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6년째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년입니다"

[6411 투명일기] ⑩ 김아롱

경희대학교와 노회찬재단은 2023년 1학기부터 200여 명의 학생이 듣는 교양강좌 '후마니타스 특강 : 6411의 목소리와 노동존중 사회'를 협력 운영하고 있습니다. 수업은 노회찬재단이 <한겨레신문>과 공동으로 진행 중인 연재 칼럼 '6411의 목소리' 필자를 매주 한 명씩 모셔 한 학기 동안 특강으로 운영합니다. '존재하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6411 당사자들이 청년들에게 전해주는 자신의 삶과 노동 이야기를 <프레시안> 지면으로 중계합니다.

열번째는 '가족 돌봄 청년' 김아롱 씨의 이야기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사지마비 중증 장애인 진단을 받은 어머니를 돌보며 살아온 그는 고통스럽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돌봄 경험 때문에 더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며 돌봄 노동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육아 돌봄에서 장애인, 노인 돌봄에 이르기까지 돌봄은 우리 삶을 떠받치는 가장 큰 기반이라며 돌봄 노동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도 강조했습니다.

'아픈 엄마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를 주제로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아픈 엄마를 돌보면서 공부를 하기도 했고, 또 일을 하기도 했거든요. 아침에 일어나서 보통 어떤 일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요즘 대부분 일어나서 카톡을 보고 그러실 텐데, 저는 일어나자마자 옆에서 주무시는 잠에서 깬 엄마를 케어하는 일상을 지내요. 강연하고, 집에 가면 또 엄마를 케어하는 일상을 16년째 보내고 있습니다.

글쓰기 플랫폼에 제 돌봄 경험에 대해, 또 돌봄의 어두운 측면에 대해 글을 쓰기도 했고, 기자분들을 만나 제 돌봄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했어요. 또 저는 장애인 복지를 공부하는 박사 과정 학생인데요. 제 돌봄 경험을 토대로 석사 졸업 논문을 썼고, 저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도 담았습니다.

먼저 이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아침 9시 전공 필수 수업에 매번 지각하는 학생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마 어떤 분들은 무관심했을 테고, 어떤 분들은 '왜 맨날 늦지? 사정이 있나' 아니면 '게으른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나는 수업에 열심히 참여했고 시험도 열심히 봤어. 그래서 난 A학점을 받고 싶은데, 저 친구는 아마 나보다 점수가 낮을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 같아요.

예상하셨겠지만 매번 지각하는 학우는 저고요. 저는 지금도 매주 금요일 9시 전공 필수 수업에 매번 지각을 합니다. 어머니를 돌봐주시는 분과 교대하다 보면 지각을 하게 돼요. 이 이야기는 마지막에 다시 한번 드리겠습니다.

▲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에서 의료 관계자가 휠체어에 탄 환자와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지가 마비된 엄마를 돌보며 간호사를 꿈꿨지만…

어머니를 돌보게 된 이야기를 드리려면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야 될 것 같아요. 고등학교 1학년 9월이었어요. 야자(야간 자율학습)를 하고 있었는데 전화가 왔어요. '아롱아, 너네 엄마가 지금 사고나서 응급실에 있어. 빨리 와야 될 것 같아' 야자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달려갔죠. 어머니가 경추 3, 4번이 골절됐고, 중추신경이 손상됐다는 거예요. 그러면 감각을 느끼지도 못하게 되고 운동신경도 다 기능을 못하게 되거든요. 어머니는 그날 사지마비 중증 장애인 진단을 받으셨어요.

'사지마비'라는 단어 자체도 사실 무시무시하잖아요. 그 안에 정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스스로 물 한모금조차 마실 수 없고요. 불편해서 뒤척거리거나 가고 싶은 곳으로 이동할 수도 없어요. 남에게 도움 받지 않으면 가장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또 한편으로는요. 의존해야 하는 타인 혹은 보호자, 가족들의 아픔과 어려움도 그 말 안에 담겨있는 것 같아요.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3년 동안 어머니는 계속 병원에서 재활을 하셨어요. 어머니가 재활병원에 계셨기 때문에 저는 평일에는 감사하게도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할 수 있었죠. 그리고 주말에는 재활병원에 가서 엄마를 간병했어요. 방학 때도 내내 병원에 있었어요. 엄마를 케어하면서 공부도 했죠. 밤에 병실에 불이 다 꺼지면 침대등을 켜서 공부하던 기억이 나네요.

