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팔아넘겨 '병원균'된 유대인? 고리대금업이 미움을 더했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75]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③

영국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유산을 꼽을 때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와 <베니스의 상인>, <햄릿>, <리어왕>, <맥베스> 등 그의 문학 작품들이 빠지지 않는다. 오죽하면 19세기 영국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1795-1881)이 그의 <영웅숭배론>에서 "셰익스피어는 인도하고도 안 바꾸겠다"라고 했을까 싶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지 않았어도, 또는 칼라일이란 역사가 이름을 몰라도,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는 것은 누구라도 한번쯤 들어본 말일 듯하다.

몇 해 전에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마을에 들를 기회가 있었다. 영국에서 런던 다음으로 큰 도시인 버밍엄 남쪽에 자리 잡은 스트랫퍼드-어폰-에이본(Stratford-upon-Avon)이다. 이름이 길기에 현지 사람들은 그냥 '스트랫퍼드'라 일컫는다. 영국에는 스트랫퍼드란 이름을 지닌 곳들이 여럿이다. 2012년 하계 올림픽이 열렸던 곳도 런던 스트랫퍼드다.

16세기 중반 스트랫퍼드 마을에서 중산층의 아들로 태어난 셰익스피어는 20대 초반 결혼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태어난 집도 그대로 있다. 인구 3만쯤의 이 작은 도시를 먹여 살리는 인물이 400년 전에 죽은 셰익스피어다. 그의 어린 시절 흔적을 보려고 해마다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런던에서 차로 2시간 반쯤 걸리는 스트랫퍼드를 하루 투어 일정으로 오고간다.

▲ 1944년 5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막 도착한 유대인들이 선별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나치는 유대인들을 실어오면서 퇴거 비용과 열차 운임을 물리기도 했다. ⓒ위키미디어

악역을 유대인에게 떠맡긴 셰익스피어

방문객들은 맨 먼저 셰익스피어 생가를 둘러본다. 그 다음 바로 가까이에 있는 셰익스피어 기념관에 가서 이런저런 빛바랜 관련 자료들을 살펴본다. 그리곤 가게에서 셰익스피어란 글자가 새겨진 공책이나 커피 잔 등을 사들고 돌아간다. 그곳 기념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는 40대 초반의 여성을 만나 궁금해 하던 점을 하나 물어봤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을 보면, 돈을 빌려가고 못 갚을 경우 1파운드 살을 뜯어내겠다는 악덕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나오는데요, 셰익스피어도 유대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나 보죠? 그런 악역에 유대인을 떠맡겼으니 말이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느닷없는 질문을 받았기 때문일까, 큐레이터는 뜸을 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오래 전부터 저도 가끔 생각해오던 흥미로운 물음인데요, 뭐라 답을 하기가 어렵네요." 그가 대답을 망설이는 모습이 이해가 됐다. 영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문호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걸쳐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많은 백인들처럼 유대인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는 말을 솔직히 털어놓긴 어려운 노릇이다. 자칫하면 그를 '반유대주의자'(anti-semitist)로 낙인찍히도록 해선 더더욱 안 될 일이다.

유대인 하면 대부업 떠올리는 유럽인들

무덤 속의 셰익스피어로선 할 말이 없지 않을 것이다. "내가 <베니스의 상인>을 쓰던 16세기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대부업이나, 물건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전당포 같은 일을 유대인들이 많이 했다"고 말이다. 실제로 그랬다. 유럽 백인사회에서 이방인 집단인 유대인들을 '게토'(ghetto) 안에 머물도록 주거지역을 제한하거나, 직업의 자유도 부분적으로 막았다. 하지만 담보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대부업만큼은 막지 않았다.

영국 저널리스트이자 역사저술가인 폴 존슨은 유대인의 역사에 관한 두꺼운 책을 냈다(A History of the Jews, 1987). '철의 여인'이란 별명을 얻었던 1980년대 영국 총리 마가렛 대처의 정치적 조언자로 활동한 그의 이력이 말하듯, 폴 존슨은 보수 성향을 지닌 가톨릭신자다. 유럽에서 유대인 하면 대부업을 떠올리게 된 배경을 존슨은 이렇게 적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 구절을 바탕으로 이자를 죄악시 여겼으며, 1179년부터 이자를 받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파문했다. 기독교 세계의 법률은 실제로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차별했다. 그래서 유대인은 대금업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유대인을 거론할 때마다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직업인 대금업을 떠올렸다. 15세기 후반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알았던 요세프 콜론(유대인 랍비)에 따르면,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사는 유대인들이 '대금업' 이외에 그 어떤 다른 직업을 거의 가질 수 없었다고 한다](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포이에마, 2014, 300쪽).

