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반도체 노동자 사망 사건 첫 현장검증키로…"부실 검증 우려"

반올림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기 어려워, 산재 인정 판례 반영해야"

만 3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고(故) 신정범 씨. 신 씨는 25세였던 2014년 7월 삼성전자 메모리 사업부에 입사해 화성사업장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식각(ETCH) 공정 엔지니어로 주 평균 60시간을 근무하며 과로에 시달렸다. 신 씨는 32세였던 2021년 3월에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신 씨는 1년 9개월여 투병 끝에 이듬해 11월 눈을 감았다. 근로복지공단은 신 씨의 사건을 조사도 없이 '불승인' 처분했지만, 법원은 신 씨 사망 8개월 뒤인 지난 2023년 7월 7일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서울고법 행정7부는 다음달 5일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17라인에 대한 현장 검증을 실시한다. 삼성전자 노동자였던 고(故) 신정범 씨, 삼성전자 협력업체 노동자였던 고(故) 임한결 씨의 백혈병이 업무상 재해인지를 따져보기 위해서다.

법원이 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과 관련한 재판과정에서 현장 검증을 실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반도체 노동자 직업병 문제를 제기해온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은 법원의 결정에 대해 "의미 있다"면서도, 현장 검증이 부실하게 진행될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임 씨의 경우 2015년 3월부터 반도체를 만드는 삼성전자 기흥·화성사업장 등에서 가스감지기 관련 업무를 하다가 2017년 9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아 이듬해 10월 사망했다. 신 씨와 달리 임 씨 사건을 담당한 1심 재판부는 "망인이 반도체 제조공정에서 근무하는 근로자들과 같은 수준으로 벤젠 등 유해물질에 노출됐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며 불승인 판단을 했다.

임 씨와 신 씨 사건 모두 항소심이 진행되는데,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 행정7부가 현장 검증을 하기로 결정하며 그 결과에 귀추가 모인다.

반올림 측은 고인들의 근무 시점과 검증 시점이 10년 가까이 차이가 난다는 점, 현장 검증 시 실제 작업 과정과 괴리가 있어 위험 여부를 검증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반올림 활동가인 이종란 노무사는 31일 <프레시안>과 한 통화에서 "두 노동자 모두 비정형적으로 위험에 노출된 공통점이 있다. 그런 위험을 과연 현장 검증에서 잡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비정형 작업은 작업의 조건이 일상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으로, 정비, 청소, 검사, 수리, 조정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노무사는 "근로복지공단에서도 (현장 검증이) 견학 수준이었다“며 "(현장 검증 시) 자동화된 것을 많이 보여줄 거고. 그래서 자칫 역으로 훨씬 더 안전한 이미지로 보일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이번에 삼성전자 기흥 공장에서도 그간은 절대 피폭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고농도 노출 사고가 발생하지 않나. 당장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할 게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꼭 눈으로 봐야만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신 씨 사건의 1심 재판부와 같이 직업병 산정에 있어서 축적된 문헌과 산재 인정 판결문들을 반영해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라며 "무리하게 현장 검증해서 '내 눈으로 못했으니 안전하다'라는 결론이 나오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 노무사에 따르면, 지금까지 반올림에 접수된 산재 신청자는 186명이며, 그 중 107명이 산재를 인정받았다. 그 가운데 백혈병류는 43명 정도였다. 이 노무사는 "백혈병은 인구 10만 명당 2,3명 발생하는 희소병인데 10년 이상의 긴 기간 동안 반도체 노동자들의 암 발병률이 일반 인구의 암 발병률보다 높다는 것이 집단 역학 조사를 통해 확인됐다"며 "백혈병 잠복기는 짧게는 1년, 길게는 10년 이상이 될 수 있고, 일반 암은 그보다 긴 잠복기를 가지기 때문에 미리 작업장 안전에 신경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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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이명선

프레시안 이명선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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