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의 자연상태와 20대 청년
영국의 정치사상가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는 리바이어던에서 "경쟁은 폭력을 사용해 타인의 인격(신체)은 물론이고, 아내와 아이들, 가축을 지배하도록 만든다. 자기 확신의 결핍은 폭력을 사용해 자기 자신을 보호하게 만든다"고 하면서 그 상황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1)이라 불렀다.
나는 3년 전쯤, 그 홉스의 자연 상태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한 대학생을 만났다. 한 학기 강의를 마치면서 내 수업을 들은 한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무나 열정적으로 수업에 참여하고 예리한 질문을 던지며 선생을 많이 괴롭힌(?) 학생이었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내려오는 용기도 대견해 보였다. 그런데 종교와 정치 얘기는 하지 말란 경구를 무시하고 그 학생과 정치 얘기를 해버렸다.
그가 관찰하고 이해하는 한국사회는 생존을 향한 승자독식의 무한경쟁 그 자체였다. 그에게서 대학은 죽고 죽이는 싸움의 무대로 올라가기 위해 자신의 날카로운 이빨을 갈고 닦아야 하는 늑대들의 대기실이었다. 그 학생은 학교생활에서 가장 경멸받아야 할 사람들로 조별 과제 무임승차자를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들과 동일한 성적을 받을 학생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그 경우라면, 무임승차자에 대해서는 일정한 차별을 둘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러한 무임승차자가 자신들의 학습 공동체에 들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하다고 답했다. 선생은 무한경쟁의 승리주의와 같은 가치관을 언제부터 갖게 되었냐고 물었고, 학생은 초등학교 때부터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러한 심성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와 같은 교육체계를 만든 기성세대의 책임이라는 평가를 덧붙였다.
선생은 현재와 같은 경쟁의 세계를 생각하면 어떤 마음이 드는가, 라고 물었다. 학생은 당연히 불안하고, 조바심이 나고, 긴장감이 들고, 심지어 슬프기까지 하다는, 여러 좋지 못한 감정들을 드러냈다. 그럼, 왜 더 나은 사회, 행복하고 기쁘고 보람이 있는,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향한 꿈을 꿈꾸지 않는가, 라고 선생은 물었다. 학생은 한국의 여러 진보적 실험들을 보면서 자신은 이미 진보에게서는 아무런 미래적 전망도 볼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결국 지독한 평행선만을 그리면서 그와 헤어졌다. 선생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학교는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왔고, 가르치려고 하는가, 과연 교육에 희망은 있는가, 대학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라는 회의적 질문이었다.
야만으로 퇴행한 한국의 근대
헝가리의 영화이론가 발라즈(Bélla Balázs)는 인간의 얼굴을 개인의 얼굴과 유형의 얼굴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이중적 실체로 바라보고 있다. 그에게서 인간의 얼굴은 개인의 체험성과 사회적 유형성으로 조형된다.2) 그 학생은 단순히 서울에서 내려온 한 청년의 얼굴이 아니었다. 가장 보수화되어가고 있다고 평가받는 또는 자신의 보수화를 애써 숨기려 하지 않는, 대한민국 20대 남성이라는 특정 세대 정치적 유형의 얼굴을 나는 만났다.
산업화와 민주화로 통칭되는 근대화의 시간을 지나온 한국사회에는 불안, 혐오, 적대, 증오, 생존, 피로와 같은 어둡고 차가운 낱말들이 떠다니고 있다. 한 연구자는 그 양상을 사냥터로 묘사하고 있다.
