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덕도, 세계전쟁사에서 드문 러일전쟁 전적지가 산재한 곳

[가덕도신공항 추진을 둘러싼 불편한 진실] ⑤

한반도에서 외국군과의 근대전쟁은 1866년 10월 프랑스가 불법 침략한 병인양요, 1871년 5월 미국이 불법 침략한 신미양요와 영국의 안하무인의 불법 거문도점령(1885 4월 15일~1887년 2월 27일), 남의 땅에서 오만하게 벌인 중국과 일본의 청일전쟁(1894년 7월~1895년 4월), 그리고 영국 등 서방 제국주의 지원으로 벌어진 러시아와 일본의 러일전쟁(1904년 2월 8일~1905년 9월 5일)으로 실로 한반도에서 벌어진 근대전쟁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제국주의자들의 국제전이었다.

먼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경우 알려진 바로는 프랑스 신부 9명을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알려졌지만, 이보다 더 다른 이유가 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는 신권사회에서 공화정으로 전환되어가고 있었으며, 가톨릭은 생존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고, 파리외방선교회 등 주요 프랑스 가톨릭은 극동으로 세력을 넓혀가는 프랑스 정부를 대신해서 먼저 선교를 가장해 청나라에 깊숙이 침투했고, 이윽고 조선으로 그 세력을 넓혀갔다. 신부들은 선교와 청과 조선의 정보 파악에도 매우 신경을 썼다. 조선에서 9명의 신부가 참수되기 전 청나라에서는 꽤 많은 수의 신부가 살해되었으나 프랑스는 대응을 못 했다. 조선에서 처형당한 9명의 신부도 흥선대원군 등에게 내정간섭을 심하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는 청에 속번국인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요구하지만, 청은 조선이 속번국이지만 외교와 국방은 조선이 주도적으로 한다며 피해갔고, 조선에게 프랑스가 공격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둘째는 고래다. 19세기 후반 포경업은 대서양, 인도양의 남획에서 고래의 개체 수가 줄자 이어 동해로 확장되었다. 동해의 고래는 향유고래, 참고래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동해의 포경업에는 미국 400여 척, 프랑스, 영국, 독일, 러시아, 일본으로 이어졌다. 고래기름은 화장품, 연고, 양초, 향수의 주재료로 질 좋은 동해의 고래기름은 황금알을 낳는 돈줄이었다. 독도를 발견했다며 자신들이 타고 온 “리 앙크루”포경선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세 번째, 프랑스는 청나라에 대한 보복을 애꿎은 조선을 향해 함포를 동원해 무력시위를 하며 노략질과 방화, 인명 살상, 문화재 약탈을 자행한 불법 침략이었다.

신미양요 또한 미국의 포경업보호를 위해 저질렀다고 추론할 수 있는데, 단 이틀 동안 전투를 위해 다섯 척의 군함(조수의 차이로 흘수선이 얕은 2척만 침범)과 6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미국의 조선 침략은 자국의 산업(포경업) 보호와 향후 조선에서 이권(철도부설, 탄광업등)을 위한 함포(무력) 외교의 침략으로 봐야 할 것이다.

영국의 거문도점령도 제국주의 야욕의 결정판이다. 러시아의 남하정책도 있겠지만, 조선정부의 친러 경향에 대한 경고로 거문도 점령을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청일전쟁은 일본의 철저한 사전 계략에 의한 전쟁이었다. 청일전쟁 직전 조선의 정부와 왕실인 경복궁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국왕을 겁박하고 조선 군인을 죽이고 경복궁의 보물을 마구잡이로 약탈하고 무기를 빼앗는 등 만행을 저질렀는데 이때 친일 첩자인 안경수 등이 나타난다. 고종의 명령이라며 전투를 하지 말라고 조선 군인에게 지시해버려, 경복궁은 쉽게 점령당하고, 이어 다음날 대부도 앞의 풍도 근처에서 청의 함대를 격파하게 된다. 이어 성환, 평양 등 조선 땅에서 전쟁을 하며, 민간인 동원, 약탈, 살인, 강간 등을 일으킨 양국에 의한 조선 민중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 가덕도. ⓒ연합뉴스

러일전쟁은 제국주의들의 이권 싸움에서 시작된 전쟁이다. 러시아는 부동항을 원하는 끊임없는 남진 정책을 진행했으나, 크림반도 확보의 실패, 아프가니스탄 침략의 실패에서 이제 만주와 조선으로 눈을 돌렸다. 청일전쟁 후 일본이 전리품으로 획득한 요동반도를 삼국간섭(러, 프, 독)을 주도해서, 러시아의 해군기지를 확보했고, 만주의 동청철도 부설권을 획득하며 만주를 세력권 화했으며, 조선의 경우 명성황후시해사건을 거쳐 아관파천을 통해 친러정권을 세웠다. 이에 불안을 느낀 영국은 일본을 동원했고, 양국은 1902년 영일동맹을 맺으며 러시아를 견제한다.

