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월드카프라자 피해자 백현준이라고 합니다. 시행사 대표 아들의 친구이며 여쭤보고 싶은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사채왕과 새마을금고' 보도가 시작된 뒤,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경남 김해시에 사는 평범한 공장 노동자 백현준(38) 씨는 2021년 친구에게 투자를 권유 받았다. 친구의 아버지는 경남 창원시 중고차 매매상가 KC월드카프라자의 시행사 대표였다.
20년 지기의 아버지가 하는 사업이니 의심 없이 투자를 결정했다. 없는 살림에 대출을 받아 분양가 7억 5000만 원짜리 상가 2개 호실의 계약금을 마련했다. 친구 아버지인 시행사 대표는 백 씨에게 '손해 보지 않을 것'이라 약속했다.
"상가 가격이 높아지면 팔아도 되고, 중고차 장사를 시작하든지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만약 그것도 안 되면 1년 뒤에는 시행사 이름으로 매입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백현준
백 씨는 저축은행에서 받은 중도금 대출 이자를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시행사 사무실로 찾아가 친구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그는 "대출을 받으러 가자"며, 김해에서 서울까지 백 씨를 데리고 먼 길을 떠났다. 도착한 곳은 서울 신설동 하타○○ 카페. 그곳에는 출장 나온 청구동새마을금고 직원들이 서류 작업을 하느라 분주했다.
카페 야외 테라스는 대기실처럼 쓰였다. 이미 도착해 있던 7~8명과 함께, 백 씨도 순서를 기다렸다. 머지않아 자신의 차례가 돼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백 씨는 여기서 '그 사람'을 봤다. 바로 '사채왕' 김상욱. 청구동새마을금고 1500억 원대 불법대출 사건의 장본인. 김상욱 일당은 그중 약 800억 원의 불법대출을 KC월드카프라자 한 곳에서 일으켰다.
"분양가가 7억 5000만 원짜리인데 대출금이 9억 4000만 원이라는 겁니다."
-백현준
백 씨는 대출금액이 터무니없이 높아 청구동새마을금고 직원에게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옆자리에 앉은 친구 아버지는 "물어보지 마라, 이거(자필서명 시간) 길어진다"며 가로막았다. 청구동새마을금고 직원은 백 씨의 인감도장을 받아 서류 여기저기에 찍어댔다. 백 씨도 시키는 대로 대출금액을 쓰고 서류에 서명했다.
대출금은 통장을 잠시 스쳐갔다. 남은 건 3개월 치 이자 3000만 원이 전부였다. 그는 이자가 동나기 전에 금방 상가를 매입해주겠다는 친구 아버지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그 말은 거짓이었다. 사채왕 김상욱과 전종남 전 청구동새마을금고 상무, 그리고 친구 아버지인 시행사 대표까지 모두 한통속이었단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현재 그에게는 대출 원금 9억 4000만 원과 이자 1억 원을 합쳐, 10억 원이 넘는 빚이 남았다.
백 씨는 경기북부경찰청으로부터 조사를 받으라는 연락을 받았다. 청구동새마을금고는 독촉장을 보냈다. 친구 아버지는 "별 상관없다", "너랑 관계없다", "신경 안 써도 된다"며 무책임한 문자메시지만 보내왔다. '20년 지기'인 친구는 백 씨의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지난겨울, 백 씨는 개인회생을 신청했다. 수면제를 먹고 잠들기 시작한 것도 그쯤부터다.
"저 혼자만 죽을 수는 없잖아요. 다 같이 죽어야지. 저는 끝까지 가볼랍니다."
-백현준
지난달 23일 김상욱과 전종남은 구속됐다. 친구 아버지인 시행사 대표도 구속영장이 신청됐으나 운 좋게 구속을 피했다. 지난 17일 의정부지방검찰청 고양지청은 김상욱과 전종남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배임 등) 혐의로 기소했다.
