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타 생체실험 '악마 의사', 세균무기 내세워 미와 중에 '채용' 제안해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60] 생체 실험과 세균 전쟁 ⑨

"전쟁범죄를 추궁하지 않는다. 오로지 과학 정보를 얻고 싶다" 미 조사관들은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1892-1959)를 비롯한 731부대 간부들을 만날 때마다 이런 말을 되풀이했다. 조선 독립투사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을 '마루타'(통나무)로 삼아 생체실험이란 끔찍한 짓을 저질렀던 자들을 미국은 정중하게 모셨다. 전쟁범죄자로 다루기는커녕 '세균 전문가' 또는 '연구자'로 받들었다. 따지고 보면, '세균 전문가'라는 용어는 중립적이다. '연구자'란 이름도 마찬가지다. '전쟁범죄자'란 악취를 곧바로 풍기진 않는다.

지난 주 글에 살펴봤듯이, 미 조사관들이 굽실거리듯이 세균정보를 얻어내려 안간 힘을 썼다. 하지만 초반부 조사는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악마의 의사'들은 1945년 9월 1차, 1946년 1월 2차로 각기 파견된 미 조사관들을 거짓말로 농락했다. 생체실험을 했다는 사실을 숨겼고, 세균전도 '연구 차원에서 아주 소규모로 실행했다'고 그들의 전쟁범죄를 축소·은폐했다.

펠 조사관, "소련에 세균 정보 넘어가서야 되겠냐"

미국이 그토록 바라던 세균전 정보를 731부대 간부들로부터 얻어낸 것은 1947년에 들어와서였다. 그해 4월에 파견된 3차 조사관 노버트 펠((Norbert H. Fell, 데트릭 세균연구소 예비실험부 주임)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도조 히데키 등을 피고석에 세우고 도교 전범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이 한창 열리고 있던 터라, 그때껏 체포되지 않고 자유롭게 지내왔던 이시이 일당 사이에선 '미국이 세균전 정보를 바랄 뿐 우리의 전쟁범죄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란 기대가 퍼져갔다.

세균학박사인 3차 조사관 노버트 펠은 여러 다양한 미생물 분야를 연구했고, 특히 전염병 분야의 권위자였다. 무뚝뚝한 성품을 지녔지만, 데트릭 기지의 병사들로부터는 인간적인 존경을 받았다고 알려진다. 그가 '지독한 술고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술을 워낙 좋아했기에, 틈틈이 젊은 군인들과 어울리는 저녁 시간이 많아서였을 것이다.

2개월쯤 일본에 머무는 동안 펠 조사관은 일본 술(사케)를 즐기면서도, 이시이 시로를 비롯해 20명 가량의 731부대 세균전 관련자들을 부지런히 만났다. 얼굴을 마주하면, 첫마디로'나는 전범자를 찾고 있는 게 아니다'라며 상대를 편하게 이끌었다. '소련 쪽으로 세균전 정보가 넘어가서야 되겠느냐'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 무렵은 영국 정치가 윈스턴 처칠의 '철의 장막' 발언(1946년 3월)이 상징하듯, 동서냉전 체제가 막 시작되던 시점이었다. 만주에서 저질렀던 '마루타' 생체실험과 페스트균 살포로 악마 같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731부대 간부들 사이엔 '미국에 세균전 연구자료를 내놓으면 면책권이 주어진다'는 입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면서 '펠 조사관이 만나자고 연락이 오면 피하지 않는 게 이로울 것'이란 이야기들이 오갔다.

▲ 1942년 일본의학회 총회 때 미생물분과회의에 참석한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앞줄 가운데). 미국은 이시이로부터 세균전 정보를 얻기 위해 그의 전쟁범죄를 덮어주었다. ⓒ위키미디어

"이거 참 힘들 게 만든 자료인데..."