1903년 8월부터 러시아와 일본은 만주와 조선의 지배권을 가지고 밀약을 한다. 러시아는 만주와 39° 이북의 지배권을,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과 조·중 접경지대의 중립화를 요구했고, 밀약은 이어졌다. 그러나 이미 일본 정부는 경복궁 점령, 명성황후 시해, 청일전쟁 이전에 행했던 야비한 첩자파견, 전쟁 준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을 전쟁격전지로 만들고 전후 청과 러시아를 몰아내고 조선을 점령하여 식민지화하려는 계획을 세워두었다.

일본은 1904년 2월 6일, 육군을 제물포로 보낸다. 2월 8일, 일본 해군은 여순항의 러시아 군함에 어뢰 공격을 하고, 2월 9일, 제물포항의 러시아 함을 기습공격하여 바락함과 코리에츠함은 자침 또는 자폭하였다. 이때 제물포에는 외국의 여러 전함이 정박하고 있었으나, 일본은 공격을 강행했다. 이때 외국군은 항의하였으나 형식적이었다. 이 부분은 청일전쟁시 청군을 실은 고승호가 풍도 앞 해역에서 격침당했는데, 고승호의 선주는 영국이었다. 영국이 항의를 하다 말고 포기해버린다.

영일동맹 이전과 이후 영국의 기회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행동 중에는 청일전쟁시 고승호에 대한 피해보상과 사과를 영국이 포기한 것, 러일전쟁의 막대한 전쟁 비용을 미국의 유대계 자본들을 연결해주어, 일본이 대규모 국채를 발행한 것을 매입하게 하여 전쟁 비용을 감당하게 한 것, 1904년 전후 러시아주재 일본 공사관에 수백억의 공작금이 전달되었고, 이 공작금이 레닌 등의 혁명 세력 비호에 동원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이는 러시아제국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과와 러일전쟁을 이길 수 있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제물포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킨 일본은 육군은 조선이 러시아로부터 영토보전이 어렵겠다는 구실을 대며, 경성과 경복궁을 점령하였으며, 이윽고 육군 병력 5만 명을 상륙시켰다. 러시아의 나머지 전함들은 제물포에서 여순으로 집결하였고, 일본 육군은 평양을 거쳐, 압록강 인근에서 전투를 벌였고, 저항 없이 여순으로 진격한다. 그러나 육군에 의한 여순항 탈환 전투는 참호전과 방어에 중점을 둔 러시아군에게 패배한다. 일본 육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904년 6월, 결국 일본 해군은 여순항을 직접 공격하였으나 러시아 함대는 버티고 있었다. 8월 피해가 속출되자 러시아는 함대는 탈출을 감행하지만, 일본 기뢰에 당하는 등 힘을 못 쓴다. 결국 8월 10일 러시아 함대와 일본 함대는 결전을 벌이는데 황해해전이다. 이때 러시아 함대는 패배했고, 일본 해군은 여순항에 포격을 쏟아붓는다. 이에 힘을 엎은 일본 육군은 여순항을 점령하게 되고 러시아군은 봉천(선양)으로 후퇴한다. 1905년 1월 2일이다.

일본 해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는 기동력과 빠른 정비였다. 일본은 해군 군함의 정비를 위해 대마도와 조선의 진해항에 함정정비소를 마련하고 신속히 정비하여 전장에 투입한다. 반면 러시아는 정비 기동에 늦을 수밖에 없었고, 주요 정비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갈 수밖에 없는데, 해상길인 황해와 남해는 모두 일본 해군에 봉쇄되어있었다.

조선의 항구와 시설에 대해서 이미 일본은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5월에는 “대한시설강령”으로 조선의 항구를 무조건 신속히 수용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땅 아무 곳이나 일본의 군사기지로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리적으로 진해만의 입구에는 거제도와 가덕도가 유일한 방어용 섬이다. 진해항의 함정 정비시설과 해군 시설의 경비를 위해, 거제도와 가덕도에 대해 적 침입에 대한 방어진지화가 필요했다.

가덕도 외양포는 1904년 초부터 기초조사를 시행하였고, 8월부터 12월까지 공병 소좌 마쓰이(松井庫之助)가 주관하며. 일본인 청부건설업자 나카타니 히로요타가 공사를 하여 조성했다.

1904년 12월에는 진해만 요새 포병대대 제2중대가 상륙해서 주둔했으며, 12월 20일에는 중포병대대가 주둔했다. 1905년 4월 진해만 요새사령부가 외양포로 이전하여 사상 최대로 확대되었고, 1909년 중포병대대로 격하되어 유지되었다.

이때 울릉도와 독도에도 군사용 망루를 설치하려 했다.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로 하고 시마네현 담당으로 지정했고, 2월 22일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했다. 울릉도에는 1904년 9월, 독도에는 1905년 8월 망루를 세웠다.