백현준 씨처럼 김상욱 일당에게 사기당한 KC월드카프라자 피해자는 모두 76명. 많은 피해자들은 신용불량자가 되는 걸 피하지 못했다. 10억 원짜리 독촉장이 집으로 무섭게 날아들었다. 독촉장에는 '계속 빚을 갚지 않으면 담보 부동산을 공매에 넘기겠다'는 말도 담겨 있었다.
재산세도 내지 못해, 상가는 압류당한 경우가 대부분. '부산・경남 최대 중고차 쇼핑몰'이라는 호칭이 무색하게도, KC월드카프라자는 상가 절반 이상이 텅 빈 상태였다. 이 일로 청구동새마을금고도 묻은 닫고, 신당1.2.3동새마을금고에 흡수 합병됐다. (☞ 관련기사 : 새마을금고 뱅크런의 진실, '사채왕 리스트'에 있다)
하지만 피해자들을 향한 시선은 냉담했다. 경찰은 그들을 공범으로 여겼다. 백현준 씨를 포함해 김상욱 일당에게 명의를 빌려준 피해자들을 사기방조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김상욱 일당의 거짓말에 현혹된 피해자들은 단 한 순간의 실수로 대출금 상환 책임을 전부 떠안은 데다, 법적 처벌을 당할 처지가 됐다.
"명의대여자 본인은 억울하고 피해자인 것 같은데, 특히 사회적으로 손가락질 받고 주변에선 피해자가 아니라고 하니까 그런 점이 가장 힘들 겁니다."
-차진태 변호사, 2024. 5. 22.
명의대여자들이 약 10억 원의 빚을 온전히 책임지는 게 바람직한 걸까. 이들 중 일부는 김상욱 일당을 고소하고, 새마을금고를 상대로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차진태 변호사(법률사무소 열)는 명의대여자들이 법적으로 구제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백현준 씨의 경우, 우선 청구동새마을금고 직원이 인감도장을 가져가 임의로 서류에 날인했기 때문에 사문서위조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명의차용자(김상욱 일당)의 명의대여자에 대한 기망행위에 대해 금융기관(청구동새마을금고)의 대출업무 담당자(전종남 전 상무)가 공모했음을 주장하며, '사기 취소'를 주장해볼 수도 있습니다."
-차진태 변호사
만약 명의대여자가 명의를 대여한 것뿐, 대출금으로 경제적 이득을 받을 의사가 없었다면 대출 의사가 없었다는 '비진의표시' 주장도 제기할 수 있다.
전종남 당시 청구동새마을금고 상무는 김상욱 일당이 명의대여자를 구해 대신 대출을 받는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채권자 금융기관(청구동새마을금고)과 명의차용자(김상욱 일당) 사이에서 의사가 일치할 경우에는 대출계약서의 채무자 표시는 명의대여자로 돼 있었더라도, 명의차용자가 대출계약의 실질적 당사자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채권자 금융기관의 양해가 인정돼, 명의대여자와의 대출계약서는 통정허위표시로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
-차진태 변호사
법적 근거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피해자들은 모두 약 10억 원씩의 빚을 졌지만, 김상욱 일당이 갚아야 할 빚은 한 푼도 없다는 것. 새마을금고는 피해자들에게 독촉장을 보내는 '채권자'의 위치. 신탁사인 무궁화신탁이 책임져야 할 돈도 '0원'이다.
"보통 사기꾼들이 노리는 게 피해자들이 사기 때문에 자살하거나 포기하는 겁니다. 사람이 죽어나가든 말든, 그건 사기꾼들에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피해자들이 포기하면 (사기꾼들은) 은닉재산 잘 갖고 있다가, 나중에 감옥에 다녀오면 흥청망청 써버리는 겁니다."
-송태경 민생연대 사무처장, 2024. 5. 13.