고등학생 때 주로 병원에서 지내면서 참 감사한 분들을 많이 만났는데요. 그중에도 간호사 선생님들이 정말 저에게 잘해줬어요. 제가 굉장히 어린 보호자였고, 엄마도 그랬기 때문에 간호사 선생님들이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좀 더 따뜻하게 해주고, 좀 더 손길을 주셨어요. 그때 다짐했어요. '내가 받은 도움을 사람들한테 갚는 사람이 되고싶다', '간호사 선생님들처럼 정말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그런 힘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다' 간호사 선생님한테 간호사가 되려면 간호학과를 졸업해야 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간호학과에 가기 위해 정말 필사적으로 공부했어요. 고등학교 3년 내내, 평일에는 공부에 집중하고, 주말에는 엄마를 간병하는 쳇바퀴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간호학과 합격 통지서를 받았어요.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평범한 대학 생활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강의를 듣고 간호학과 실습도 하고, 축제를 즐기기도 하고, 벚꽃놀이도 즐겼어요.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어머니를 재활병원에서 집으로 모신 뒤에 국가에서 장애인 활동지원사, 그러니까 돌보미 선생님을 파견해줬기 때문이에요. 그 선생님의 도움으로 제가 대학생활을 재미있고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거죠.

대학교 4학년이 되고 취업을 준비하면서 큰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간호학과 친구들이 큰 병원에 취직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저도 그 길을 걸을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현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임상 간호사는 3교대 업무를 하잖아요. 그런데 밤에 저희 어머니를 돌봐줄 분이 없는거예요. 대학에 다닐 때도 활동지원사 선생님이 가정주부라 밤에는 어머니를 돌봐주실 수가 없어 제가 돌봤거든요. 다른 친구들이 토익 점수, 어느 병원에 갈지를 고민할 때 저는 '내가 밤에 근무하는 간호사를 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또 간호사는 육체적로도 정신적으로도 고된 직업이잖아요. '그런 직업을 엄마를 돌보면서 병행할 수 있을까' 생각했을 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꿈을 접었죠.

임상 간호사로 일할 수는 없었지만, 감사하게도 파트타임 연구 간호사로 사회에 첫발을 디딜 수 있었어요.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입원하는 일이 생긴다든가 하면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울 수 있기도 했고, 시간을 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어요. 그런 장점 때문에 꽤 오래 했어요.

동시에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했잖아요. 그러면서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저희 어머니처럼 휠체어와 전동침대가 필요하신 분들, 사회에서 소외되고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분들에게 자연스럽게 눈길이 가더라고요. 제가 그랬기 때문이겠죠. 다시 한번 소망을 가지게 됐어요. 주민센터나 복지관에 가면 사회복지사분들이 어려운 분들을 많이 도와주시거든요. 집에서 고립돼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분들을 나오게끔 도와주시기도 하고요. 그런 역할을 하시는 분들이 또 멋져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공부를 좀 더 해보기로 했어요. 그렇게 저는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기로 했습니다.

주변에서는 이런 저에게 '기특하다', '잘 컸다', '열심히 사는 것 같다' 는 칭찬을 많이 했어요. 특히 어른이나 친척들에게서 '진짜 효녀다 효녀야, 너무 착해' 이런 말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그런 말을 들으면서 처음에는 '나 열심히 살고 있구나' 생각도 했고, 뿌듯한 기쁨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런 생활이 10년이 지나니 지치더라고요. 사람이 계속 그렇게 열심히 살 수는 없더라고요. 그러면서 말들이 무거움과 압박,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이유는 10년 동안 저는 늘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과 갈등을 해야만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 돌봄에 집중하자니 공부가 소홀해지고, 공부에 몰입하자니 어머니 돌봄이 소홀해지는, 엄마와 공부,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정말 힘들었어요. 사실 그 문제는 16년째 풀리지 않는 숙제고, 계속 배워가는 과정에 있어요.

오래 누워계시다보니 어머니가 자주 아프시기도 하더라고요. 어머니가 언제 입원하실지 모르는데 입원을 하게 되면 보통 일주일은 입원을 하거든요. 그동안 제가 병원에 1인 보호자로 상주해야 되기 때문에 제 일은 스톱이에요.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날까? 그런 불안감과 우울감, 압박감을 계속 느껴야만 했습니다.

'가족 돌봄 청년',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다

그러다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청년 이야기가 재작년에 뉴스에서 들리기 시작했어요. '강도영 사건'이라고 들어보신 분도 있을거예요. 22세 청년의 비극적인 '간병 살인'이라고 보도된 사건이죠. 22세 청년의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졌고, 병원에 입원하면 굉장히 많은 돈이 들 거잖아요. 병원비를 낼 수가 없어서 이 청년이 아버지를 모시고 집에 왔죠. 그런데 정말 쌀 한 톨 사먹을 수 없을 정도로 돈이 없는 거예요. 병원비를 다 내고 나니 아무것도 없었던 거죠. 아버지께서 어느날 그 친구에게 이야기하셨대요. '아들아 너무 미안하다. 너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면서 살아라. 내가 부를 때까지 이 방에 들어오지마. 내가 부를게.' 강도영이라는 분은 결국 아버지를 방치한 혐의로 검찰에서 4년형을 구형 받았어요.