위에 옮긴 글에서 '유대인들이 대금업 외에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는 유대인 랍비의 주장은 실제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대금업이란 현금이 많아야 되는데, 유대인들이 모두 부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가난한 유대인들은 거리의 행상이나 날품팔이, 농장이나 소규모 수공업체에서 저임금 노동을 했을 것이다. '유대인은 대금업 이외의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는 주장은 '어쩔 수 없이 고리대금업을 했다'는 변명으로 들린다.

'유대인 티'를 낸 고리대금업

이스마 엘보겐은 1938년 미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유대교리 및 유대역사를 강의했던 유대인 학자다. 엘레오노레 슈텔링은 미국에서 태어난 유대인 역사학자다. 엘보겐이 오래 전에 쓴 것을 슈텔링이 수정·보완해 펴낸 책(원서명은 Die Geschichte der Juden in Deutschland, 1996)에도 유대인이 오래 전부터 고리대금업을 해왔고 그 때문에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12세기 기록들은 처음으로 '유대인의 고리대금업'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중세 수도원장, 십자군 전도사로 활약했던) 베른하르트 폰 클레르보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들이 없는 곳은 어디에서든 기독교도들이 유대인들보다 더 냉혹하게 굴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 또한 'judaicare'(유대인의 장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유대인들의 고리대금업을 비난했다. 이렇듯 금전거래와 관련된 불길한 이미지는 수세기 동안 유대인에게 붙어 다녔다](이스마 엘보겐/엘레오노레 슈텔링, <유대인의 역사: 로마제국에서 20세기 홀로코스트까지>, 새물결, 2007, 49쪽).

위의 두 유대인 역사학자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중세 시절에 유대인들의 생업활동에서 유별나게 '유대인 티'가 났던 것은 고리대금업 빼고는 없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옛날 유럽의 유대인들은 행상을 비롯한 중소상인으로, 또는 주물공장에서의 기술자, 농장과 포도원에서의 노동 등으로 먹고 살았다.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는 의사나 학자로, 또 다른 일부는 곳곳에 퍼져 있는 유대인공동체 인맥을 바탕으로 동방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다(이 때문에 베니스의 상인을 비롯한 현지 백인 경쟁자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었다). 결국 초점은 유럽 백인사회에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이미지(유대인=예수를 팔아넘겨 죽게 한 사악한 이교도)를 일부 유대인들의 고리대금업이 더 악화시켰다는 데 모아진다.

셰익스피어가 21세기 개정판 낸다면...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의 딸 제시카는 악착같은 배금(拜金)주의자인 아버지를 부끄러워하고 그와 같이 사는 집을 '지옥'(hell)이라 한탄한다. 기독교를 믿는 청년 로렌조와 사랑에 빠진 제시카는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려 한다. 급기야 제시카는 아버지가 집을 비운 틈을 타 아버지의 돈과 보석(금)을 훔쳐 로렌조에게로 달아난다. 충격을 받은 샤일록은 "아이고 내 딸, 내 돈, 내 보석"하며 큰 소리로 울부짖는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거나 그에 바탕한 연극을 보는 유럽인들은 야릇한 쾌감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400년 전에 죽은 셰익스피어가 무덤에서 나와 그의 <베니스의 상인>을 21세기의 분위기에 맞춰 개정판을 낸다면 어떨까. 악덕 고리대금업자 '샤일록' 역에 유대인을 그대로 배치할까? 엄청 망설일 것이 틀림없다. 무엇 때문에? 옛날에 견주어 압도적으로 영향력이 커진 유대인 집단으로부터 '반유대주의자'로 몰려 손가락질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지금은 유대인 파워가 강해져 함부로 유대인을 비판하기 어렵다. 미국 사회에서 대학교 교수나 정치인, 또는 언론사의 논설위원이 반이스라엘 발언 또는 비난 글을 썼다간 '반유대주의자'로 낙인찍히기 마련이다. 대학이나 언론사에서 쫓겨나고 정치인은 선거에서 낙선운동의 표적이 된다. 이미 여러 희생자들이 나왔다.

지난해 10월부터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마구 벌이는 전쟁범죄 행위를 미 주요 언론사들이 따끔하게 지적하지 못하는 것도 다 그런 사정에서다(유대인 파워가 미국을 어떻게 휘어잡고 있는지는 따로 살펴볼 예정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유럽에선 지난 2천년 동안 반유대주의가 대세를 이뤘다. 아돌프 히틀러가 '끝판왕'인 셈이다.