이 사건에서 새마을금고의 '내부통제'는 제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러나 새마을금고 중앙회는 "사고자(전종남 전 청구동새마을금고 상무)의 독단적인 사고"라며 "규정상 가능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가능했고, 그래서 (돈을) 빼돌렸을 것"이라는 답변을 내놨다. (☞ 관련기사 : "청구동새마을금고는 사채왕 김상욱의 개인 금고다")
새마을금고 임직원이 대출사기 사건의 공범이었음에도 개인의 '독단적인' 비리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피해자에게는 대출 연체금 독촉장을 날렸다.
"종남이(전종남 전 청구동새마을금고 상무)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 '회장님(김상욱 본인 지칭) 새마을금고가 솔직히 규정이 어디 있습니까? 씨X. (대출) 나가면 다 나가는 거지.'"
-2023. 6. 19. 김상욱 통화녹음
지난해 6월 청구동새마을금고 불법대출 사건이 처음 알려질 때, 그 규모는 1500억 원으로 추정됐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이 입수한 녹음파일에서도 김상욱 일당은 직접 1500억 원이라 언급했다. 새마을금고는 불법대출 금액을 약 1359억 원으로 보고 있다. 그중 약 75%인 1025억 원이 연체된 상태다.(서울중앙지방법원 '효력정지 가처분신청' 결정문 인용, 2024.1.26. 기자 주.)
부실채권은 거의 새마을금고중앙회로 인수됐다. 담보 부동산으로 처분해도 해결되지 못한 부실채권은 결국 '공적자금'을 투입해 해결하게 된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는 올 상반기 새마을금고의 부실채권 2000억 원가량을 매입하기로 했다. 사고는 새마을금고가 치고, 수습은 '공공'이 하는 셈이다.
"새마을금고중앙회에서 부실채권을 인수해서 정리할 텐데, 부실대출의 담보 감정이 과다평가 됐으니 대출금 일부는 보전하겠지만, 이런 형태로 대출받는 게 계속된다면 (김상욱 일당 같은) 이런 사기도 계속 칠 수 있게 될 겁니다."
-송태경 민생연대 사무처장
문제는 매년 반복되는 새마을금고의 '비리사슬'을 끊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셜록의 보도 이후,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이하 민변) 민생경제위원회는 지난달 23일 공동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감사원에 행정안전부에 대한 공익감사를 요청했다.
"그동안 새마을금고에서는 수많은 불법대출과 업무상 횡령・배임이 있었는데 여태까지는 임직원의 단순 일탈로만 치부돼온 것이 사실입니다. 새마을금고에 대해서 감독기관인 행안부가 적절한 감독도 하지 못하고 계속 같은 문제가 발생하는데도 적절한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위법하고 부당한 사무 처리가 있는지 조사를 촉구하기 위해서 감사 청구를 제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서성민 변호사, 2024. 4. 23. 기자회견 발언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새마을금고 문제가 지적됐다.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비례대표)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2년 8월까지 새마을금고 임직원에 의해 발생한 횡령・배임・사기・알선수재 사건은 85건에 달했다. 금융비리에 가담한 임직원은 110명으로, 이 중 46명이 이사장・상무・전무 등 임원에 해당했다.
금융사고로 인한 피해액은 640억 9700만 원 상당. 이 중 회수된 금액은 225억 7700만 원으로 전체 피해액의 35.2%에 불과했다.
하지만 연이은 대출 관련 '사건'에도 공동대출 검토를 담당하는 새마을금고중앙회 여신지원부 인원은 2~3명에 불과(2023년 10월 기준)했다. 1300개 금고가 실행하는 공동대출을 단 3명이 검토한 것이다.
"(전종남 상무는) 통제하기 위한 제도를 싹 무시하고 (불법대출을) 진행했습니다. 2년마다 감사하는 제도가 있긴 하나, 그 사이에 다 잡아내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새마을금고중앙회 언론홍보 담당자
"마음먹고 범죄 저지른 사람 하나 잡는다는 게, 조직원 100명을 동원해도 못 잡는 게 범죄입니다. 우리가 (범죄를) 못 잡은 게 잘못은 맞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귀책이 중대한 과실은 아니라는 거예요."
