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아직도 "계단 오를 때 가방으로 뒤 가려라"가 성폭력 예방 요령?

문제 포스터 제작·배포했던 서울경찰청, "그게 아직도 남아있냐" 반문

"계단을 오를 때 핸드백이나 가방으로 뒤를 가린다."

성폭력 예방을 위해 피해자가 조심해야 한다는 취지의 시대착오적 홍보물이 여전히 지하철 안에 부착돼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여성계는 피해자의 주의를 요하는 성폭력 예방 지침은 성폭력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이른바 '강간통념'에 따른 것이므로 시정해야 한다고 지적해왔다. 그러나 이같은 지침이 담긴 홍보물이 하루 이용객 500만 명에 육박하는 지하철에 십수년 째 버젓이 부착돼있다는 점에서 해당 홍보물을 제작·배포한 경찰의 관리 소홀 문제가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10일 <프레시안> 취재를 종합하면, 현재 수도권 지하철 1호선을 포함한 일부 지하철 객차 내에 '성폭력 예방 요령' 포스터가 붙어있다. 이 포스터는 과거 서울지방경찰청이 지하철 역사와 객차 내부에서 발생하는 범죄들을 예방하기 위해 지난 2010년경 제작·배포한 것이다.

홍보물에는 △신체 접촉 시 즉각 불쾌감을 표시한다, △적극적인 신고 의지를 나타낸다, △큰 소리로 주위의 도움을 요청한다, △의심스러울 때는 옆으로 몸 자세를 바꾼다, △계단을 오를 때 핸드백이나 가방으로 뒤를 가린다 등 성폭력을 대처하기 위한 5가지 방침이 담겨 있다.

▲서울 1호선 지하철 내부에 부착된 성폭력 예방 요령 포스터. ⓒ프레시안(박상혁)
ⓒ프레시안(박상혁)

이 홍보물은 피해자 또는 피해를 당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행동 요령을 제공할 뿐, 가해자에게 성폭력을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를 주거나 처벌 가능성 언급하는 내용은 없다. 결국 피해를 당할 수 있는 사람을 향해서만 '의심스러울 때는 옆으로 몸 자세를 바꾼다'나 '계단을 오를 때 핸드백이나 가방으로 뒤를 가린다' 등 방안을 통해 선제적으로 조치할 것을 강조한 셈이다.

이런 내용을 담은 성범죄 예방 요령은 2010년대 중반까지 경찰 등 정부기관에서 포스터 형식으로 다량 배포됐다. 2015년 여성가족부가 서울지방경찰청, 서울메트로와 함께 제작·배포한 지하철 성추행 예방 포스터 내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해당 포스터에는 성추행의 심각성과 처벌 근거, 피해자와 주변 사람들의 대처법과 함께 가방으로 뒤를 가린 여성을 그리고 '몰래카메라 예방을 위해 계단 등 이용 시 주의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2018년 경기도 성남시 판교역에서 열린 '불법촬영범죄 근절 및 빨간원 캠페인 확산을 위한 업무협약식 및 캠페인 참여기업 1호점 인증행사'에서 경찰관이 스크린도어에 홍보 포스터를 붙이고 있다.ⓒ연합뉴스

여성단체 및 성폭력 지원단체 등은 오래 전부터 이같은 행동 요령이 시민들에게 '성범죄 예방의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는다고 지적해왔다. 정부 기관들은 이러한 지적을 받아들여 최근에는 '경찰이 항상 가해자들을 지켜보고 있다'거나 '성폭력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등 가해자에게 성범죄의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내용을 바꿨다. 그럼에도 여전히 피해자의 주의를 요하는 홍보물이 대중교통에 부착돼 시민들에게 왜곡된 정보를 전달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희연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는 이날 <프레시안>과 한 통화에서 "여전히 이런 문구가 붙어 있다니 (황당하다)"라며 "'피해자가 스스로 조심하라'는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그대로 반영한 문구"라고 지적했다.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처 조사관도 "피해자에게 스스로 성폭력을 예방하라는 조언은 오래 전 방식"이라고 꼬집었다.

서울경찰청 측은 지하철 내부에 문제의 홍보물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프레시안>에 "10여 년 전 지하철 내부에 해당 포스터를 부착했었다"며 "(내용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내부에서 논의를 한 뒤 최근에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포스터가 아직도 있느냐"고 반문했다.

해당 홍보물이 여전히 부착돼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과거 포스터 제거 작업을 했었고, 오래된 전동차들을 바꾸면서 자연히 없어질 줄 알았다"며 "우리가 (지하철 내 포스터를) 제거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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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혁

프레시안 박상혁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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