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장 : 오늘 재판부는 화해권고 결정을 내볼까 하는데 어떠십니까?
대한민국 측 법률대리인 : 국가 입장에서는 화해권고 결정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원고 대한민국'의 비정함이 또 드러났다. 김홍빈 원정대 구조비용 청구소송. 1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항소 12-1부(재판장 성지호)는 구조비용의 '60%'로 화해를 제안했지만, 결국 무산됐다.
'열 손가락 없는 산악인'으로 유명한 고(故) 김홍빈 대장. 그는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봉우리를 세계 최초로 모두 등정한 장애 산악인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2년 5월 '김홍빈 원정대'에 소송을 걸었다. 히말라야 하산 중 실종된 김 대장을 수색하고 원정대를 구조하는 데 든 헬기 비용을 내놓으라는 것.
청구 금액은 약 6800만 원. 광주광역시산악연맹과 원정대원 3명, 촬영감독 2명 총 6명(광주광역시산악연맹 포함)은 '원고 대한민국'이 보낸 소장을 받아들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21일 만에 일어난 일. 소관청은 외교부, 법률상 대표자는 당시 법무부 장관 한동훈이었다.
1심 법원은 광주광역시산악연맹과 원정대 대원들에게 비용 일부(약 3600만 원)를 나눠서 부담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원고 대한민국은 구조비용 전액을 돌려받아야 한다며 지난해 7월 항소했다.
김홍빈 원정대를 향한 정부의 소송은 당시에도 논란이 됐다. 정부는 훈장(체육훈장 청룡장)을 주고 국립현충원에 위패를 모셨다. 국위를 선양한 '스포츠 영웅'(2021년 대한체육회 선정)으로 치켜세울 때는 언제고, 구조비용을 받겠다고 국가가 소송까지 제기하는 것은 과도한 처사라는 비판이 일었다.
국회에서는 국가가 구조비용을 부담할 수 있는 '예외상황'을 늘리려는 노력이 있었다. 21대 국회 당시 외교부 등 관련 부처도 관련 법 개정 필요성에 공감하는 의사를 보였다.
조현동 외교부 제1차관 : 하여튼 지금 위원님 말씀하신 대로 법으로 그걸 보장한다면 실제로 재외공관에서 우리 재외국민 사고를 구난한 직원들은 오히려 움직이기가 훨씬 쉬울 수 있습니다, (국가의 경비 부담 여부를) 판단할 필요 없이.
김경협 국회의원 : 그렇지요, 당연히. 내가 얘기했잖아요, 그러니까. 대사관 직원이 긴급한 상황에서 돈 계산을 하고 있어야 되는 이런 황당한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법안의 문제를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최소한 그런 일은 없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2023년 4월 30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법안심사소위)
쟁점은 '영사조력법'이다. 영사조력법 제19조에 따르면 재외국민은 영사조력 과정에서 자신의 생명·신체 및 재산의 보호에 드는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다만, 예외가 있다. '긴급히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는 상황' 즉, '해외위난상황'에 처했을 경우다.
△재외국민이 본인의 무자력(無資力) 등으로 인하여 비용을 부담하기 어렵거나 △안전한 지역으로 대피할 수 있는 이동수단이 없어 국가가 이동수단을 투입하는 경우엔 국가가 그 비용을 부담할 수 있다.
21대 국회 당시 두 개의 영사조력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먼저,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광주 광산구을)은 국민이 국위선양을 하다가 해외에서 사고를 당했을 경우 국가의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법안을 발의했다.
"재외국민이 국위 선양 행위 중 발생한 사건·사고로서 그 행위로 '상훈법'에 따른 훈장과 포장을 수여받은 경우, 국가가 신체·재산 보호에 드는 비용을 부담할 수 있도록 한다."
2022년 11월 당시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수석전문위원(조기열)은 “국위선양자를 예우하려는 취지는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법제처 역시 “(개정안이) 보다 객관적인 요건인 '훈장 등의 수여'를 규정한 것은 비용 상환의무 면제 요건으로서 수긍할 수 있다”고 검토했다.