-무궁화신탁 임원급 관계자
신탁(信托)은 말 그대로 '믿고 맡긴다'는 뜻. 김상욱 일당이 '작업'한 KC월드카프라자 '문제 상가' 76건은 모두 무궁화신탁이 수탁한 부동산 담보신탁 물건으로 확인됐다. 무궁화신탁은 청구동새마을금고의 의뢰를 받아 담보 물건을 관리하는 대가로 수수료를 받고 새마을금고에 ‘수익권증서’를 발행해줬다.
김상욱 일당의 공범은 신탁사에도 있었다. 무궁화신탁 김재민 전 대리는 김상욱의 수족처럼 움직이며 자신의 자리에서 대출 사기에 가담했다. (☞ 관련기사 : 사채왕 수족이 된 신탁사 대리…'젊은 사기꾼'의 탄생)
무궁화신탁은 불법대출 사실을 구조적으로 "인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김재민 대리의 "개인 일탈"이라는,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식 답변. 하지만 신탁사에는 '선관주의의무'가 부여된다. 담보 제공, 매매계약 시 문제가 되지 않도록 잘 감시해야 하는 '의무'다.
하지만 무궁화신탁은 김재민 대리에 대한 관리·감독상 책임은 있지만 "중대한 과실"은 아니라고 부정했다. 오히려 김재민 대리 때문에 그의 직속상관이 보직에서 해제되면서 "선의의 피해자"가 됐다고 밝혔다.
불법대출 부동산 물건들의 담보 신탁을 맡은 무궁화신탁, 불법대출을 승인한 새마을금고. 하지만 그들은 '직원의 개인 일탈'로 선을 그으며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다. 심지어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사채왕 김상욱조차 "나도 피해자"라는 입장.
10억 원씩의 빚을 갚아야 하는 사람은 오직 대출명의자 개인들이다. 불법대출의 '실질적인' 책임은 백현준과 같은 사기피해자 개인에게만 전가된 셈이다.
김상욱 일당에게 사기를 당한 또 다른 피해자 함수진(가명) 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에게 죄가 없다는 게 아니에요. 명의를 빌려준 책임을 묻는다면 (벌을) 달게 받을 수 있어요. 근데 온전히 제 잘못이라고 하면 억울해요. 새마을금고는 명의도용이란 걸 알면서 대출을 해줬고, 계좌 주인인 저도 모르게 돈을 빼갔잖아요! 자기들은 사기꾼 김상욱이랑 공모했으면서, 나한테 돈을 다 갚으라는 게 말이 됩니까?"
김상욱은 지난달 16일 <셜록>과 한 전화 통화에서 "나도 피해자다, 불법대출 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여러 번 다시 통화를 시도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후 문자메시지로 재차 취재 협조를 요청하자 김상욱은 "관련자들의 허위주장과 모함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며 취재를 거부했다. 그리고 만약 취재진이 자신을 찾아온다면 "건조물 침입 등으로 법적 조치를 하겠다"는 입장을 보내온 바 있다.
전종남 전 청구동새마을금고 상무에게도 연락을 시도했다. 세 번째 통화 시도 만에 그와 1분가량 통화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좀 바쁘다", "아니다"라는 답변만 남긴 뒤 급히 전화를 끊었다. 이후 그에게 메시지를 남겼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김재민 전 무궁화신탁 대리는 셜록의 취재 연락을 받지 않다가, 보도가 시작된 후 '현재 수사 중인 사건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어 의견을 밝히기 어렵다'고 입장을 밝혀왔다. 이후 기자가 그를 찾아갔을 때도 "김상욱을 잘 모른다"며 "수사 중인 사건이라 말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이 기사는 <프레시안>과 <셜록>의 제휴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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