만, 21세기의 공안 사건은 점점 블랙 코미디를 닮아 가고 있었고, 90년대, 2000년대에 세계화와 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비교적 리버럴한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그런 음모에 공감하지 않게 됐다.
2024년 12월 3일, 결국 중대한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비상 계엄 사태와 국회 무장 군입 난입 지시로 '좌파=잠재적 내란 세력'의 공식을 깨뜨린 위인이 바로 윤석열이다. 대통령이 된 그는 스스로 아스팔트 우파의 테제를 받아들여 미몽에 빠진 국민들을 계몽해야 한다는 '짐'을 어깨에 둘러메고 스스로 위헌, 불법 계엄을 선포함으로써 '내란'의 아이콘이 돼 버렸다. 내란은 좌파들이 획책하는 것이라는 '우파 세계관'의 최대 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윤석열의 가장 큰 실책 두 가지는 스스로 망상에 빠졌다는 점, 그리고 더 큰 실책은 세상이 변한 걸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기표 용지의 윤석열 이름 옆에 도장을 찍어 준 이유는 내란을 벌여 대한민국을 악의 손아귀에서 구출해달라는 염원 때문이 아니라, 전임 민주당 정권보다는 조금 더 자유주의적인 태도를 보여주길 바라서였다. 그 바람을 윤석열 본인이 정면으로 배반한 셈이다. 그 죄는 어떤 형벌로도 다스릴 수 없는 중죄다. 특히 보수진영은 윤석열이란 폭탄을 정면으로 맞고 회생 불능 상태에 빠져들 것이다.
윤석열만 몰랐지, 세상은 이미 변하고 있었다. 문재인이 김정은과 정상회담을 했을 때 대통령 지지율은 80%에 육박했다. 일부 우파 세력들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을 지지하지 않는 10% 남짓한 극우 우파들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 채, '결국은 우리가 옳았다'는 게 언젠가 증명될 것이라는 허황된 믿음으로 빠져들었다. 변화된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한 보수는 죽은 보수다. 그 죽은 보수가 지금 좀비가 되어 윤석열의 계엄을 옹호하는 지경까지 왔다. 이들은 세상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탄핵 집회에 나선 세대는 2010년 이른바 '오세훈의 난'을 뚫고 실시된 전국민 초등학생 무상급식 제도 속에서 자라난 세대다. 국가의 공적인 역할에 대해 눈을 뜬 세대다.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겪은 세대이고 2022년 이태원 참사를 목도한 세대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 온 세대다. 40대, 50대는 세계화 물결 시대인 90년대와 노무현 정부 시대인 2000년대에 20대, 30대를 지나온 세대다. 20대부터 50대까지는 민주주의를 공기처럼 호흡하고 자라난 세대다. 이들이 대한민국 경제, 사회, 문화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지난 총선 결과를 보더라도 한국의 정치 지형이 변화하고 있다는 가설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고 있다. 서울과 함께, 인구가 늘고 있는 경기도의 30대, 40대, 50대 중간 소득 계층이 선거를 좌우하고 있다. 영남이니, 호남이니 하는 '지역 정치'는 쇠락하고 있다. 북한은 윤석열의 12.3 쿠데타 이후 조용하다. 어떤 빌미도 주지 않으려는 듯 하다. 우파들의 입장에선 지금이 핵실험을 하고 북한군을 남한에 내려보내 사회를 교란시키기 좋은 시절이라고 알겠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민주당 간첩 정권이 북한 김정은에 나라를 헌납하려 한다'는 말이 도무지 통하지 않는 세대들. 좌파의 내란 공포, 혹은 콤플렉스가 없는 세대에게 '내란 가능 세력'은 이제 '우파'로 넘어갔다. 윤석열의 최대(?) 업적이자 한국 정치사에 남을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제 다음 세대는 '우파'를 믿지 못하게 됐다. 낡은 망상에 빠진 건 윤석열뿐만이 아니다. 지금 국민의힘은 보수를 망치고 있는 이 망상에서 하루빨리 빠져 나와야 한다. 보수는 이제 윤석열을 깨끗이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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