▲ 161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유대인 게토에서 일어났던 유혈사태를 그린 삽화. 유럽인의 반유대인 정서는 때때로 대규모 폭력과 학살을 낳았다. ⓒ위키미디어

"이방인에겐 이자 받아도 된다"

오래 전부터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이자를 받는 것을 죄악시했다. <출애굽기> 22장 25절에는 이자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너희가 너희 가운데서 가난하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꾸어주었으면 너희는 그에게 빚쟁이처럼 재촉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받아도 안 된다." <레위기> 25장 36절도 이자를 금지한다. "그에게서는 이자를 받아도 안 되고, 어떤 이익을 남기려고 해서도 안 된다."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한 것은 가난한 유대인들을 도와주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유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종교지도자들의 뜻이 담겼다.

같은 유대인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는 율법은 엄격했다. 이자 대신에 선물이나 다른 그 무엇을 주는 것을 유대인들은 '이자의 먼지'라 일컬었다. 유대인 공동체의 선지자들은 탈무드를 통해 '이자의 먼지'마저도 금지했다. 이자를 받는 것을 숨기는 것도 죄이고, 이를 알고도 그냥 모른 체 하는 것도 죄라고 했다. 어긴 자들은 지옥에 갈 것이라는 비난을 받았다(그러나 현실적으로 엄격하게 지켜지지 못했다).

구약성서의 첫 다섯 편(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은 유대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토라'의 구성 요소다. 그런데 <신명기>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겐 이자를 받아도 된다고 했다. "다른 나라 사람에게는 돈을 꾸어 주고 이자를 받아도 좋다. 그러나 친족에게서는 이자를 받지 못한다"(23장 20절). 유대인들끼리는 이자를 받는 일을 막으면서도, 나와 다른 민족에게는 이자를 허용하는 이중적인 율법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에게 이자를 받을 의무가 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기도 했다. 문제는 돈을 빌리는 쪽에서 터무니없는 고리(高利)라 여겨질 때다.

유대인을 보는 유럽인들의 눈길

지난 2000년 동안 유대인들이 유럽 땅에서 멸시를 받았던 까닭엔 고리대금업자라는 더러운 이미지와 더불어 유럽이 기독교 문명권이란 점도 크게 작용했다. 삼위일체 하느님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로 여기는 기독교인들로서는 예수를 부정하고 로마군에 넘겨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든 유대인들을 좋게 보기 어려웠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기독교 신학의 거두이자 성인으로 추앙받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유대인에 대해 여러 비판적 기록을 남겼다. 그의 시각에서는 '몇 닢의 은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가리옷 사람 유다)이야말로 유대인의 상징'이다. 따라서 유대인은 영원토록 예수를 죽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생각은 다르다. 유다가 유대인인 것은 틀림없지만, 유대민족을 대표하는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가 중동 현지 취재를 갈 때 자주 머물렀던 예루살렘의 유대인 민박집 주인 부부는 프랑스에서 건너온 이민자다. 그들은 매우 독실한 유대교도다. 유대교 예배일은 일요일이 아니라 토요일이다. '사바트'(Sabbat)라 부르는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 밤(정확히는 해가 진 뒤) 시너고그에 가서 밤새도록 예배를 드리곤 했다.

이들 유대인 부부의 주장에 따르면, 유대인이 미움을 받는 이유는 예수를 배신한 유다 탓이 아니다. 유대민족이 유일신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타민족들의 질시와 박해를 받아왔다고 여긴다. 이들 부부는 함께하는 아침 식사 때마다 유대민족이 어떻게 고난의 역사를 헤쳐 왔는가를 길게 들려주곤 했다. "인터뷰 약속이 있어 지금 서둘러 나가야 한다"며 손목시계를 쳐다보는데도 하고 싶은 말을 잇곤 했다.

위 부부의 주장처럼, 여러 기독교 교리학자들도 미운 털이 유대인에게 박힌 가장 큰 이유는 (배신자 유다가 1차적 원인 제공자이긴 했지만, 보다 더 중요한 이유로는) 예수의 기적을 보고도 그를 인정하길 거부했고, 그 후손들도 기독교로의 개종을 거부해온 데 있다고 본다. 영국 역사저술가 폴 존슨의 글을 보자.

[(중세)기독교 변증가들은 그리스도를 죽인 선조들의 죄 때문에 유대인들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논점은 이러했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은 예수가 행한 기적을 목격하고 그가 한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고도 그가 그리스도인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가난하고 비천한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그 시대 유대인의 죄였다. 그리고 후세대 모든 유대인은 자기 선조들처럼 똑같이 완고한 태도를 고수했다](폴 존슨, 354쪽).

