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20도에 나타난 페스트 곤충들, '악마의사'가 부른 한반도 세균전?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66] 생체실험과 세균전쟁 ⑮

[(세균무기 개발을 위한) 새로운 노력은 원자폭탄 제조 프로젝트와 맞먹을 정도로 비밀리에 계획됐다. 세균연구 본부는 신속한 반응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워싱턴에 충분히 가까이 있으면서도 세균으로부터 최소한의 안전을 보증할 수 있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메릴랜드의 옛 군기지 캠프 데트릭에 마련됐다](주디스 밀러 외 2인, <세균전쟁; 생물학무기와 미국의 극비전쟁>, 황금가지, 2002, 42쪽).

위의 글은 미 <뉴욕타임스> 기자 3명(주디스 밀러, 스티븐 잉겔버그, 윌리엄 브로드)이 함께 써낸 <세균전쟁>의 한 구절이다. 미국의 세균무기 개발노력이 마치 핵폭탄 개발만큼이나 무게감 있게 이뤄졌음을 말해준다. 원제목이 <Germs: Biological Weapons and America's Secret War>(2001)인 이 책은 2001년 9.11 테러 바로 뒤 미국인들을 공포에 빠트렸던 탄저균 테러 사건과 맞물려 널리 읽혔다(탄저균 테러에 대해선 연재 55 참조).

"보초병들은 일단 쏘고 나중에 질문하라"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미 연방정부는 워싱턴 북서쪽 70km 떨어진 메릴랜드주의 작은 도시 프레더릭의 데트릭 공항 문을 닫고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면서 공항 주변의 많은 땅을 사들여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였다. 그것이 미국의 세균부대가 자리잡은 캠프 데트릭의 출발이었다. 데트릭에 세균기지가 들어선 데엔 미 화학전 연구소인 엣지우드 병기창(Edgewood Arsenal)과도 멀지 않다는 이점도 작용했다.

이시이 시로(石井四郎)를 비롯한 731부대의 '죽음의 의사들'로부터 세균전 정보를 건네받으려고 미국이 1947년 가을까지 4차에 걸쳐 파견했던 조사관(세균전문가)들의 근무지가 바로 캠프 데트릭이다. 조사관들은 이시이 패거리들로부터 '피 묻은 세균정보'를 받아내려고 그들의 전쟁범죄를 묻지 않고 면죄부를 주는 '더러운 거래'에 앞장섰다. 주디스 밀러의 <세균전쟁>은 메릴랜드에 데트릭 기지가 들어섰을 때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세균)연구는 1943년에 시작되어 빠르게 확장됐다. 농촌지대의 촌스러운 군부대에서 갑자기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250개의 건물과 숙소가 들어섰다. 이 군부대는 방벽과 투광 조명들로 둘러싸여졌다. 보초병들은 일단 쏘고 나중에 질문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언제나 기관총에 탄약을 장전하고 있었다. 무장한 보초병들이 주야로 경계 근무를 섰다](주디스 밀러 외 2인, 42쪽).

핵개발에 버금 가는 대형 프로젝트

미 세균전 분야는 육군화학전국(局)이 맡았다. 기지의 구성원들은 박사급 연구원들을 포함한 장교 85명, 하사관 이하 373명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갈수록 규모가 커졌다. 1943년 4월 기지 공사에 들어갔고 공사 착공 3개월 뒤 전체 경비가 400만 달러를 넘어섰다. 당시 화폐가치에 견주면 엄청나게 큰 프로젝트였다. 그에 버금가는 것은 당시 핵무기 개발을 위해 로스앨러모스 사막 일대에서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던 '맨해튼 프로젝트' 뿐이었다(靑木富貴子, <731 石井四郞と細菌戰部隊の闇を暴く>, 新潮社, 2008, 210쪽 참조).

캠프 데트릭은 지금은 포트 데트릭(Fort Detrick)으로 일컬어진다. 1956년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절의 미 국방부가 '평화 시기에 생물무기 연구를 하는 영구적 연구개발시설'로 지정하면서 이름을 살짝 바꾸었다. 우리말로는 똑같은 '데트릭 기지'다. 그 기지 안에 미국 육군생물학전연구소(USBWL)가 자리 잡았다. 1969년에 새로 출범한 미국 육군전염병연구소(USAMRIID)의 전신이다.

