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늘 '다른 수단' 휘둘러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기고] 검찰·언론·운동 악용한 '증오의 정치', 즉흥적 계엄으로 파국

왜 이런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윤석열 대통령은 왜 시민 누구도 수용은 물론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선택을 했을까? 정치는 또 왜 이렇게 적대와 증오로 가득 차 있을까?

사람에서든, 제도에서든, 시대 변화에서든 답을 찾아야 할 텐데, 시간을 거슬러 보면 민주화 이후 대통령들이 한결같이 의존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politics by other means)', 곧 정당과 의회가 아닌 검찰·언론·운동의 동원에서 그 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다.

민주화 이전 권위주의 시대에는 총칼로 권력을 잡은 군인 출신 대통령이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같은 정보기관을 통해 정치를 좌우했다. 그들은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고 경제 성장과 부패 척결로 부족한 정당성을 메우고자 했다. 그들 체제에 위협이 될 만한 인사는 간첩이나 용공으로 몰았고, 수뇌부 지시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은 부정이나 비리 혐의로 위협했다.

이런 정치에서 검찰과 경찰은 군부정권의 하위 파트너 내지 수족으로, 주어진 역할만 수행할 뿐이었고 크게 주목받는 경우도 드물었다.

민주화는 다른 정치에 대한 기대를 품게 했다. 시민 누구나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밝히고 정부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시대라면, 그 일을 하라고 만들어진 정당과 의회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시민들의 서로 다른 요구와 주장, 이익과 가치를 표출하고 집약하고 조율하고 조정하는 일, 이를 둘러싼 갈등과 타협, 경쟁과 협력은 정당과 의회 없이는 불가능하다. 체육관 대의원이 아닌 시민들 손으로 직접 뽑는 대통령이라도 정당, 의회와 함께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를 실천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강력하고 광범한 국가 기구의 정점에 선 대통령들은 정당이나 의회에 의지하기보다 언론, 검찰 같은 정치의 '다른 수단'을 활용해 상대를 제압하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지 못했다.

같은 편 언론을 통해 상대편 정치인의 비위를 폭로하고, 검찰로 하여금 수사‧기소토록 하고, 사법부의 판결에 맡기는 방식은 여론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기도 쉽고 상대방의 도덕적 정당성을 허물어뜨리기도 쉽다. 정당과 의회가 요구하는 설득과 동의, 타협과 책임의 정치에 비하면 더없이 쉽고 단순하며 때로는 화끈하고 통쾌하기까지 한 일이다.

▲ 윤석열 대통령이 김용현 국방부 전 장관과 행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 언론과 검찰 동원

아마도 그 시작은 1991년 국회의원 뇌물 외유 사건이었던 듯싶다. 내각제 각서 유출로 곤궁에 처한 노태우 대통령은 의회 정치를 주도하는 YS, DJ에 대한 우회 공격 방법을 찾았다.

당시로서는 관행에 가까운 (그럼에도 불법인) 기업 지원에 의존한 국회의원 국외 출장이 조선일보 등 주요 언론을 통해 폭로되었고, 검찰 수사와 기소가 이뤄졌고, 당사자들은 시민들의 비난 속에 재판에 넘겨졌다.

3당 합당에 이어 의회의 정당성을 허무는 방식으로 다시 한 번 정국을 흔들려는 포석이었지만, 이를 눈치챈 YS는 자파 의원을 통해 수서지구 택지분양 특혜의 청와대 연루설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 과정에서 대통령 측근뿐 아니라 여야당 의원들도 부정한 자금을 수수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써 대통령의 마지막 개헌 시도는 좌절되었지만, 국회의원 뇌물 외유와 연이은 수서 비리는 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 강화와 함께 정치를 부정부패 문제로만 보려는 인식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후로도 대통령들의 판단과 선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이 단행한 금융실명제와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권위주의 시절 부정한 방법으로 큰 부를 쌓은 여당 내 다수파 민정계 의원들의 숙청이었다.