이시이 일당은 감춰 두고 있던 자료들을 펠 조사관에게 건네며 '이것은 참으로 힘들게 만든 자료인데...'하며 생색을 내기까지 했다. '힘들었다'고 했지만, 과연 그들 가운데 몇 명이나 생체실험용 '마루타'를 죽이는 걸 망설이거나 고민을 할 정도로 힘들어 했을까. 731부대 '악마의 의사'들은 이미 인간성을 내버린 20세기 최악의 범죄집단 공범자들이었다.

끝끝내 입을 닫고 버틴 자들도 있다. 펠이 면책권을 보장한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731부대의 제1부장(기초연구)을 지낸 키쿠치 히로시(菊池齋, 군의소장)가 그러했다. 펠은 다른 사람에게서 받아낸 진술을 들이대며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키쿠치는 '나는 모른다' 또는 '그런 사실은 없었다'며 증언을 거부했다. 특히 펠이 궁금해 했던 인간 생체실험에 대해선 '소문으로만 들었다'고만 말할 뿐이었다. 그 자신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결국 펠은 그런 자들에 대한 심문을 포기했다. '소련 쪽에 세균전에 관련하여 미국인에게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과 세균전 정보를 발설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받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심문을 받을 때 그들의 머릿속엔 이시이 부대장이 1945년 8월 핑팡 731부대를 폭파하면서 외쳤던 말('731의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라')이 내내 맴돌았을 것이다(연재 56 참조).

이시이, "면책을 문서로 보증하면 만나주겠다"

펠 조사관은 다른 누구보다 이시이 시로를 만나고 싶어 했다. 2차 조사관인 톰슨 중령도 만났으니, 그가 자신을 피할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번엔 이시이의 태도가 달랐다. 이시이-펠 면담을 주선하는 중개인에게 '면책권을 문서로 확실하게 보증해주면 만나주겠다'는 요구를 내걸었다. 이시이도 면책권 문서는 펠의 권한을 벗어난 것이고, 미국이 문서를 선뜻 내줄 리가 없다고 짐작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거친 표현으로 '찔러 본다'는 말이 이 경우에 딱 맞을 듯하다.

1947년 6월24일에 올린 '펠 보고서'에 따르면, 그런 신경전이 펼쳐진 뒤 이시이를 그의 집에서 만났다. 심문은 1947년 5월8~10일 사이에 사흘 동안 이어졌다. 이시이는 한 눈에 봐도 값이 제법 나갈 고급 기모노를 입고 펠을 맞이했다.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펠은 다른 731부대전범자들을 심문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입을 열었다. '데트릭 기지 조사관들은 전범 기소와는 아무 관련 없이 오로지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데이터를 얻기 위해서 심문한다'고 했다.

펠 조사관은 이시이 심문 첫날 '좀 더 솔직하게 털어놓으시라'고 부탁했다. 생체실험과 중국 민간인과 군인들을 겨냥해 벌였던 '세균전 공격 실험'의 결과를 숨김없이 알려달라고 했다. 이시이를 만나기 앞서 다른 731부대 간부들의 입을 통해 '마루타' 생체실험이 있었고, 따라서 이시이가 2차 조사관 톰슨 중령을 속이고 위증을 했다는 사실을 펠은 알고 있었다.

이시이의 답변 태도는 톰슨을 농락했을 때처럼 애매했다. 펠이 남긴 보고서('펠 리포트')에 따르면, 그는 먼저 '내가 하는 말을 소련 쪽에 알려선 안 된다'고 뻔한 다짐을 하면서 성의 없는 진술을 했다.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를 추적해온 재미 일본작가 아오키 토미키코(靑木富貴子)의 글에서 이시이가 했던 말을 옮기면 이렇다.

"나는 (세균무기와 세균전에 관한) 기술적인 데이터는 건네줄 수 없다. 상세한 것들은 모른다. 알고 있던 것도 잊어버렸다. 모든 기록은 파기되었다. 전반적인 결과만이라면 알려드릴 수 있다." 그러면서 이시이는 중국과 소련 첩보원들이 세균무기를 (먼저) 사용했기에 어쩔 수 없이 일본이 세균전을 시작하게 됐다고 주장했다](靑木富貴子, <731 石井四郞と細菌戰部隊の闇を暴く>, 新潮社, 2008, 412쪽).

