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대 자동차 수출 부럽지 않은 잘 만든 영화 한 편, 혹시 게임도?

[게임필리아] 대기업의 파란만장 콘솔 시장 진출기

옛날 옛날에 TV용 게임기가 '전시'되던 시절에…

1970년대 후반 전자오락이 널리 확산되기 전 한국 사회에 어떠한 게임들이 존재했는지는 명확히 알기 어렵다. 하지만 남아있는 신문이나 잡지, 광고 등의 자료들에 기대어 흔적들을 더듬어 보자면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1975년에 출시됐던 TV용 게임기 '컴퓨터TV'다. 1975년 1월 한 일간지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발명된 이 기기는 “TV만 있으면 컴퓨터를 부착,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TV의 일반방송에 실(싫)증을 느꼈을 때 스위치를 작동하면 화면에 배구, 축구, 공간경주 등 운동경기를 할 수 있는 볼과 배트가 등장, 이 때 컴퓨터에 부착된 양쪽 조정기로 여러가지 게임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설명만 보자면 영락없이 TV에 연결해서 플레이하는 콘솔기기인데, 정작 신문에 실려있는 실물 사진은 아케이드용 <퐁>의 모습이라 정확한 정체를 알기가 어렵다. 배구나 축구, 공간 경주 등 여러가지의 게임을 할 수 있었다는 묘사를 보면 아타리의 가정용 퐁게임기 - Sears Tele-games라는 이름으로 시판되었음 - 와 같은 세대인 콜레코의 텔스타(Coleco's Telstar)인가도 싶지만, 텔스타의 북미 출시가 1976년이었으니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1975년 1월 29일 매일경제 5면

이 기기의 정체가 무엇이었던지 간에 분명한 사실은 국내에 (신문기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TV용 게임기가 첫 시판된 시점이 1975년이라는 점인데, 흥미롭게도 이를 기점으로 하여 TV용 게임기에 대한 기사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이듬해인 1976년에는 오림포스전자에서 GAMATIC 7600이라는 '비데오게임기'를 개발해서 수출했으며, 대야물산에서는 “5인이 즐길 수 있는 비데오 게임머신”을 개발해서 수출할 계획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같은 해 열렸던 한국 전자전 행사에 관한 기사를 보면 금성사(현 LG), 삼성전자, 대한전선 등의 대기업들이 자체 기술로 TV용 게임기를 개발해서 출품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하지만 기사에는 전년에 미도파백화점에서 미국에서 들여왔다던 게임기와 (아무리 봐도) 똑같아 보이는 기기의 모습이 실려있어 다소 혼란스러운데, 최소한 금성이나 삼성 같은 국내 대기업들이 이 시기에 게임기 산업에 관심을 가지고 수출 시장에 뛰어들 생각이 있었던 것, 따라서 이들이 겨냥한 곳은 국내 내수 시장이라기 보다는 북미와 유럽의 수출 시장이었다는 사실은 명백해 보인다.

ⓒ1976년 10월 18일 매일경제 5면

그러한 가운데서 오림포스전자에서 개발했던 게임기는 국내 출시가 이뤄졌는데, 이것이 바로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오트론TV스포츠'다(다만 수출모델은 7600이었고 국내 출시 모델은 7800이었던 것으로 보임). 그러나 국내에서 이러한 게임기기들이 개발/출시되었다고 해서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콘솔플랫폼이 형성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1976년 말~1977년 초에 출시되었던 '오트론TV스포츠'의 출시가는 1만9,800원으로, 당시 평균 임금이 6만9,000원이었던 사실을 생각해보면 대중화되기 어려운 가격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당시 가부장적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을 한국 사회에서 어린 자녀가 가정 내 TV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아버지로부터 TV를 빼앗아(?) 게임을 한다는 것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 당시 오트론TV스포츠를 접했다는 회고를 보면 굉장히 신기하고 생소한 기기였다는 언급이 많기도 해서, 이 시기는 한국 게임의 역사에 있어 본격적인 콘솔플랫폼의 등장이라기 보다는 전사(前史)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오락실'의 증가