JP의 탈당과 신당 창당, 민정계의 부활 속에 1995년 지방선거에서 패한 대통령은 검찰에 특별수사본부 설치를 지시하고 5․18 특별법과 함께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기소하는 것으로 국면 전환을 노렸다.

이회창 후보의 DJ 비자금 수사 요구를 물리치고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강화된 경제 논리에 부응해 '고비용 정치구조 개선', '부정부패 일소' 이슈를 공론화했고, 그에 따라 검찰은 정치자금 부정 수수와 관련된 정치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에 들어갔다.

혐의자 대부분이 야당 소속이었기에 한나라당은 검찰 수사의 공정성을 문제 삼으며 '방탄 국회'로 맞섰고, 대통령과 검찰의 위협 속에 야당 의원 2명이 여당에 합류함으로써 국민회의-자민련 연합은 원내 다수를 확보하게 되었다.

부패 정치인 낙천‧낙선을 목표로 한 총선시민연대 운동이 큰 주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선거 패배와 DJP 결별이 잇따르면서 대통령과 집권 여당은 수세에 몰렸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은 언론사 세무조사와 함께 또 한 번 검찰 수사에 의존했다. 한나라당 전신인 신한국당이 안기부 예산을 선거에 전용했다는 혐의는 수사와 재판 결과에 따라 야당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힐 수도 있었지만, 기대한 결과를 낳지 못했다. 국세청을 동원해 대통령에 적대적인 신문사들을 제압하려던 시도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

노무현·이명박 대통령: 특검, 탄핵, 운동의 동원

정치에서 검찰의 역할이 커지고 그들의 수사 공정성 시비가 잦아지자 특별검사제가 도입되었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는 이 특별검사제, 대북송금 특검과 함께 시작되었다. 야당 단독으로 통과된 특검법을 대통령이 수용하자 민주당 내 동교동계와 소장파는 결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던 대통령은 의회뿐 아니라 행정부를 장악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으며 검찰과의 갈등을 노출했다. 어떤 정치세력도 우위를 점하지 못한 그 권력의 공백기에 검찰은 대대적인 대선자금 수사에 나섰고, 언론과 시민단체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대통령 측근과 여야의 거물급 정치인들을 구속했다.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지구당 폐지와 법인‧단체의 정치자금 기부 금지는 이런 맥락에서 정치개혁으로 정당화되었다.

검찰과 특별검사 외에 또 다른 무기도 등장했다. 이번에는 대통령이 아니라 국회가 주도했다. 헌정사상 최초의 탄핵소추가 그것이다.

민주당 분당으로 열린우리당에 합류한 대통령은 총선을 앞두고 소수 정당으로 전락한 여당 지지를 공개적으로 호소했다. 이에 대한 위협감에 해묵은 반감이 더해져 야3당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위반을 근거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이제 제도적 수단을 동원한 갈등은 정치권에만 머물지 않고 운동의 동원으로 이어졌다. 탄핵안 가결로 울부짖는 여당 의원들 모습이 연일 방송을 타면서 탄핵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대거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렇게 탄핵 이슈가 선거를 압도한 덕분에 여당은 원내 과반 의석을 얻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대규모 촛불집회와 그에 따른 선거 동학의 원형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대선과 연이은 총선에서 전례 없는 격차로 승리한 이명박 대통령도 검찰 동원의 유혹을 끊지 못했다.

선거에서 패한 야당 세력은 정부의 일방적인 한미 쇠고기 협상 타결을 문제 삼아 거리로 나섰다. 아직 대통령의 자장 하에 놓여 있지 않던 주요 방송매체가 시위대를 향한 과잉 진압에 초점을 맞추면서 시민들의 반발과 분노는 더 많은 참여로 이어졌다. 또 한 번의 촛불집회는 2개월여 동안 계속되었고 결국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담화와 청와대 비서진 및 내각 개편으로 마무리되었다.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이 시위의 배후에 친노 세력이 있다고 판단한 이명박 대통령은 노무현 전임 대통령과 그 후원자들에 대한 세무조사와 검찰 수사를 지시했고, 결과는 전임 대통령의 자살이었다. 이 비극은 대중적 비탄과 분노를 낳았고 현 대통령에 대한 증오‧적대에 더해 '나는 꼼수다' 큰 인기에서 보듯 경멸과 조롱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 시기에는 '다른 수단들' 간의 다툼이 두드러졌다. 시작은 또 다른 국가 기구, 국가정보원이었다.

