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이유도 없이
- 해남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하며
땅끝 마을 해남
푸른 물결 아래 잠들어 있는 아버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죄 없는 죄로 먼저 간 먼 길
마을 이장을 하며 추수 봉기를 이끌었던 아버지는
농민회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전쟁 발발 후
보도연맹원에 강제 가입되었다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보도(保導)는
보도되지 못한 채 송지 지서에 수감시켰다
부역 혐의로 끌려가 마산 지서에 구금된 또 다른 아버지
보듬고 있던 아이를 아내에게 인계하고 간 길이
아주 먼 길이 되었다
유독 몸이 약해 활동도 못 하였던 아버지는
황토가 유독 빨갛다고 하여 불리는 붉은데기에서
1950년 11월 마을 청년들과 함께 희생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추대로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인민위원장
덕분에 아버지는 마을 입구 소나무 아래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계략에 의해 죽음에 이른 애먼 목숨
어머니 말씀 잘 들어라, 하고 집을 나섰던 아버지의 말씀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그리움을 몰랐을 텐데
아버지가 계셨다면 매순간 함께 마주했을 텐데
법적인 절차도 없이
특별한 까닭도 없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가족과 멀어진 이유
그 이유를 누구에게도 묻지 못했다
땅끝 마을 해남 푸른 물결 아래에는
무고하게 학살당한
우리의 어버지들이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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