대선 전이어서 더 그랬는지 이 사건이 이슈화되면서 사회에서 청년 돌봄이 이야기되기 시작했어요. '청년이 누군가를 돌본다고?' 그 전에는 '청년이 아픈 가족을 돌본다, 누군가를 간병한다'는 인식조차 못했거든요. 그래서 한국사회가 가족을 돌보는 청년, 외국에서는 '영 케어러(young carer)'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가족 돌봄 청년'으로 명명하고 관심을 갖고 찾기 시작했어요.

국가적 대책도 논의되기 시작했죠. 이들이 어떤 어려움을 얼마나 겪고 있는지, 이들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지에 대한 실태조사를 했어요. 실태조사 결과를 봤는데요. 가족 돌봄 청년들이 겪는 감정이 저와 비슷한 것 같아요. 저는 다행히 학업이나 일을 찾으려는 노력을 스스로 해왔고, 그럴 환경도 나름대로 좀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친구들도 많았어요. 사회적으로 연결망이 끊기고 친구 관계도 단절되면서 오는 삶의 불만족도가 일반 청년에 비해 굉장히 높았어요. 그러면서 오는 삶의 불만족, 우울감도 일반 청년에 비해 월등하게 놓아요.

지원방안도 마련되고 있어요. 가족돌봄 청년 대부분이 경제적 어려움을 많이 호소했어요. 가족돌봄을 하면서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자기계발비, 교육비, 문화활동비 같은 것들이 지원되기 시작했죠. 심리적 지원이나 심리치료 비용도 나와요. 저에게도 굉장히 큰 도움이 됐고, 실질적인 대책이라고 생각해요.

가족 돌봄 청년끼리 자조모임이 만들어지기도 했어요. 그곳에서 누구를 돌보는지,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각자의 돌봄경험을 이야기하고 서로 위로하기도 해요. 이 모임이 점점 발전해서요. 가족 돌봄 청년이나 아동, 청소년을 지원하기 위한 법 제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적어도 제 주변에는 가족을 돌보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청년이 없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가족의 비극이고, 나 혼자만의 사정이고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고 여겼거든요. 그런데 일련의 경험들을 하면서 이게 나와 비슷한 청년들의 이야기, '우리'들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마침 석사 과정을 마칠 때였거든요. 졸업 논문을 써야했어요. 제 경험을 토대로 나와 비슷한 청년들을 직접 만나 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필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생각했어요. 5명의 청년을 만났는데 그 중 3명 정도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어요.

먼저 민서의 이야기입니다. 민서는 저처럼 간호사를 꿈꿨어요. 어릴 때부터 민서 엄마가 조현병을 앓고 계셨어요. 병원을 오가는 일이 많았겠죠. 간호사 선생님들을 보면서 꿈을 꾸게 됐는데, 민서는 저와 다르게 간호사로 취업도 했습니다. 아등바등 취업했는데 엄마 상태가 점점 악화되면서 병원에 계실 일이 굉장히 많아졌어요. 신입 간호사로 들어갔는데 병원에서 자꾸 부르는 거예요. 보호자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계속해서 부르니까 동료들도 계속 커버해주기도 했죠. 그런데 그게 한계에 다다랐던 것 같습니다. 일을 세 달밖에 안 했는데,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엄마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퇴사했어요. 민서는 이야기해요. 다른 친구들은 만나서 맛집 투어도 하고, 놀러다니기도 하면서 평범하게 지내는 것 같은데 나 혼자 뭔가 투명한 돌, 굉장히 무거운 돌을 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요.

다음은 상우예요. 상우는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엄마가 폐암 진단을 받았어요. 그때 마침 군대를 가게 되면서 휴학했어요. 휴학하고 엄마를 전담으로 케어하다 보니까 2~3년 정도 복학을 하지 못한 상태가 됐어요. 그동안에 여자인 친구들은 대부분 취업했고, 남자애들도 대부분 자격증과 면허 땄다는 이런 소리도 들리는데 자기는 제자리인 채로 엄마를 돌보는 경험을 했어요. 그 생활이 계속 진행이 되면서 상우에게 번아웃이 왔대요. 굉장히 많이 지쳤다고 했어요.