한국 콘솔 시장에서 다시 대기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80년대 후반부터다. 그 시작은 대우전자에서 1986년에 출시한 재믹스였다. 기존 MSX용 컴퓨터를 만들다 남은 DRAM의 재고 소진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던 재믹스가 예상 이상의 성공을 거두면서 다른 대기업들도 콘솔 시장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본래 세가와 연이 깊었던 삼성이 세가의 콘솔 마스터시스템을 '겜보이'라는 이름으로, 현대전자는 닌텐도의 패미콤을 '컴보이'라는 이름으로 들여왔고, 이후 해태제과나 코오롱처럼 전혀 무관했던 기업들도 콘솔 시장에 참전하면서 1990년을 전후로 17종(+@)의 콘솔이 한국 시장에 쏟아지게 된다.

사실 한국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콘솔의 유입이 좀 더딘 편이었다. 일단 세계 콘솔 시장을 주도하고 있던 일본의 콘솔들은 한일간 과거사 문제로 인한 일본 대중문화 수입 금지조치 때문에 정식으로 출시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 게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은 아닌데, 예를 들어 1980년대 초반부터 보급되는 MSX 컴퓨터의 경우 일본산 게임의 위력이 대단했으며, 대우에서 내놓은 재믹스 역시 근본적으로는 국내에 유입된 일본산 게임 소프트웨어가 없었다면 성공할 수 없었을 기종이었다. 하지만 결코 정식으로 수입되어 양성화된 시장을 형성할 수는 없었고, 실제로 80-90년대 내내 국내에 유입된 일본산 게임은 단속과 규탄(?)의 대상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했던 콘솔 시장이 대기업들도 이름을 걸고 참전하는 영역으로 부상하게 된 상황을 이해하려면 '1980년대 후반'이라는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단 1980년대 자체가 근면과 절약을 강조했던 이전의 시대와는 좀 다르게 진행되었다. 정권이 교체되면서 이전의 엄격하고 금욕적이었던 사회적 분위기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군부 특유의 억압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소비를 조장하고 계층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며 미뤄져 왔던 컬러 TV방송이 시작되었으며 통금이 해제되었고 프로야구 리그도 생겼다. 특히 88 서울올림픽 개최 확정은 한국 사회가 변화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는데, 대회를 앞두고 대대적인 재정비 사업이 진행되면서 사회 곳곳 고용 및 소득이 증대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1980년대 중반에는 이른바 '3저 호황'을 맞이하면서 1986~88년까지 3년간 연 12%라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이것은 중산층이 두터워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중산층은 자가용, TV나 VCR같은 가전제품 등에 지갑을 열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 콘솔 또한 편승했던 것이다(당시 콘솔이 결코 저렴한 기기는 아니었기에 동네나 지역별로 보급은 편차가 있었다). 여기에는 콘솔을 구매하여 '가정오락실'을 꾸리면 자녀가 집 바깥 위험한 전자오락실에 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중산층) 부모들의 희망이 반영되어 있기도 했다.

백만대 자동차 수출 부럽지 않은 잘 만든 영화 한 편… 혹시 게임도?

1990년대 들어오면서부터는 게임 자체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1992년 출시된 PC게임 <폭스레인저>를 기점으로 국산 게임들이 부상하면서 게임의 산업적 가능성이 주목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1994년 화제가 되었던 <쥬라기공원> 영화 한편으로 거둔 수익이 백만대 자동차 수출 실적과 맞먹는다는 대통령 자문기구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보고는 '산업으로서의 문화'라는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 낸다. 게임이 만화, 애니메이션 등과 함께 문화산업의 카테고리에 추가되면서 국가적 지원의 대상으로 주목받게 되는 것, 이전까지 '전자오락'이라는 천대받던 이름에서 벗어나 '게임'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다.

