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문앞바다에서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전라남도 영광 지역 민간인 학살 사건

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수문앞바다에서

바다가 푸르다고 말하는 건

붉은 바다를 보지 못해서다

찔리고 맞고 돌 매달아 던져진

시퍼런 바다의 목구멍이

삼켜버린 목숨들

가라앉으면서도 끝끝내 외쳤던

기도가 들끓으며 일으킨

파란(波瀾)을 알지도 못한 채

아름다운 푸른 바다 물결에

반짝이는 윤슬이라 말하는 건

1950년의 그 바다를 알지 못해서다

그 해 수장된 목숨들은

먼 빛 어리는 저 일몰처럼

아스라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헤아리지 못할 깊이까지 가라앉아

바다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고

핏빛으로 물들였던

그들의 기도가

아직 우리에게 당도하지 못했으니

우리는 더 무거워야 하리

가슴에 납덩이 하나씩 매달아야 하리

흔들어도 넘어지지 않는 시계추처럼

굳게 서서 이 무게를 지켜야하리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라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라

주문처럼 되뇌며

침묵하지 않는 법을 파도에게 배우며

쉬지 않고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의 목소리로 말해야 하리

잊지 말라, 결코 잊지 말라

▲ 전남 영광 설도항 앞 추모비에 새겨진 학살장면. ⓒ김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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