2012년 대선 기간 중 국정원의 댓글 조작 사건이 폭로되었고, 그로 인해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 시작 전부터 정당성 시비에 휘말렸다. 대통령 입장에서는 댓글 조작이 있더라도 선거와 무관하거나 가급적 경미한 사안으로 다뤄지길 바랐지만, 검찰은 국정원장을 공직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이에 대통령은 조선일보를 통해 검찰총장의 사생활 문제를 폭로하고 감찰로 압박해 총장직에서 물러나도록 했다. 그 와중에 수사 외압을 폭로했던 윤석열 특별수사팀장 또한 징계를 받고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견고한 지지 기반을 자랑하던 박 대통령도 임기 후반 당내 갈등에 따른 총선 패배로 위기를 맞았고, 한때는 같은 편이었던 언론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조선일보가 검찰 라인을 장악한 우병우 민정수석 처가의 부동산 관련 비위 의혹을 폭로하자 청와대는 즉각 반박 성명을 내고 조선일보를 고소했다. 이에 TV조선은 대통령 공천 개입을 시사하는 녹취록, 경제수석의 미르재단 모금 지원 등의 보도로 맞섰다.

여기에 이석수 특별감찰관의 민정수석 조사를 둘러싼 공방과 송희영 조선일보 주필의 대우조선해양 로비 연루 폭로가 더해졌다. 이 갈등은 이석수 특별감찰관과 송희영 주필의 사퇴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몇 달 후 JTBC의 최순실 테블릿PC 보도가 나오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조선일보, JTBC, 한겨레 등을 아우르는 언론 연합의 지원 속에 거리와 광장을 메운 촛불시위의 힘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당했고, 그 과정에서 윤석열 검사가 함께한 특검 수사와 기소로 법원의 유죄 판결도 받게 되었다.

문재인·윤석열 대통령: 다른 수단 정치의 완성과 파국

87년 민주화 운동 이래 최대 규모의 촛불시위와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속에 당선되었지만, 문재인 대통령도 다를 것은 없었다. 오히려 문 대통령 집권 시기 검찰‧언론‧운동의 동원은 이전보다 더 광범하고 체계적인 면모를 띠었다.

검찰 동원은 '적폐 청산'으로 나타났다. 보수정부 9년의 불법‧비리‧부정을 깨끗이 쓸어내겠다는 명분하에 전임 정부뿐 아니라 전전임 정부까지 대통령, 국가기구, 언론을 둘러싼 각종 의혹 사건에 대한 수사‧기소‧재판이 이뤄졌다.

언론 동원은 여와 야, 보수와 진보의 파당성 강화로 나타났다. 기존의 신문‧종편 매체는 말할 것도 없고, 방송장악‧블랙리스트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은 공영방송조차 과거와 다른 공정성과 균형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SNS와 유튜브 또한 자극적인 콘텐츠 속의 허위 정보와 음모론으로 대중적 파당성을 배가했다.

운동의 동원은 직접 민주주의 확산과 팬덤 정치 부흥으로 나타났다. 촛불시위가 촛불혁명, 시민혁명으로 격상되면서 광장의 시민은 혁명의 주체이자 민주공화국의 진정한 주인으로 상찬받았다. 타락하기 쉽고 부패하기 쉬운 정당과 의회를 넘어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통치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별다른 이의 없이 수용되곤 했다.

그런 상찬과 주장의 제도적 구현이 청와대 국민청원이었다. 운동의 열정은 지도자 개인에 대한 컬트적 지지로 분출되기도 했다. 국민이 주인이고 직접 민주주의가 최선이라 해도 지도자 없는 운동, 지도자 없는 통치를 상상할 수는 없다.