"반면에 사냥꾼의 관심은 자연의 균형도 아니고 잘 고안된 정원의 디자인도 아니다. 오로지 자루를 가득 채울 정도로 큰 사냥감을 죽이는 것에만 신경 쓴다. 분별없는 사냥으로 숲이 망가져 사냥감이 고갈되면, 사냥감이 우글대는 또 다른 숲으로 옮겨가면 될 뿐이다. 현대사회는 어떤 온정이나 생태학적 양심도 기대할 수 없는 사냥터 같은 세상이고, 우리는 모두 사냥터 한복판에 내던져진 외로운 사냥꾼에 불과할 존재들이다."3)
이러한 사냥꾼은 모든 타자를 자신의 적으로 돌리거나 먹이로 파악할 뿐이다. 여기서 윤리와 도덕이 자신의 자리를 찾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개인과 공동체의 삶이 그 기초부터 흔들리는 위기를 겪어야 했다. 해고, 이혼, 노숙, 범죄, 자살로 이어지는 혼란의 소용돌이를 경험한 국민들이 타인의 삶을 되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 결과 고립적이고 닫힌 자아가 한국사회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공공성, 공동체성, 이타심, 공감, 연민의 가치를 사유하고 실천할 여유 혹은 의지를 가질 수 없는 현실을 모두가 살아가야 했다. 이른바 '97년 체제'는 "사회의 도덕적 존엄성이 훼손되고 파괴된 상태에서 무차별적인 과시가 지배하는 왜곡된 인정투쟁의 공간에서 살아남는 것을 의미하는 사회적 생존"을 강하게 요청했고, 그 체제가 잉태한 "사회적 생존의 공격적 형태는 성공지상주의 혹은 입신출세주의 혹은 노골적인 속물주의"4)를 당연하거나 자연스러운 덕목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렇지만, 사회와 인격이 해체되는 고통을 감내하며 생존을 유일한 목표이자 미덕으로 삼아야 했던 한국사회가 사냥꾼의 적나라함과 야만성을 극복하고 도덕과 윤리의 사회로 다시 나아갈 각성의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것은, 아이러니하지만, 2014년의 세월호 참사였을 것이다. 부당한 죽음, 이해할 수 없는 죽음,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 앞에서 한국사회는 집단적 트라우마를 경험해야 했다. 일상의 무의미함이 사회를 지배했지만 결국 사람들은 연민과 공감과 연대의 마음을 다시 만들어가야 할 운명이었다. 사람들은 기억의 의무를 말해왔고, 연대와 정의를 다짐했다.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과 민주주의를 논의했고, 새로운 세대의 탄생을 강력하게 외쳐왔다.5) 그러나 교황에 의한 위로의 문이 닫힌 뒤 다시 야만적 적대의 문이 열렸다. 단식으로 저항하는 유가족에 대한 폭력이 시작되었다. 극우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저장소' 회원들이 이른바 '폭식투쟁' 시위를 전개하면서 유가족들의 슬픔과 고통을 조롱거리로, 거짓된 연극으로 폄훼하고, 폭식투쟁을 '광화문대첩'으로 칭송하는 반인륜성을 우리는 분노와 눈물로 지켜봐야 했다.
그 지독한 반문명의 국면 속에서 촛불광장이 열렸고, 무책임하고 부패한 정권을 시민이 끌어내렸다. 그리고 이른바 '촛불정부'가 탄생했다. 문재인 당선자가 광화문광장이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세월호 유가족과 손을 잡는 장면 속에서 우리는 커다란 희망과 기대와 가능성을 꿈꾸었다.
그러나 5년의 정치적 시간이 종결되고, 다시 2년 반이 흐르고 있는 지금의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홉스의 사회를 벗어났는가?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는 다시 적나라한 경쟁과 혐오의 자연 상태로 회귀하고 있다. 지역과 지역, 성과 성, 이념과 이념, 사람과 사람, 학교와 학교, 모든 사회 영역과 주체가 제로섬의 세계 속으로 들어와 있다. 권력은 다시 반동으로 회귀했고, 사회는 전혀 바뀌지 않고 있다. 우리가 2016~2017년의 촛불을 혁명으로 부를 수 없는 근본적 이유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8년 전의 광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프랑스, 68과 뱅센느 실험
프랑스의 68은 매우 특이한 대학을 탄생시킨다. 새로운 실험대학, 뱅센느 대학(현재의 파리8대학)이다. 뱅센느 대학은 대학과 학문적 권위의 상징 소르본느에 맞서 새로운 교육과 지식의 매트릭스를 꿈꾸었다. 국가와 자본의 성장을 위한 인적 양성소로서의 대학을 거부하고 새로운 학문연구, 다학문성, 세미나 형식의 새로운 수업방식, 교수와 학생의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교류 등의 실험을 시도했고, 프랑스 대학 최초로, 대학입학시험을 치르지 않은 노동자들의 입학을 허용했다. 당시 대학의 모습을 작가인 비르지니 린아르트(Virginie Linhart)는 이렇게 말했다.
"뱅센느, 거기는 정말 68년 5월이, 노동자들과 연대한 청년학생들의 저항이 만들어낸 모든 가능성의 장소였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바칼로레아 시험을 치르지 않은 사람들에게 대학을 개방한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그 시절, 바칼로레아는 부르주아의 전유물이었지요. 저는 뱅센느에서 가장 강렬하게 각성할 수 있었습니다. […] 뱅센느에서 제가 발견한 것은 모두를 향한 개방과, 다른 꿈을 꾸고, 다른 삶을 맛볼 가능성이었습니다."6)
뱅센느는 그러한 실험적 지식교류와 교육을 실천하기 위해 많은 젊은 학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68에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그것으로부터 많은 지적 영감을 받은 혹은 68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려 한 지식인들이었다. 푸코, 들뢰즈, 데리다, 랑시에르, 바르트, 바디우, 리오타르 등 프랑스 현대철학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들이 실험대학에 참여했다.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이 자신의 사유 속에서 넓고 깊게 성찰하고 반성하고자 했던 개념들, 현상들, 운동들, 이 모든 것들은 본질적으로 68의 집단 경험에서 출발한 것이다.7) 억압의 언어와 해방의 언어 사이의 긴장, 질서와 무질서라는 권위적 분류에 대한 비판, 신체의 욕망에 담겨 있는 탈주의 힘, 원칙 없고 무정형적인 정치적 주체들의 다양체적 운동, 합리적 의지를 통한 진실 찾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몸의 실천을 통한 진실 만나기, 정치적 대표의 허상과 데모스로 불리는 개별적이고 이질적인 주체들의 목소리 등, 뱅센느는 근대성을 넘어 현대성을 향한 지적 상상력의 산실이었다.