1905년 4월 외양포 기지에 요새사령부가 이전할 정도였다면 매우 긴박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1905년 초 여순항과 러시아 함대가 공격을 받고, 일부 함정이 침몰하자 러시아는 세계최강으로 자부하는 제2 태평양함대 소위 발트함대를 극동으로 파견한다. 그러나 발트함대는 이집트의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장장 2만9000km를 운항하게 된다. 중간에 석탄과 음식을 보충해야 하지만, 각 국가의 항구마다 영국의 압력을 받아, 러시아 함대의 기착과 휴식, 물자 보충을 거부한다. 지칠 대로 지친 발트함대는 마다가스카르쯤에서 여순항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는다.

러시아 발트함대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배 밑에는 따개비가 너무 붙어 함정의 속도도 나오지 않았고, 겨우 확보한 동남아 기착항에서는 만약을 대비해 많은 석탄과 물자를 실었다. 결국 군함의 운항 속도는 느렸고, 석탄을 배 뒤에 실었기에 함정의 선두가 들리는 현상도 나타나 지휘소인 조타실에서 앞의 상황이 잘 안 보이는 현상도 나타났다.

당시 발트함대의 규모는 신형 전함 4척, 전함 8척, 순양함, 구축함, 기타 병참선 병원선 등 38척의 대규모 전단이었다. 반면 일본의 경우는 전함 4척, 순양함, 구축함, 어뢰정 정도로 발트함대에 비해 열세였다. 따라서 일본 해군은 기습공격을 준비했고, 러시아 전함의 지휘소인 갑판 상단 조타실을 향해 집중 포사격 훈련을 시행했다. 또 새벽 기습공격을 위해 바다 안개를 이용하는데, 당시 전 세계의 군함은 증기선으로 검은색을 띨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본 해군은 함정들을 회색으로 위장도색을 하게 된다. 현재 전 세계 군함이 회색으로 도색된 시작이다.

발트함대는 속히 블라디보스크로 이동하기 위해 쓰시마 인근의 항로를 택하고 종대로 이동하게 되며, 후미에는 병원선이 따르게 된다. 일본 해군은 후미의 병원선 불빛을 보고 함대의 위치를 파악했고, 새벽 바다 안개 색으로 위장 도색한 일본 해군은 러시아 함대 가까이 접근하여 조타실을 기습공격을 할 수 있었다. 조타실의 전함 지휘자가 희생되고 러시아 함대는 갈피를 못 잡는다.

5월 27일~28일 사이 발트함대는 전멸했고, 전함 8척과 작은 함정, 5,000명 이상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일본 해군은 어뢰정 3척과 116명이 사망한다. 결국 러시아 함정은 3척만 빠져나갔고, 일본은 승리했지만, 전쟁 재정 지출이 너무 많아 미국에 중재 요청을 한다.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러일전쟁으로 추산되는 사망자 수는 일본 4만7000명, 질병 사망자가 포함되면 8만명, 러시아는 4만~7만으로 추산하며, 전체적으로 13만여 명이 희생된 비극의 전쟁이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발트함대를 저지하기 위한 대비로 진해항 입구인 거제도와 가덕도에 대규모 군사기지를 만드는데, 특히 가덕도의 국수봉 일대는 사령소, 관측소, 감시소, 발전소, 조명소, 엄정소, 탄약고, 탄환고, 포구고, 작약전실소, 장약조제소, 장교숙박소, 병사숙소, 감수위사, 기름창고, 계선장, 저수고, 통신교통설비, 화장실 등을 영구 시설로 구축한 것이다. 또 거제도와 저도에 이르는 통신케이블도 설치했으며, 산악고지에 산악 보루(작은진지) 5개도 설치했다.

즉 일제는 1904년부터 1945년까지 가덕도의 외양포를 중포병부대로 구축한 주요 시설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당시의 군사시설이 남아있는 곳은 가덕도가 유일하다. 중국 여순에서 치열했던 203고지나 봉천, 랴오령, 압록강, 사허 전투지를 살펴봐도 가덕도만큼 일본군의 군사 진지가 남아있는 곳이 드물 정도이다.

한반도 근대 정쟁 중 청일, 러일전쟁의 전적지에 대해 비극적 장소 탐방(다크투어)이 꾸준히 진행 중이다. 특히 러일전쟁 120년을 맞이해서 집중적으로 중국의 여순 등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부산 가덕도 외양포를 세계전쟁사의 중요한 장소임을 알고 찾는 사람은 드물다.

가덕도 외양포를 “러일전쟁 기억의 공간”으로 남길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왜냐면 이 외양포 일제 군사기지 위로 가덕도 신공항 활주로가 지나고 국수봉을 헐어 바다를 메울 계획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과 수탈은 기념할 것이 아니라, 기억해서 역사의 교훈으로 남겨야 한다. 가덕도 외양포는 120년 전 가장 잔인한 전쟁을 기억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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