여기에 SNS 등의 소통 매체가 정당 같은 제도적 매개체를 대신해 지도자 개인과 지지자의 정서적 일체감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동했다. 그렇게 대중의 옳음에 대한 확신과 인터넷 초연결사회의 매체 효과가 더해져 정치 리더에 대한 무비판적 추종이 만들어졌다.

문 대통령의 곤경 또한 자신이 부리던 정치의 다른 수단, 검찰로부터 시작되었다.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적폐 청산을 진두지휘했던 윤석열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검찰총장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법무부 장관 조국 가족에 대한 검찰 수사로 문 대통령과 윤 총장의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고 그 파장은 세 갈래로 뻗어나갔다.

우선 문재인 정부의 윤리적 정당성이 크게 훼손되었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 도덕성을 앞세운 정부였기에 그 상징적 인물을 둘러싼 범죄 혐의와 그에 대한 대통령의 비호는 정부 여당에 대한 대중적 신뢰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으로 여론이 다시 한번 뚜렷하게 양분되었다. 야당 세력은 대통령과 여당의 약한 고리이자 선명한 공격 타겟을 찾았다. 여당 세력은 부당한 검찰 수사의 기억을 불러들이며 '검찰 개혁'으로 맞섰다. 결과는 '광화문 집회', '서초동 집회'였다.

마지막으로 권력에 반하는 수사와 그에 따른 고초 덕분에 윤 총장은 대중적 신망을 얻으며 단번에 야당 대선 후보에 올라 대통령직까지 거머쥐었다.

윤석열 정부 하에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는 극한에 다다랐다. 0.73% 차 신승에 여소야대 상황을 고려하면, 야당의 협력을 얻기 위해 상대를 궁지로 몰아넣을 수단 활용은 자제할 법도 했다. 하지만 전임 대통령들도 하나같이 못한 일을 검찰 출신 대통령에게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대선 전후로 불거진 야당 대표의 각종 불법‧비리 의혹에 대해 검찰은 거침없이 수사에 나서 기소를 이어갔다. 수세에 몰린 야당 대표의 선택은 재판 지연만이 아니었다.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 역시 정치의 다른 수단으로 맞서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대통령과 영부인, 정부 인사를 둘러싼 여러 의혹과 부적절한 의사결정 과정에 대해, 언론을 통해 폭로하고 특별검사 추진으로 위협하고 고위공직자 탄핵안으로 압박했다. 여기에 여당 대표마저 등을 돌리자 대통령은 궁지로 몰렸고, 민주주의 규범으로도 일반의 상식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수단을 선택했다.

정당과 의회를 무시한 정치의 결과

집권당인 국민의힘이 대통령과 좀 더 상호 대등한 관계를 가졌더라면, 대통령의 의사를 미리 알고 자제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집권 여당이 조직적으로 좀 더 강했더라면, 대통령의 2선 후퇴나 자진 사퇴를 이끌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야 정당이 좀 더 견고하고 폭넓은 사회적 기반을 가졌더라면, 정당 간 협의를 통한 정국 수습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야당 모두는 그럴 의사도, 능력도, 기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탓에 우리는 또 한 번의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적대와 분열을 마주하고 있다.

대통령들이 통치를 위해 선택한 정치의 다른 수단이 한국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그 다른 수단에 군대도 포함됨은 물론이다. 검찰‧언론‧운동이 정치적 편의를 위해 지속적이고 대대적으로 동원되면 회복하기 어려운 부작용을 낳는다.

검찰의 동원은 정치 전반을 범죄시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언론을 통한 폭로는 정치를 도덕화하고 휘발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운동의 동원은 정치를 선악 대결 구도로 몰아가거나 정치 자체를 적대시하고 부차화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 모든 동원으로 인해 정치 불신이 깊어졌고, 진영 대립의 정치 양극화가 심화되었고, '정서적 급진주의'의 포퓰리즘 정치가 확산되었다.

대통령의 정치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시민사회로까지 뻗어나간 방대하고 강력한 국가 기구의 수장에 오른 덕분에 검찰‧언론‧운동을 자기 의도대로 손쉽게 활용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시민사회의 서로 다른 갖가지 이익과 요구를 인정하고 수용하며 정책으로 집행할 수 있도록 정당과 의회에 의존하는 방법이다.