미국과 중국에 "나를 채용해달라" 제안

뻔한 사실을 아니라고 내내 부인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이시이는 이미 자신의 최측근 부하로 일본에 돌아와서도 늘 가까이 지내던 731부대 제3부장(방역급수 담당) 마스다 토모사다(增田知貞, 군의소장)이 펠 조사관에게 '생체실험이 있었다'고 털어놓았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펠의 표정을 살피던 이시이는 또 다시 면책권 얘기를 꺼냈다.

"나는 핑팡(만주 731부대가 자리잡은 지역 이름)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책임을 지고 있었다. 나는 그 책임을 기꺼이 떠맡을 것이다. 나의 상관이나 부하들은 (세균무기 개발을 위한 생체)실험 지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모두 내 책임이다. 만약 당신이 나와 나의 상관·부하들에게 문서로 면책(免責)을 보증한다면, 모든 정보를 제공하겠다"(靑木富貴子, 412쪽).

펠은 이시이를 만나기 전부터 중개인으로부터 면책권 문서 얘기를 되풀이해 들었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짜증이 났을 것이다. 면책 얘기를 꺼내 펠을 심란하게 만든 이시이는 뻔뻔스럽게도 취업 청탁을 했다. 이시이는 이미 펠이 만났던 다른 731간부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 세균연구소에서 일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의식한 듯, 이렇게 말했다.

"나를 세균전 전문가로 미국에서 채용해 주었으면 한다. (미국이) 소련과의 전쟁을 준비할 때 (활용할 수 있도록) 내가 20년 동안 쌓은 연구와 실험의 성과를 모두 미국에 건네줄 수 있다"(靑木富貴子, 413쪽).

(실제로 이시이는 1950년대에 펠이 근무하는 미 데트릭 세균연구소로 가서 한동안 머문 적이 있다. 패전 뒤 731부대 군의관 출신 의사들이 만주에서의 생체실험을 바탕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거나 의료업계에서 돈을 버는 등 뻔뻔한 행태에 대해선 곧 따로 다룰 예정이다).

이시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에 견주면, 다른 731간부들이 미국에 제공할 자료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암시를 은근히 내비쳤다. 미 육군정보 및 안보사령부 공문서보관소(메릴랜드주 포트 미드)의 한 기밀 문서에는 이시이가 펠에게 '미국 취업'을 제안했을 무렵, 다른 쪽에도 취업 제안을 했다는 놀라운 사실이 담겨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장제스(蔣介石)의 중국 국민당정부였다. 아직 마오쩌뚱(毛澤東)에게 밀려나기 전이라 1947년 당시 중국 대륙의 실세는 장제스였다. 그는 국민당 정보기관에서 자신을 고용하면, 중국 공산당 군대를 겨냥해 세균전을 펼칠 수 있다는 제안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서 우리는 '악착같은 생존술을 몸에 익힌 기회주의자의 무서운 맨얼굴'을 이시이에게서 본다. 미 역사학자 해리스의 글에 따르면, 이시이는 자신의 상품가치나 경쟁력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이시이는 생물무기(BW) 공격시 방어와 그 사용방법에 대한 전략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할 수 있다면서, 다양한 지역과 추운 환경에서도 견딜 수 있는 BW 인자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을 진행했었다고 시인했다. 자신의 주장에 심취한 이시이는 BW에 관한 지식이라면 책으로 몇 권이나 쓸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보유하고 있다고 자랑했다](셸던 해리스, <일본의 야망과 죽음의 공장>, 눈과마음, 2005, 442-443쪽).