데트릭 세균기지를 세우게 된 배경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이다. 진주만 피습(1941년 12월7일) 다음해 여름인 1942년 8월, 미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미국도 세균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일본이 중국에서 생화학전을 펴는 것을 보면서, '미국도 세균전으로 손을 더럽힐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만주에서 이시이 시로가 '방역 급수'(防疫給水)를 내세워 731부대의 전신인 '도고(東鄕) 부대'를 꾸린 것이 1933년이었으니, 미국의 세균전 프로젝트는 10년쯤 늦은 셈이다.

아울러 루스벨트 대통령은 적국의 세균전 정보를 캐기 위해 정보기관에게 특별 지령을 내렸다. 육해군 정보국(G-2), 전략사무국(OSS, 지금의 CIA 전신),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은 독일은 물론 일본의 세균전 움직임에 촉각을 세웠다(지금 미 국립공문서관에는 '생물전 특별파일'이란 이름으로 그 당시 세계 각지에서 보내온 비밀문서들이 수북이 쌓여 잠자고 있다).

그 결과로 미국은 일본의 세균부대에 관한 윤곽을 그릴 수 있게 됐다. 만주에 '방역급수부'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세균전 부대(731부대)가 있고, 그 부대의 우두머리인 이시이 시로의 지휘 아래 '이시이 기관'이라 일컬어지는 1만 명 넘는 생물무기(BW) 관련자들이 페스트균을 비롯해 비저균, 콜레라균, 장티푸스균, 이질균, 심지어 결핵균까지 다룬다는 정보를 얻어냈다(靑木富貴子, 214쪽).

▲ 1943년 미국은 핵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버금가는 거대 예산을 들여 데트릭 기지를 만들었다. 기지 안의 핵심부서인 육군 전염병의학연구소(미국 육군생물학전연구소의 후신). ⓒ위키미디어

원자탄으로 중단된 100만개 탄저균 폭탄

강대국인 미국이 왜 세균무기에 그토록 관심을 쏟았을까. 미국인들은 "우리가 세균무기를 쓰려는 것이 아니라 적이 세균무기로 공격해올 경우 어떻게 미군 병사들의 생명을 지켜낼 것인가를 연구하기 위해서다"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미 데트릭기지 연구원들이 그동안 관심을 기울여 온 프로젝트를 보면 앞의 설명과는 거리가 멀다.

제약회사 사장 출신의 조지 먹이 이끌었던 데트릭 기지 연구자들은 몇 가지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일본의 쌀과 독일의 감자를 파괴시키는 농업 해충을 연구했고, 적군을 죽이는 탄저균 무기개발에도 힘썼다. 수십 년 동안 생존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진 탄저균 포자를 채취해 무기 속에 넣는 실험도 했다(탄저균의 포자가 사람의 폐 속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막대형 박테리아로 바뀌어 감염을 일으켜 목숨을 앗아간다).

<세균전쟁>을 쓴 <뉴욕타임스> 기자들에 따르면, 데트릭의 연구자들은 일부 박테리아가 분비하는 독소들의 채취방법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공기전염을 피하고 적에게 직접 살포하는 치명적인 독소들을 얻어내려 했다.

[독소 가운데 하나는 독성이 가장 강한 화합물로 알려진 보툴리누스균이었다. 이 독소는 폐의 정상적인 기능에 필요한 횡격막을 비롯해 온몸의 근육을 마비시키므로 감염된 환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다. 데트릭의 과학자들은 제대로 살포되기만 한다면 이론적으로 500g만으로도 10억 명을 죽일 수 있는 보툴리누스균 독소의 농축방법을 알아냈다](주디스 밀러 외 2인, 43쪽).

아시아·태평양전쟁 중에 일본이 731부대를 중심으로 세균무기를 개발하고 중국인들을 상대로 실전에도 쓰던 무렵, 데트릭에는 모두 4개의 생물제제 생산 공장이 있었다. 지난 2008년 8월1일 미 공영라디오방송인 NPR 보도에 따르면, 1944년 데트릭 기지 안의 육군생물학전연구소(USBWL)는 모의 테스트를 거쳐 100만개의 탄저균 폭탄을 생산할 준비를 갖추었다.