마지막으로 아영의 이야기인데요. 아영이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아파서 중학교 때부터 아버지의 옷을 입혀주고, 밥을 챙겨주는 일을 계속 감당했다고 해요. 아버지가 치매 같은 정신질환 때문에 계속 집을 나가기도 했고요. 이런 생활이 반복이 되면서 아영이에게는 트라우마가 생겼대요. 그러면서 오는 불면증, 불안감 같은 심리적 어려움을 굉장히 많이 호소했어요. 횡단보도에 차가 쌩쌩 지나가는데 '뛰어들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고 있었어요.

이 친구들의 경험이 사실 제 경험이기도 하죠.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어요. 청년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있거든요. 대학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하고, 스펙을 쌓아 취업도 하고, 좋은 직장에 가 좋은 급여를 받고,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내는 일을 사회가 청년들에게 기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가족 돌봄 청년들은 대학교나 어렵사리 들어갔던 직장에서 휴학이나 퇴사를 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픈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돌봄 부담, 거기에서 오는 책임감과 그 생활이 오래되면서 생긴 우울감과 번아웃을 볼 수 있었어요.

휴학이나 퇴사하고 사회생활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은 경제 활동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잖아요. 이들 대부분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집 밖에 나가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친구를 만나는 것도 어렵고요. 그래서 이 친구들은 거의 혼자 집에서 지내게 됐고, 사회적으로 고립 상태로 있게 됐습니다. 결혼을 해 가정을 이루고 육아를 하는 일은 꿈조차도 꿀 수 없는 그런 상황에도 놓이게 돼요.

논문 마지막에 이들의 경험을 '돌봄과 사회적 역할 사이에 위태로운 줄타기'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었어요.

이런 어려운 청년들을 위해 필요한 게 뭘까요? 사실 저는 이 생활을 너무 오래 반복했기 때문에 뭐가 필요한지조차도 모르겠는 거예요. 저도 취업 준비하면서 자소서를 쓰고 이력서를 쓰고 하잖아요. 그런데 다른 동기들처럼 토익 점수가 그렇게 높지도 않고, 번듯한 대외 활동을 한 것도 아니고, 열심히 봉사활동을 한 것도 아니고, 그러다 보니 다른 동기들에 비해 제 이력이 굉장히 빈약한 거예요.

그래서 가족 돌봄 청년에게 '돌봄 경력 인정서'를 발급해주면 어떨까를 논문에서 제안했어요. 힌트를 얻은 데가 있어요. 서울시 성동구에서 조례를 만들었어요. 여성들이 아이를 낳아 육아를 하면서 사회적 경력이 단절되는 일이 있잖아요. 경력 단절 여성이라고 부르는데, 이걸 경력 단절이라고 하지 말고 경력 보유라고 해보자, '육아를 사회적 경력으로 인정해 주면 어떨까?'라는 취지에서 시작했다고 해요. 가족 돌봄 청년들도 우리의 돌봄 경험이 쓸모없이, 아무것도 안 남은 채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돌봄 경험이 분명한 의미가 있고, 사회적으로도 경력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경력 인정서를 생각해봤어요.

그 이유는 사실 제가 가족 돌봄 청년들을 만나기도 하고, 제 경험을 돌이켜 보면, 가족 돌봄 경험에 분명 긍정적인 요소들이 분명히 있었어요. 엄마를 돌보면서 굉장한 우울감을 느끼기도 하고 정말 죽고 싶을만큼 힘든 적도 많았지만, 제 친구들이 진로 고민을 할 때 저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고 제 경험 때문에 간호사를 꿈꿀 수 있었어요. 지금 하고 있는 장애인 복지 공부도 저에게 참 잘 맞고 재미있어요. 제 길을 찾는데 엄마를 돌본 경험이 긍정적으로 작용한거죠.

최근에 제 친구가 아이를 낳았어요. 너무 힘드니까 저한테 카톡을 보냈어요. '진짜 누군가를 돌본다는게 너무 힘들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돌봄이 필요한 신생아를 돌보는 일이 너무 힘든 거죠. '한 아이를 돌본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성실함이 필요한데, 아롱이 너는 어떻게 14년이란 시간을 어떻게 그렇게 성실함으로 엄마를 돌볼 수 있었냐' 이런 얘기를 했어요. 엄마를 돌보면서 성실함, 인내심, 책임감을 키우고 제가 단단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에게도 좋은 경험이 있고 장점이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어요.