한편 이와 맞물려 대기업들의 콘솔 사업도 잘 풀려야 할 듯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우선 오랜 시간 존속해왔던 음성적 불법복제 시장의 그늘을 극복하지 못했다. 소위 보따리 장수들이 대만이나 홍콩 등지를 경유해서 들여온 복제품들은 가격이 저렴했고 손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자료에 따르면 1991년 한 해 동안 팔린 115만여대의 콘솔 중 절반이 넘는 60만대가 복제품이었고 삼성전자와 현대전자에서 내놓은 정품은 10~20만대 정도에 불과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불법복제 문제는 소프트웨어에서도 (아마도 더) 심각했다. 1987년 소프트웨어보호법이 시행되지만 그 이전부터 이어져온 관행은 이후로도 쉽게 근절되지 못했는데, 이 시기를 대표하는 업체로는 아마도 '재미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MSX 컴퓨터용 게임소프트웨어를 취급 - 이라고는 하지만 주로 해외의 게임을 무단복제/개조하여 유통 - 하던 회사였다. 사실 그러한 관행 자체는 당시에는 흔한 영업 행태였기 때문에 특이한 점은 아닌데, 이 회사가 악명이 높은 이유는 게임 시작화면에 표시되는 제조사의 이름과 로고를 '재미나'로 바꿔 다는, 소위 '로고 갈이' 행태 때문이다. 유명한 사례로는 <형제의 모험>이라는 게임이 있다(원제는 <슈퍼마리오>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대기업들의 콘솔 사업 운영방식이 문제였다. 기본적으로 콘솔 사업 모델은 저렴한 가격으로 하드웨어를 최대한 보급한 뒤 소프트웨어의 판매를 통해 그것을 보전하는 식인데, 이는 결국 시장에 출시된 제품 중 임계치의 유저수를 먼저 확보하는 기기가 시장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가지게 되는 콘솔 플랫폼 특유의 구조로 이어진다. 언뜻 '플랫폼'인 콘솔이 소프트웨어에 대해 우위를 가질 것 같지만, 임계치의 유저수는 해당 콘솔이 얼마나 많은 양질의 소프트웨어를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즉 아무리 저렴한 콘솔일지라도, 아무리 사양과 기능이 뛰어난 콘솔일지라도, 플레이할 게임이 없는 콘솔은 시장에서 퇴출된다는 것이다.

1990년을 전후로 시장에 콘솔이 쏟아졌던 상황을 상기해보면 그 어떤 기기도 임계치에 달하는 이용자수를 확보하기 어려웠을 것은 명백한 가운데, 혼란스러운 시장 상황 속에서 대기업들이 중점을 둔 것이 하드웨어 판매였다는 점이 문제였다. 삼성전자는 1989년 8비트 콘솔 겜보이를 출시한 후 이듬해에 바로 16비트 슈퍼겜보이를 출시했고 현대전자는 1989년 8비트 컴보이 출시 후 1992년에 16비트 슈퍼컴보이를 출시했다. 1994년에는 금성이 32비트 콘솔 3DO 얼라이브를 출시했고 그 이듬해에는 삼성에서 32비트 콘솔인 삼성 새턴을 출시했다. 한정적인 시장 규모에도 불구하고 각종 콘솔들을 연달아 출시하던 대기업들은 소프트웨어를 거의 수입으로 조달했다. 당시 영세한 규모의 개발사들이 자체 개발해서 내놓았던 게임 소프트웨어가 20여종에 달했던 반면 대기업이 자체 개발/출시한 게임이 1992년 삼성전자의 <우주거북선>이 유일했다는 사실을 보면 당시 대기업들이 소프트웨어 자체 개발에는 큰 관심이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자체 개발하는 것보다 수입하는 것이 비용적인 측면에서 (당장은) 유리하다는 점이 그러한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이는 콘솔 산업에 있어 핵심을 놓친 것이었다.

한편 이와 같은 상황은, 대기업들의 게임산업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대기업들의 관심이 게임 자체보다는 다른데 쏠려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차세대 기술로서 멀티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국내외적으로 높았던 가운데, 대기업들에게 있어 게임사업은 차세대 멀티미디어 산업으로 진출할 수 있는 일종의 교두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단순한 게임기이기 보다는 전문적인 멀티미디어 기기'이기를 표방했던 금성 3DO 얼라이브는 그러한 면을 잘 보여준다.