그들은 당대의 혁명적 변화 요구를 일회적으로 정리하고 마무리하려 하지 않았고, 자신의 철학과 정치학 전체를 관통할 장기적 사유를 시도했다. 그 속에서는 프랑스의 70년대와 80년대를 이끌 유토피아의 지적 형식이 만들어지고 있었고, 그 혁명적 지식들은 대학 바깥으로 나가 프랑스 사회에 커다란 도전으로 작용했다. 8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 좌파의 집권과 정치사회적 실험은 그들의 지적‧실천적 운동과 떼어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시국선언 이후 대학의 소명
현재 우리 대학들에 시국선언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민주공화국의 위기 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부패, 무책임, 무능력, 권력 사유화 등, 시국선언문들은 문제의 정치적 핵심을 정확히 집어내고 있다.
그러나 대학교수들은 비장하게 시국선언을 낭독한 뒤 다시 강의실로, 연구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직업의 사냥터로 나갈 청년들을 길러내는 데 다시 힘을 쏟는다. 아니 쏟아야 한다. 서열과 순위 경쟁에 최적화된 대학의 구조적 조건 속에서 시국선언의 열정은 곧장 무한경쟁과 성공의 무대 위로 올라갈 인력들을 키워내는 열정으로 전환되어야 할 운명이다.
시국선언으로 지금의 부패한 정권이 스스로 퇴진하거나 탄핵된다면 우리 사회는 이제 더 이상 이기적 욕망의 놀이터가 되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책무는 시국선언을 통해 정권을 비판하고 끌어내는 일로 종결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20대는 진보정권이 들어선다고 해도 여전히 자기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힌 불행한 영혼들로 남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사회와 교육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프랑스의 68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국의 '촛불'은 새로운 한국사회를 만들어갈 여러 사유와 상상력의 원천이 될 만한 놀라운 경험이었다. 국민주권의 실천적 존재성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되어 좋은 사회를 향한 다양한 아이디어가 분출한 자리였다. 그러나 촛불의 새로움은 빠른 속도도 제도권의 선거 국면으로 흡수되어 버렸고, 특정 정파의 권력 장악으로 경화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혁명성은 한국연구재단의 체제 속에서 몇 편의 정치학, 사회학 등의 논문으로 종결되어 버렸다. 촛불정부로 불린 문재인 정부가 사회대개혁을 완수하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 정부-여당의 책임이지만, 사실 촛불의 운동, 촛불의 리듬, 촛불의 상상에 대한 깊은 지적 사유가 이어지지 못한 탓이다. 그 주체는 결국 대학이어야 했다. 그러나 대학은 그 새로운 정치, 새로운 시민성을 깊게 사유하지 않고 상상하지 않았다. 촛불의 운동이 빠르게 과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대학이 막아내지 못한 것을 우리는 깊게 반성해야 한다.
시국선언의 물결 속에서 한국사회는 다시 펼쳐질 시민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예견하고 있다. 시국선언이 단순한 정치적 수사로만 끝날 수 없다는 데 견고한 시민적 동의가 있다면 분명 그 실험 무대는 열릴 것이다. 그 가능성 앞에서 대학은 시국선언으로 종결될 수 없을 자신들의 의무를 만난다. 대학은 정교하게 해석하고 성찰하며 체계화하지 못한 촛불의 역사를 반성하면서 곧 도래하게 될 민주주의 운동을 사유하고 새로운 유토피아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시대적 소명은 대학의 고립적 활동일 수 없다. 대학과 대학의 지적-교육적 협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제 대학의 실천적 연대가 필요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1) 토마스 홉스, 신재일 엮어 옮김, <리바이어던>, 서해문집, 2007, p. 94.
2) 김호영, <영화이미지학>, 문학동네, 2014, 제5장.
3) 석승혜, 김남옥, <불안한 사냥꾼의 사회>, 스리체어스, 2019, p. 10.
4)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p. 42.
5) 인문학협동조합 기획,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 , 현실문화, 2015; 인디고 서원 엮음, <새로운 세대의 탄생>, 궁리, 2014.
6) "L’université buissonnière, l’expérience de Vincennes." Radio-France, 2021-01-21.
7) 한국프랑스철학회,<철학, 혁명을 말하다>, 이학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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