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골에서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전라북도 남원지역 민간인 학살 사건

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가재골에서

산속 조개껍데기에서 바다를 읽는다

바다가 산이 되고 산이 바다가 되는

대륙이 이동해 수심이 뒤집힌 반전이 있었다

지리산 젖가슴 한쪽을 갈아 죄 없이 살아온 동포

낫 놓고 기역자 따윈 몰라도 좋은

다복솔 봄날 나물 캐는 아낙이나

수정봉 삭정이에 피리 부는 착한 남정네

봄부터 겨울까지 고라니, 너구리, 오소리, 멧돼지

굴참나무 숲에서 경계 없이 살았는데

탕탕탕 수목, 중생도 숨을 죽이고

두개골을 관통한 탄환

희미한 탄흔이 기억하는 스무 살의 청춘은

사격의 명령 앞에 잠깐 삶을 망설였고

자유 조국의 지침서에서 살라

그런 불쌍한 명령에 우수수 생목숨이 떨어졌다

혼돈의 시대 이데올로기에 갇힌 산중의 전장터

그대는 늘 자유를 외치지만

난파한 해독되지 않는 이념의 생존 전쟁에서

가재골에서 고리봉까지

이데올로기 마약에 걸린 청춘,

만복대 능선에 뜬 새벽달처럼 깃발을 펄럭인다

이념은 바래고

*“그러나 사랑이여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 바치리“

세월이 흘러 이승과 저승이 함께 피리를 분다

물봉숭아 붉은 흙 뿌리에서

해방의 푸른 뼈 하나 건져 올린다

금기된 70년 만에 건져 올린 반전

목이 찢어져라 부른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헝가리 시인 푀퇴피의 시 중에서

▲ 가재골학살 위령비. ⓒ정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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