▲ 2023년 4월 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가족돌봄아동·청소년·청년 지원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너무나도 저평가 되고 있는 돌봄 노동의 가치

노동자로 돌봄 일을 하는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우리나라의 돌봄 서비스는 크게 장애인 활동 지원 제도를 통해 일하는 장애인 활동지원사라는 한 축이 있고요. 노인 장기요양 제도를 통해 일하는 요양보호사라는 다른 축이 있어요.

제가 만난 장애인 활동 지원사 선생님은 사실 제 인생의 귀인이세요. 10년 넘게 같이 해왔고, 제가 이 자리에서 서서 이야기를 하는 지금도 저희 엄마 점심을 챙겨드리고 계실 거예요. 소화가 다 되면 옆으로 뉘어주시고, 체온은 괜찮은지, 아픈 곳은 없는지 챙겨주시기도 할 거예요. 그런 선생님들이 없었다면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공부나 직장 일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 선생님들이 일반적으로 1시간당 1만 6150원의 급여를 받아요. 여기서 세금도 떼고, 이용자와 연계해 주는 센터에도 비용을 냅니다. 쉽게 말하면 1시간 일하고 1만 원을 손에 쥐어요. 제가 집에서 어떻게 엄마를 돌보는지 알기 때문에 1시간에 1만 원은 너무 적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어요. 저라면 1시간에 1만 원 받고 그렇게 일할 것 같지 않았거든요.

그 형태는 대부분 시간제 계약직이에요. 쉽게 말해서 제가 만약에 한 지원사 선생님을 지켜봤는데, 뭔가 좀 마음에 안 들어. 엄마한테 잘 해주는 것 같지 않아. 그래서 '선생님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 다른 선생님 구할게요' 그러면 그 선생님은 하루아침에 일자리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런 불안정한 처우를 받고 계십니다.

돌봄노동자들이 이렇게 열악한 노동 환경에 처해 있어요.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요. 많이 지적됐던 이야기예요. 한 달 뼈 빠지게 일해도 200만 원을 못 벌어요.

코로나19 때 돌봄노동자들을 국가가 필수노동자군으로 분류했어요. 우리가 사회적 약자라고 부르는 장애인이나 노인들이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잖아요. 그분들을 돕기 위해 코로나 위험 속에도 밖으로 나와서 감염 위험 속에 일할 수밖에 없는 돌봄노동자들이 있었어요. 누군가를 돌보지만 정작 나는 돌봄을 받지 못하는 환경에 처한 분들이 많아요.

부모님, 선생님 등 여러 사람의 돌봄과 보살핌을 받지 않고 산 사람은 한 분도 없을거예요. '돌봄은 나랑 아직 거리가 먼데' 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사실 우리 삶을 지탱하는 가장 큰 기반이 돌봄이라고 생각해요. 돌봄이 사실 사회적으로는 감춰지고 보이지 않아요. 여성이 집안에서 무급으로 하는 돌봄 노동이 저평가되기도 하죠. 우리 사회가 돌봄을 어떻게 생각할지, 어떻게 평가할지 다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와 관련한 책을 두 권 소개해드리고 싶어요. <돌봄 민주주의>와 <보이지 않는 가슴>이에요. 이 중에 <보이지 않는 가슴>은 여성 경제학자가 쓴 돌봄 경제학 책이에요. 시장에서 수요, 공급을 말할 때 '보이지 않는 손'을 이야기하잖아요. 시장에서 가치가 매겨지지 않는 돌봄 노동이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정말 중요한 축이기 때문에 사회가 이를 주목하고 돌봄 가치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는 책이에요. 이 책을 읽고 돌봄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제 이야기로 돌아오면요. 내일 금요일 아침 9시에 수업을 듣겠네요. 아마 저는 교수님 목소리밖에 안 들리는, 정적이 흐르는 강의실에 도둑 고양이마냥 강의실에 살금살금 들어가야 되는 그런 상황에 처하겠네요. 오늘 제 얘기를 듣고 생각의 변화가 있으실지 잘 모르겠어요. 변화 없는 분도 있고, 조금이나마 마음에 움직임이 있는 분도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대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해온 공동체가 있어요. 저는 감사하게도 16년이라는 시간 동안 엄마를 돌보면서 터널에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또 공동체와 친구들과 함께여서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고,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친구에게 '나 1박 2일로 어디 가야 하는데 밤에 엄마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라고 이야기하면 '안타깝다'고 하는 친구도 있고, '내가 돌봐주면 안 되냐. 도와줄게, 같이 하자' 말하는 친구들도 있어요. 사실 저는 경제적 도움이나 심리 치료도 도움이 됐지만, 돌이켜보면 친구의 그 말 한 마디에 막혔던 숨통이 트였고, 제가 정말 지쳐 쓰러졌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제가 공부한 것을 나누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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