소량의 탄저균 무기가 생산되긴 했지만, 바로 다음 해인 1945년 전쟁이 막을 내리면서 탄저균의 본격적인 대량 생산은 취소됐다. 미국이 다른 대량 살상무기인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45년 종전 무렵까지 미국은 세균무기를 실전에 단 하나도 쓰지 않은 채 전쟁을 끝냈다. 미국이 세균무기를 쓰지 않게 된 것은 핵폭탄 덕분(?)이라 말할 수도 있다.

윌로비 장군, "세균무기 생산, 미국이 일본 앞선다"

문제는 미국이 세균무기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난 글(연재 60 끝부분)에서 일본 역사가 츠네이시 케이이치(常石敬一)가 2005년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문서를 살펴봤었다. 도쿄 맥아더 장군의 정보 참모였던 찰스 윌로비 준장(연합군사령부 참모2부장)이 3차 조사관인 노버트 펠의 세균전 조사 결과를 미 합동참모본부에 보고했던 문서다. 그 문서에서 하나 더 짚고 넘어갈 내용이 있다. 문서 끝부분에 적힌 윌로비의 결론에 관한 것이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일본인들은 ('마루타' 생체실험을 포함한) 실제 있었던 연구 결과를 제공했다. (미국 연구자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인간 실험에 대한 자료는 매우 귀중하다. 생물무기 생산과 기상연구, 폐기물 분야에서 미국이 일본을 앞설 수도 있다](Christopher Reed, The United States and the Japanese Mengele. The Asia-Pacific Journal: Japan Focus, Volume 4, Issue 8, 2006년 8월14일).

파시스트 성향을 지닌 윌로비가 내린 결론은 읽은 이로 하여금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 전범 처벌을 안 한다는 조건으로 챙긴 세균전 자료를 이용해 미국이 생물무기(BW) 개발과 생산을 밀고나가려는 미 군부 강경파의 어긋난 욕망이 물씬 묻어난다.

윌로비 장군의 예언대로, 731부대 패거리들로부터 넘겨받은 '피 묻은' 정보는 미국의 세균전 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2008년 미 공영라디오방송 NPR 보도에 따르면, 1950년대 미국의 생물무기 계획은 펜타곤(국방부)의 최고 기밀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이며, 이 프로젝트의 중점은 사람(적군) 및 동식물이 생명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생화학제제(베트남전쟁에서 쓰인 고엽제 등)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탄저균이었다. 731부대가 탄저균무기 개발하려 애를 썼고 그 과정에서 많은 '마루타'들이 야외실험장의 말뚝에 묶인 채 죽어갔음은 이미 살펴봤다(연재 55, 57 참조).

▲ 1951년 3월 미 육군준장이 미 특수부대원들과 함께 북한군 지역인 원산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시신을 확인해 의혹을 샀다. 1951년 미군의 원산 폭격 모습. ⓒUSAF

731부대의 세균탄, 한반도에 뿌려졌나

논란의 핵심은 미국이 731부대로부터 얻어낸 정보를 이용해 6.25 한국전쟁에서 세균전을 폈는가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끝난 지도 70년이 넘었지만, 논란은 좀체 사그라지지 않는 다. 올해 2월에도 그와 관련된 논란이 불거졌다. 중국 국가안전부는 2월21일 중국판 카카오톡인 위챗(微信) 공식 계정에 '북위 38도 선상의 숨은 대결'이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중국공산당의 지하 정보조직이었던 '은폐전선'의 옛 성과를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글의 요점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무력 개입하려던 정황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앞둔 시점에서 이를 예측하고 북한군에게 정보를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사실 확인은 어려운 글이다. 중국 지하 조직에서 그런 성과(?)를 자랑 삼아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려니 하고, 그냥 넘길 수도 있겠다. 문제는 미국이 731부대의 기술을 이용해 세균전을 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는 점이다. 관련 대목을 줄여 옮기면 이렇다.

"1951년 적들은 조선의 전쟁터와 중국 내 동북지역에서 세균전을 진행했다. (중국 지하조직인) 은폐전선은 위험을 무릅쓰고 적의 세균전 실전 증거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적의 세균전 실시 음모를 제때 파악해 신화통신을 통해 국제 사회에 적의 잔혹한 행위를 폭로했다. 아울러 악명 높은 일본의 731부대를 접수해 그 기술로 세균무기를 개발했다는 정황도 밝혀냈다."