두 번째로 김경협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처한 재외국민이 자력으로 벗어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경우로서 '귀책 사유가 없을 경우' 국가가 영사조력에 대한 경비를 부담할 수 있다”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두 법안 모두 통과되지 못하고 지난달 29일 21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결국 폐기됐다.
사실 우리 국민이 해외에서 위급한 상황에 처한 일은 과거에도 꾸준히 존재해왔다. 하지만 김홍빈 원정대 사례처럼, 정부가 구조비용 청구 소송을 제기하는 건 꽤 이례적인 일이다.
2019년 5월 29일 일어난 헝가리 유람선 침몰 사건.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 다뉴브강에서 한국인 관광객 33명을 태운 유람선이 크루즈선과의 충돌로 침몰했다. 이 사고로 한국인 25명이 사망했고, 1명이 실종됐다.
당시 소방청은 실종자 수색 등 대응을 위해 잠수요원을 포함한 국제구조대를 헝가리에 급파했다. 당시 파견된 심해잠수요원은 9명. 국제구조대는 공기호흡기, 산소탱크, 부력조절기, 수심측정기, 유속측정기, 잠수복 등 수중 수색에 필요한 장비 22종 117점도 챙겨갔다.
김홍빈 원정대 사례와 비슷하게 우리 국민이 해외에서 조난을 겪은 위급한 상황. 하지만 정부의 후속 조치는 달랐다. 헝가리 유람선 침몰 사고와 관련해 외교부가 국민에게 구조비용을 청구한 민사상 판결은 없었다.
물론 당시는 영사조력법이 시행(2021년)되기 전이지만, 이때도 정부가 민사소송으로 구상권을 청구하는 길은 있었다. 하지만 외교부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외교부는 12일 기자에게 “관련 법령 등에 따라 조치하였고, 구체적인 내용은 밝힐 수 없다”고 답변했다.
자국민인 김홍빈 원정대에게는 구조비용 청구 소송을 걸었던 윤석열 정부. 오히려 외국인에게는 비용을 청구하지 않은 사례도 있다.
한국 정부는 지난해 10월 14일 이스라엘에서 우리 국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운항한 군 수송기에, 일본인과 그 가족 51명을 무료로 탑승시켰다. 주이스라엘 한국대사관과 외교부는 탈출 전까지 탑승객 전원에게 '영사조력법에 따라 비용이 청구될 수도 있다'는 점을 고지하지 않았다.
외교부 관계자는 그 이유를 묻는 김경협 의원실의 질문에 “전시 상황의 급박성이 고려된 것 아니겠냐”고 답한 바 있다.
어떤 경우에 구조비용을 청구하는지, 일관성 없는 정부의 판단 기준에 의문부호가 붙을 수밖에 없는 상황. 구조비용 청구 소송에서 김홍빈 원정대 측을 대리한 김한나 변호사(법무법인 두우)는 “영사조력법 시행령 등 하위 법규에서 국가가 비용을 부담하거나 부담하지 않는 경우를 보다 더 세세하게 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30일 막 개원한 22대 국회에서도 일명 '김홍빈 대장법'이 발의됐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이 '김홍빈 원정대'에 청구된 구조비용 소송 사건을 보도한 지 6일 만이다.
지난 10일 민형배 의원은 21대 국회 당시 발의한 법안과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영사조력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사단법인 '김홍빈과 희망만들기' 감사 출신인 정준호 의원(광주 북구갑)도 공동발의자로 이름을 올렸다.
민형배 의원은 "김홍빈 원정대 (구조비용) 구상권 청구 저지는 빠른 입법이 필요한 사안"이라며 '김홍빈 대장법' 제정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정준호 의원도 "(이번 '김홍빈 대장법' 발의는) 영원한 산이 되신 김홍빈 대장님을 위한 당연한 선택”이라며 “국위선양, 국민의 정서에 위반된 구조비용 구상권 청구를 꼭 막아내겠다"고 말했다.
항소심 세 번째 변론기일은 7월 9일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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