IMF…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사실 게임산업은 대기업들이 이전까지 운영해왔던 사업들과는 매우 성격이 다른 분야였기 때문에 진입 초기 혼란함이나 시행착오는 일종의 성장통이라 볼 수도 있겠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주요 개발사들을 모아 SgSg라는 서드파티를 구축하고 운영하는 등 차근차근 게임산업의 기반을 구축해 가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게임계 바깥에서 터지는데, 바로 IMF 사태다.

한국 사회 곳곳을 무너뜨렸던 IMF 사태는 게임업계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1997년 멀티그램, 네스토, 아프로만 등 주요 게임 유통사들의 도산을 시작으로 하이콤, ST엔터테인먼트, 만트라 등의 개발사들도 줄줄이 도산한다. 대형 유통사들이 도산하면서 어렵게 개발한 게임의 출시가 어려워졌고 이러한 상황은 출시된 지 얼마 안되는 신작들이 헐값에 잡지 부록으로 제공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몇 만원 하던 신작이 몇 달만에 몇 천원하는 잡지의 부록으로 제공되니 정품 구매 의욕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더해 PC통신이나 CD라이터 등이 보급되면서 게임을 무단으로 복제하고 공유하는 것 또한 너무나 쉬워졌다. 게임을 즐기는 사람은 늘어났지만 업계의 사정은 악화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이어졌다.

대기업들 또한 큰 타격을 입었다. 재계 서열 상위를 다투던 그룹들이 하나둘 부도가 나면서 남은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당장 수익이 나지 않는 부문은 빠르게 정리해야 했다. 그렇게 삼성, 현대, 대우, 금성 등 게임 산업에 진출했던 대기업들이 모두 철수했다.

이렇게 해서 1970년대 중반부터 이어져온 대기업들의 파란만장한 (콘솔)게임산업 진출기는 IMF 사태와 함께 마무리된다. 이 시기 대기업들의 게임사업 운영은 대체로 실망스럽다는 평가가 일반적인데, 대기업들의 참여와 함께 기대됐던 유통망의 개선이나 개발/투자를 통한 국산 게임의 발전 등에서 별 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대기업들이 게임 소프트웨어 수입에 치중하면서 정품 패키지 가격 인상을 조장하는 등 오히려 시장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비록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못한 채 IMF 사태를 맞는 암울한 엔딩을 맺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기가 한국 게임 역사에 있어 실패로 점철된 시기라고는 볼 수 없다. 본문에서 제대로 언급하지는 못했지만 게임을 즐기며 자란 세대가 직접 PC용 게임을 개발하면서 1세대 게임개발자군이 등장했고, 국가적으로 게임에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앞다퉈 게임 시장에 뛰어들었던, 전향적인 시대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용자 입장에선 전례없이 다양한 콘솔과 게임 소프트들을 (다분히 불법적이긴 했지만) 접할 수 있었던 (역설적인) 풍요의 시대이자, 그에 따라 이후 온라인게임 시대를 이끌어가게 되는 수많은 후속 세대가 양성된 다산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수입산 콘솔들이 쏟아지던 가운데서도 뚝심있게 재믹스 슈퍼V, 재믹스 터보 등 국산 콘솔 개발을 이어갔던 대우전자라든가 주요 개발사들을 모아 자체적으로 서드파티를 구축해서 플랫폼을 만들어보려 했던 삼성전자의 이야기는 이 시대가 지닌 서사의 방점이 '실패'가 아닌 '도전'에 찍혀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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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라

게임을 연구한다. 게임플레이는 어렸을 때부터 해왔지만 게임 연구를 접한 것은 대학원에 들어와 우연히 게임학 수업을 들으면서였다. 사회문화적 현상으로서의 게임, 그리고 그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다. 대표 저서로는 <게임의 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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