6.25 한국전쟁 동안에도 중국은 북한과 한 목소리로 '미국이 세균전을 폈다'는 주장을 했었다.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설'이 나올 때마다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의 망령이 다시 우리 앞으로 소환되곤 한다. 올해 7월이면 한국전쟁이 끝난 지 71년이다. 이제는 잊힐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설'은 걸핏하면 튀어나와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곤 한다. 정말로 미국은 '악마의 의사' 이시이 시로로부터 전수받은 기술을 이용해 한반도에서 세균전을 폈을까?

이인모, "대성골에서 미군이 세균전 폈다"

미군이 한반도에서 세균전을 펼쳤다는 의혹은 비전향 장기수였던 이인모(李仁模, 1917-2007)가 북송되기 앞서 펴낸 수기에도 나온다. 함경남도 풍산군 출신인 이인모는 한국전쟁 중에 조선인민군 종군기자였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 길이 막히는 바람에 빨치산 활동을 펴다가 1952년 1월 국군에 붙잡혔다. 그 뒤 34년의 옥살이 끝에 1993년 '한국 최초의 북송 비전향 장기수'로 화제를 모았던 인물이다. 그의 책에서 '세균전' 관련 대목을 보자.

[(1951년 겨울 무렵) 갑자기 열병환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환자들은 (지리산) 대성골에 있는 환자터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환자들의 병세는 심각했다. 진주 출신의 의사로 경상남도 의무과장이던 양기출씨는 그 병이 '재귀열'이라 했다. 미군이 대공세를 앞두고 세균탄을 써서 유격부대에 재귀열이 급속도로 퍼졌다는 것이다. 얼마 뒤 예상했던 대로 국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이인모 기록, 신준영 정리, <전 인민군 종군기자 수기: 이인모>, 월간말, 1992, 117쪽).

위 서술 방식을 보면, 이인모가 직접 미국이 세균전을 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경상남도 의무과장 출신 빨치산 의사의 입을 빌려 전하는 말이다. 미국이 남한 빨치산 토벌을 위해 세균전을 펼쳤다는 의혹은 사실일까. 이인모의 세균전 의혹 제기에 대해 '말도 안 된다'며 반론을 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빨치산 사이에 열병 환자들이 많이 늘어난 것은 위생과 영양 상태가 좋지 못했던 환경 탓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미군의 세균전과는 관계가 없다고 선을 긋는다. 하나뿐인 진실을 알기는 어렵다. 짐작만 할뿐이다.

북 외무상 박헌영, "미국이 세균전 펼쳤다"

6.25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세균전을 펼쳤다고 주장하는 쪽에서 내미는 근거는 크게 네 가지다. △하늘에서 비행기가 낮게 돌아다닌 뒤 한겨울에 난데없는 곤충들이 눈 위를 기어 다녔고, △얼마 뒤에 환자가 생겨났고, △붙잡힌 미군 포로 가운데 38명이 "세균 감염된 곤충 폭탄을 떨어뜨렸다"고 자백을 했고, △중립적인 국제조사단들이 현지조사로 세균전 물증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공산권의 선전 음모일 뿐'이라고 부인해왔다.

'미국이 세균전을 펼쳤다'는 북한의 비난은 북한 외무상 박헌영(朴憲永 1900-1955)의 입에서 처음 터져 나왔다. 그는 1951년 5월8일 유엔총회 의장에게 보내는 성명서에서 "1950년 12월 미군이 북조선으로부터 퇴각할 때 천연두를 전파했다"고 주장했다. <로동신문>과 <민주조선>을 비롯한 북한의 관영 언론사들도 잇달아 미국의 세균전을 비난하는 기사를 실었다.

<로동신문>과 <민주조선>은 그전까지만 해도 세균전을 다룬 기사가 전혀 없었으나, 1951년 5월과 6월에 집중적으로 23회나 세균전 관련 기사를 올렸다. 미국의 세균무기 사용 혐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던 1952년 3월 81회를 정점으로,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27일까지 모두 264회 기사가 올라갔다.(전예목, '6·25전쟁 시기 세균전 설 제기 과정과 내막', <軍史(군사)> 120호, 2021년 1월).

미 육군 준장이 원산으로 간 까닭은?