유대인에게 대재앙이 된 십자군운동

유대인에게 따르는 부정적인 이미지(△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질 않고 팔아넘긴 이력이 있는데도 △그 죄를 뉘우치지 않고 기독교로의 개종을 거부하면서 △고리대금업으로 물욕에 사로잡힌 유대인이라는 이미지)는 유럽 백인사회의 유대인 차별과 멸시를 합리화시켜줬다. 안 그래도 비호감인 유대인을 더 미워할 구실을 찾는데 고리대금업만큼 딱 들어맞는 흠결은 없을 듯하다.

유대인을 바라보는 유럽 기독교인들의 싸늘한 눈길은 유럽이 격동기를 맞을 때마다 피를 불렀다. 11세기에서 13세기에 걸친 십자군운동은 유대인에겐 흑역사로 기록된다. 십자군이 소집될 때마다 유대인의 피가 뿌려졌다. 십자군 무리들 사이에선 "유대인을 죽인 자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채권자를 없앤다면 빚도 없어지는 셈이니 큰 유혹을 느꼈을 법하다.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앞서, 유럽의 유대인 주거지를 습격해 피바람을 일으켰다. 시너고그에선 금은으로 만든 쟁반과 촛대 등을 약탈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노잣돈으로 챙겼다.

[보아라. 우리는 무덤을 찾아가서 이스마엘의 후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난다. 보아라. 여기 우리 가운데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 그들의 조상이 예수님을 이유 없이 죽였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이들에게 복수하고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더 이상 입에 오르지 않도록 그들의 씨를 말려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려면, 우리 편이 되든지 우리와 같은 신앙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이스마 엘보겐/엘레오노레 슈텔링, 42쪽).

위에 옮긴 글은 십자군 무리들이 내걸었던 격문(檄文) 가운데 하나다. 1095년부터 산발적으로 벌어졌던 십자군 원정이 시들해가던 시점인 1199년과 1213년 교황 이노센트 3세는 기독교도들에게 다시 한 번 십자군에 동참하라고 외치면서, 한편으로 유대인들을 향해 "십자군 원정대원들이 갚아야 할 이자가 있다면 받지 말라"고 명령했다. 여기서 짚어볼 점 하나. 대금업을 크게 하는 유대인 뒤에는 그 지역의 세력가(국왕, 봉건 영주, 귀족)들이 있었다. 능력을 인정받은 유대인은 왕실(또는 성주)의 재정 관리인이나 세금 징수원이 됐다. 영국 폴 존슨의 글을 다시 보자.

[이론상으로 그리고 실제로도 왕은 광범위한 유대인 공동체에서 생기는 막대한 이윤의 수혜자였다. 12세기에 영국 앙주(Anjou) 왕가의 왕들이 부유한 유대인 대금업자들 덕분에 풍요로운 삶을 영위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대인 특별 재무성은 각 도시에서 유대인 공동체와 함께 금고를 운영했다](폴 존슨, 364쪽).

유대인과 유착한 지배계급이 실속을 챙겼지만 욕은 유대인이 얻어먹었다는 사실은 '독일 반유대주의 연구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볼프강 벤츠(베를린공대, 반유대주의연구소장)의 연구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한국에도 번역본으로 소개된 <홀로코스트>(Der Holocaust, 2001)의 저자인 벤츠 교수는 그의 책(Bilder vom Judem, 2001)에서 이렇게 썼다.

[유대인은 기독교에 기초해 만들어진 신분 질서와 길드(Guild 중세 상인 또는 장인의 조합)로 말미암아 생산과 상업(농촌 소매업은 제외)에서 배제되었으므로 (기독교인들에게 고리대금업이라고 금지된) 대금업에만 종사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독점하게 된 전당포는 막대한 뇌물을 제공하는 대가로 왕과 제후의 보호를 받았다. 이런 상황임에도 오로지 유대인 대금업자만이 채무자들로부터 원성을 샀으며 정작 이런 금융제도를 통해 이득을 보는 왕과 제후는 온전했다](볼프강 벤츠, <유대인 이미지의 역사>, 푸른역사, 2005, 34쪽).

이런 글을 읽다보면, '유대인을 위한 변명'같이 느껴지기도 한다(물론 벤츠 교수에겐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믿고 싶다). 자선사업이 아닌 이상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주고 약간의 이자를 받을 수는 있다. 문제는 고리대금이라는 것이다. 지배계급에게 뇌물과 세금을 내는 비용보다 더 뜯어내야겠다고 작정한다면,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반유대인 정서가 악화될지 모른다는 걱정은 아예 처음부터 접어둔 것이나 다름없다.