이 두 방법이 완전히 배치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통령이 검찰‧언론‧운동의 힘에 의지하는 만큼 정당‧의회의 지위와 역할은 위축되고 형해화될 수밖에 없다.

이제는 고전이 된 영화 <여인의 향기>는 탱고 신도 좋지만 마지막 연설 장면이 압권이다. 가난한 고학생의 진실한 영혼을 응원하는 그 연설에서 알 파치노는 이렇게 말한다.

"난 지금도 인생의 갈림길에 서있소. 늘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알았지만, 그 길을 택하지 못했소. 왜 그런지 아시오? 그 길이 너무도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대통령들도, 우리도 올바른 정치의 길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길이 너무도 힘들기에 애써 눈 감고 쉬운 길을 택해왔는지도 모른다.

정치는 어려운 일이다. 시민들의 서로 다른 요구와 주장 속에 공익과 사익의 균형을 맞추는 일은 원래도 어렵지만, 민주화 이후 특히 지난 10여년 간의 여러 변화로 더욱 어려워졌다.

시민 주권, 시민 참여, 직접 민주주의를 과도하게 강조하는 지적 흐름은 민주 정치의 또 다른 원리인 대표와 책임에 충실하고자 하는 정치인들의 설 자리를 크게 줄여 놓았다.

SNS로 대표되는 소통 기술의 발전은 정치 활동의 방향을 미디어 중심의 이미지와 이벤트, 발 빠른 대응에 맞추며 공유 가능한 사실과 합리적 토론, 사려 깊은 타협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세계화와 기술 발전에 따른 시장경쟁 심화와 산업구조 재편은 선택 가능한 정부 정책의 범위를 축소시키고 안정된 정치적 지지 기반을 허물며 사회적 불안과 고통을 야기하고 있다.

정당과 의회가 이런 어려움을 해소하는 만병통치약일 수는 없지만, 그 해결책을 찾는 제도적 출발점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정당과 의회의 가치와 권위를 인정하고 활용하기보다 무시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자유민주주의와 절제의 미덕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자주 언급했다. 한동훈 전 대표도 국민의힘이 자유민주주의 정당임을 강조하곤 했다. 민주당을 자유주의 개혁 정당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누구나 자유를 말하고 자유주의의 가치를 인정하는 듯하지만, 우리 정치권에서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은 없는 것 같다.

정치이론가 마이클 왈저는 자유주의를 '분리의 기술(art of separation)'로 보았다. 하나의 권위와 가치 아래 유기적으로 통합된 공동체를 교회와 국가, 왕조와 정부, 정치와 경제 등으로 나누는 데서 자유주의가 시작된다는 말이다.

국가와 사회, 공적 생활과 사적 생활을 나눠 그 사이에 경계를 긋는 데서 시민적 자유가 창출된다. 정치, 경제, 교육, 종교, 가족 등의 제도 영역 사이에 경계를 긋는 데서 사회적 자유가 만들어지며 가치 다원주의의 토대가 자리 잡는다. 입법‧행정‧사법의 분리를 통한 기능적 견제와 균형도, 전체 사회를 부분(part)으로 나눠 대표하는 정당들(parties) 간의 사회적 견제와 균형도 전제를 막고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적 기제이다.

물론 자유주의의 경계는 각 제도 영역의 고립을 위한 것도 아니고 완전히 고정된 것도 아니다. 이런 경계들을 어떻게 긋고, 그 경계들의 어디에 어떤 크기로 교류의 문을 만들지는 정치인과 시민, 영역 구성원들의 몫이다.

지금까지 대통령이 주도하고 야당까지 동참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는 사법기구·언론매체·사회운동·정당정치, 그리고 입법부와 행정부 각 영역 간의 경계를 존중하지 않았고, 이들 영역 내의 구성원들 역시 자기 영역의 독자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절제의 미덕을 보여주지 못했다.

다른 영역들도 그렇겠지만, 이런 탓에 자유주의는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했고, 자유민주주의도 여전히 우려스러운 위험 속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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