1951년 봄 북한이 미국의 세균전에 대해 신경을 쓰게 된 계기의 하나는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Newsweek)의 보도였다(1951년 4월9일자 기사). <뉴스위크>에 따르면, 1951년 3월 미 특수부대가 북한군 지역인 원산에서 작전을 펼쳤고, 그 특수부대 작전에 미군 육군준장이 함께 했다는 것이다. 그런 사실이 알려지자, 미군 장성이 왜 위험을 무릅쓰고 원산으로 갔느냐가 관심을 끌었다. 사건의 줄거리는 이렇다.

그 무렵 미국은 북한에 밀파된 첩보원들로부터 원산 일대에서 전염병이 돌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흔히 '흑사병'으로 알려진 선페스트(腺pest, bubonic plague)가 유행하고 있다는 첩보였다. 맥아더 장군의 보건복지 참모였던 크로포드 샘즈 준장은 그 첩보가 맞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첩보원들은 의학 전문가가 아니므로 전염병으로 돌고 있는 문제의 질병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디. 그렇기에 샘즈 준장은 페스트가 유행한다는 첩보원들의 보고가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처음엔 특수부대원들이 원산으로 들어가 전염병으로 죽은 시신을 가져오려 했다. 하지만 그 작전은 쉽지 않았다. 9번이나 작전이 실패하자, 샘즈 준장이 직접 가서 시신을 확인하려고 나섰다. 미 해군 특수부대와 남한 해병대로 구성된 침투요원들은 샘즈 준장을 호위하면서 고무보트를 타고 원산으로 갔다. 해변가에서 기다리던 현지 첩보원이 그들을 어떤 초가집(병원?)으로 안내했다. 샘즈가 그곳에서 시신들을 확인해보니 (첩보원의 보고와는 달리) 사망 원인은 페스트가 아니라 출혈성 천연두였다. 피하 출혈로 말미암아 시신의 피부가 검게 보였기에 첩보원들이 흑사병으로 잘못 보고했음이 밝혀졌다.

샘즈 준장은 시신을 들고 돌아가겠다는 계획을 바꿔, 시신을 그대로 놔둔 채 특수부대 요원들과 함께 현장을 빠져나갔다. <뉴스위크> 지의 보도를 통해 이런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북한은 미군을 도와준 혐의를 받은 북한쪽 협력자들을 처벌하면서 세균전 공세를 폈다. 샘즈 준장의 행동은 북한의 의심을 살만한 것이었다.

원산 특수작전이 문제가 되자. 미국은 '유행병 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를 마련하기 위해서' 특수부대가 원산에 갔다고 주장했다. 단지 전염병의 종류를 정확히 알기 위해 미군 장성이 함께 나섰다? 적지(敵地) 잠입작전이 그렇게 만만한 것인가? 특수작전 가운데 엄청나게 난이도(위험도)가 높은 것이 적지로의 은밀한 상륙과 복귀 작전임은 누구나 알만하다.

북한에 어떤 괴질이 도는가를 알아내려고 미군 장성이 특부부대원들과 함께 갔다는 설명을 북한 당국은 믿지 않았다. 미군 현역 장성이 만에 하나 붙잡힐 위험을 무릅쓸 만큼의 '그 무엇'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 의심했다. '그 무엇'이 세균전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봤다. 미국이 북한 일대에서 세균전을 폈고, 그 성과를 확인하고자 샘즈 장군이 직접 나섰다고 믿었다.

▲ 미국은 731부대의 세균정보를 이용해 세균전을 펼쳤다는 의혹을 받는다. 그런 논란이 벌어질 때마다 이시이 시로의 망령이 소환되곤 한다. 731부대가 하얼빈 외곽 핑팡에서 철수한 뒤 굳게 닫힌 철로. ⓒ김재명