▲ 중세 유럽사회는 지배계층(왕, 영주, 귀족)과 결탁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의 횡포로 논란을 빚었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중세 도시 전경. ⓒ김재명

루터, "고리대금업자는 무시무시한 괴물"

14세기 유럽 땅을 휩쓴 흑사병(페스트)은 유럽의 인구 가운데 1/4에서 1/2 가량의 목숨을 앗아간 대재앙으로 기록된다(적어도 7,500만 명, 많게는 2억 명 사망). 페스트는 유대인에게 악몽으로 다가왔다. 유럽의 반유대주의적 정서는 유대인이 이 재앙을 일으켰다는 쪽으로 몰아갔다. 유대인이 우물이나 샘에 독을 풀어 '만들어낸 페스트'(pestis manufacta)란 소문이 널리 퍼져갔고, 고문에 못 이긴 유대인들은 '내가 그랬노라'며 허위자백을 했다.

그 참에 고리대금업으로 미운털이 박혀 있던 유대인들이 덩달아 붙잡혀 죽었다. 자료에 따르면,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전역에서 3백 개 이상의 유대 공동체가 이로 말미암아 파괴됐다. 독일 마인츠에서 6,000명, 스트라스부르크에서 2,000명이 희생됐다(폴 존슨, 372쪽).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 바람은 유대인들에게 또 다른 희생을 강요했다. 루터는 처음엔 유대인들이 개종과 더불어 자신의 종교개혁에 동참해줄 것을 바랐다고 한다. 1523년 <유대인으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란 소책자를 내면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루터의 성경 이해가 탈무드(유대교 율법모음집)보다 못하다"는 둥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다. 루터는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그의 유대인 비판은 고리대금업에 집중됐다. 유대인의 재산은 터무니 없는 높은 이자로 독일인의 재산을 강탈한 것이니 유대인의 재산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유대인)고리대금업자는 도둑과 살인자로서 악에 깊이 물든 자다. 타인의 자양분을 먹어치우고, 타인을 망쳐놓고 재산을 훔치는 자는 누구든지 살인에 준하는 죄를 짓는 것이다. 고리대금업자는 늑대 인간처럼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얼마나 더 많은 고리대금업자를 추적하고 저주하고 참수해야 하는가](폴 존슨, 419쪽에서 재인용).

1543년 루터가 '유대인과 이들의 거짓에 관하여'란 제목으로 했던 설교도 위와 비슷한 내용을 담았다. 루터는 사람들로 하여금 직접 행동에 나서도록 촉구했다. 이미 1537년 작센 지방에서는 유대인들이 살던 곳을 떠나야 했고, 1540년대에는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과 시너고그를 겨냥한 약탈·살육과 추방이 이뤄졌다. 베를린 유대인들은 쫓겨날 때 퇴거비용마저 물어내야 했다(400년 뒤 나치도 퇴거비용과 수송열차 운임을 유대인들에게 받아냈다).

독일지역에서 쫓겨난 이들은 그나마 유대인에게 상대적으로 포용적이라 알려진 폴란드 쪽으로 많이들 옮겨갔다. 하지만 그곳 폴란드에서도 현지인들의 폭동이 잊을 만하면 일어났다. 러시아에서도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많은 유대인들이 죽었다. 오죽하면 학살과 박해를 뜻하는 '포그롬'(pogrom)이란 단어가 생겨났을까(이에 대해선 다시 살펴볼 예정이다).

글이 길어져 여기서 마무리해야겠다. 우리는 지금껏 유대인이 고리대금업으로 유럽 백인들의 원성을 샀고, '예수를 팔아넘겼다'는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유대인 이미지를 더 악화시켰다는 점을 여러 기록에서 살펴봤다. 아돌프 히틀러가 유대인을 가리켜 '병원균'이니 뭐니 했던 것은 인종차별적인 아주 못된 발언이다. 하지만 유럽 사회를 오랫동안 휘감았던 반유대인 정서에 비춰 뜬금없는 돌출발언은 아니었다.

문제는 나치 히틀러 정권이 그런 반유대인 정서를 악용해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Endlösung)에 나섰고 많은 생목숨을 앗아갔다는 점이다. 나치가 저질렀던 인류사 최악의 전쟁범죄인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유대인들이 모두 고리대금업자의 후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많은 유럽인들(특히 독일·폴란드·우크라이나인들, 파시즘 아래에 있던 스페인·이탈리아인, 독일군 점령정책에 협력했던 프랑스인)들이 큰 망설임 없이 유대인 탄압에 함께 나섰던 데엔 '유대인=고리대금업자'를 비롯한 해묵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한몫 했다고 보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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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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