中 저우언라이, "미국이 세균전 범죄 저질렀다"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세균전을 감행하는 잔인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음을 세계 만방의 인민들에게 알린다. 미군이 군용기를 통해 1월28일부터 '세균 독충'을 철원·평강 등 북한 지역에 살포하고 있다." 1952년 2월22일, 북한 외무상 박헌영이 긴급 성명을 내놓으면서 했던 말이다. 박헌영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은 1952년 1월28일부터 북한 상공에다 세균을 지닌 대량의 곤충을 비행기로 뿌려대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헌영의 성명이 나온 이틀 뒤 중국(중화인민공화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도 박의 주장을 거들면서 미국을 비난하고 나섰다. 40일쯤 뒤인 3월8일 저우언러이는 미국 비행기가 북한뿐 아니라 중국 화북과 동북 지역에도 2월 말부터 세균전을 펼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과 중국의 주장에 맞서 미국 정부와 언론은 '공산권의 전형적인 선전 음모의 하나'로 몰아붙였다. 유엔주재 미 대사 헨리 롯지 2세는 '공산세력의 악의에 찬 거짓 공세'라고 반론을 폈다. 계절적인 전염병을 제대로 막지 못했기에 생긴 질병을 엉뚱하게 미국 탓으로 돌린다며 손사래를 쳤다.

1952년 초부터 미국의 세균전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북한·중국·소련은 번갈아가며 미국을 비난했다. 1952년 2월18일 모스크바 라디오 방송이 미국의 세균전을 펼치고 있다고 주장했고, 2월22일 박헌영 외무상 성명에 이어 2월23일엔 중국 공산당의 기관지 <인민일보>가 사설로 미국을 공격했다. 사설은 "미국이 군사적 참패를 만회하려고 전선과 후방에 독균을 살포하고 있다"면서 "이는 그 무렵 열리고 있던 정전 담판을 늦추고 전쟁을 이어나가고 더 잔혹한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전예목, 앞의 글).

중국 지도자들도 나섰다. 1952년 2월21일 마오쩌둥(毛澤東)은 미국이 세균전을 시행하고 있다면서 소련의 도움을 요청하는 비밀 전문을 보냈다. 이 전문에서 마오는 이시이 시로를 포함한 731부대가 중국에서 세균전을 펼쳤던 사실을 꼽으면서, "일본인들이 지난 전쟁 시기에 썼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미국이 세균전을 펴고 있다"고 주장했다. 2월24일 저우언라이는 '중국 정부와 중국 인민을 대표하여' 이틀 앞서 나왔던 박헌영의 성명을 적극 지지한다고 밝혔다.

'영하 20도에 나타난 페스트 곤충들'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세균전 의혹을 검중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면서 모두 3개의 조사단이 꾸려졌다. △중국 정부가 만든 '미국 제국주의 세균전 죄행 조사단'(활동기간 1952년 3월15일-4월10일), △국제민주변호사협회가 만든 '국제민주변호사협회 위원단'(1952년 3월3일-3월19일), △세계평화이사회 이름으로 만들어진 '국제과학위원단'(1952년 6월23일-8월31일)이다. 이들은 따로따로 조사활동을 폈지만 결론은 하나같이 미국의 세균전 공세를 비난했다. 이를테면 국제민주변호사협회 위원단의 조사보고서는 이러했다.

[1952년 2월18일 평안남도 안주군 대리면 발남리에서 파리·거미·딱정벌레가 발견되었다. 한겨울에 이 지방에서 그런 곤충들이 나타난 적이 없었다. 지상온도는 섭씨 영하 20도였다. 곤충이 발견되기 전날 야밤중에 (미군) 비행기가 이 지역을 정찰하면서 대단히 낮게 여러 차례 선회하였다. 전문가들의 조사 결과 이 곤충들은 페스트균에 감염돼 있었다. 2월25일 이 촌락에 페스트가 발생했다. 600명의 주민 가운데 56명이 병에 걸려 3월11일까지 30명이 죽었다](김주환,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 청사, 1989, 171쪽).

미국이 세균전을 펼친 게 사실이라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아 마땅했다. 사실이 아니라면? 미국의 주장대로 공산권의 음해 공작에서 비롯된 허위선전이 된다. 6.25 한국전쟁 기간 중에 벌어졌다는 미국의 세균전 의혹이 그 뒤 줄곧 논란으로 이어져온 까닭은 '세균전의 결정적인 증거'를 둘러싼 양쪽의 시각이 크게 엇갈리기 때문이다.

글이 또 길어졌다. 다음 주엔 이들 조사단의 활동과 한계, 미국의 반론, 그 뒤 새로 드러난 사료를 바탕으로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설'이 사실인가(또는, 선전공세를 위한 조작인가)를 둘러싼 전문 연구자들의 분석을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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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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