이시이가 교활하다는 것은 펠 조사관에게 했던 다음 말에도 드러난다. "내가 전공했던 BW 연구 분야는 아주 방대하기 때문에 펠 박사 당신이 듣고 싶은 분야가 무엇인지 말해줘야 한다." 이 말 속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는 듯 보인다. 하나는 바로 위에서 봤듯이 자신이 미국 연구기관에서 탐낼 정도의 능력을 지닌 세균학자라는 자부심, 다른 하나는 이시이가 바라는 면책권 보장이 확실하게 마무리될 때까진 '갖고 있는 세균전 정보를 몽땅 다 털어놓지 않겠다'는 고집이 느껴진다.

▲ 1945년 8월 731부대가 소련군을 피해 도망치면서 부수고 버린 도자기 폭탄 파편들. 미 조사관은 페스트균을 도자기에 담아 세균전을 펼친다는 아이디어에 놀랐다. ⓒ하얼빈 731부대 죄증진열관

"누가 731기지 파괴하라 했는지 모르겠다"

1947년 5월9일 두 번째 심문에서 펠은 먼저 헤이룽장(黑龍江)성 안다(安達)현의 야외실험장에 대해 물어봤다. 그곳에선 많은 '마루타'들이 페스트와 탄저균 등 세균전 생체실험으로 죽었다. 하지만 이시이는 눈을 껌벅이며 거짓말을 했다. 1942년 8월 그가 731부대를 떠난 뒤 '그곳에서 실험을 했다는 사실을 조금은 알고 있다'면서도, 그 자신은 아무 관계없는 제3자인 듯이 말했다.

"안다(安達) 야외실험장에 대해선 1945년까지 들어본 적이 없으며 그곳을 가본 적도 없다. 중국 닝보 사건(페스트균 투하, 본연재 55참조)에 대해선 신문을 읽고서 알게 됐다. 그 사건에 대해선 전혀 몰랐다."(셸던 해리스, 441-442쪽)

지난 글에서 살펴봤듯이, 소련 국경 가까운 린커우(林口)에 배치된 731부대 162지대장이었던 사카키바라 히데오(榊原秀夫, 군의소좌)는 안다 야외 실험장에서 탄저균이 든 도자기 폭탄으로 마루타들을 죽였던 범죄 사실을 털어놓은 바 있다. 생체실험을 했던 시점은 이시이 시로가 731부대장으로 다시 돌아온 한 달 뒤인 1945년 4월이었다(연재 57 참조).

펠 조사관은 '그렇다면 핑팡의 731부대를 파괴하라는 지시를 누가 내렸는가' 물었다. 이시이는 이 질문에 대해서도 거짓 대답을 내놓았다. "핑팡 죽음의 공장을 파괴하라고 지시한 사람은 누군지 모른다. 1945년 8월9일 핑팡으로 돌아갔을 때 불길이 치솟고 있는 것을 봤을 뿐이다"(셸던 해리스, 444쪽).

그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미 본 연재에서 살펴봤듯이, 이시이는 1945년 8월9일 소련군이 만주 관동군을 공격해오자, '731부대 자료와 시설을 모두 파괴 소각한 뒤 철수하라'는 육군참모총장의 훈령을 받고 파괴·소각을 지휘했다. 경비행기를 타고 731부대 파괴 현장을 공중 촬영까지 마쳤다(연재 56 참조).

부하들, '과거사 침묵 어렵다' 협박하며 돈 요구

1947년 5월10일 세 번째 '심문'이 이어졌다. 그날 이시이는 "전쟁범죄자로 기소되지 않을 것이란 문서를 내놓지 않으면 펠 조사관의 심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않겠다"며 또 다시 신경전을 펼쳐 펠을 불편하게 했다. 그러면서 그 자신이 협박을 받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 무렵 이시이가 도쿄의 신주쿠 집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전 731부대원들에게도 알려진 상태였다. 전쟁 범죄자들의 피는 어딜 가나 드러나는 것일까, 전화나 편지로 협박을 하며 돈을 요구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한때 그의 부하였던 3명이 보낸 편지 내용을 보자.

"우리는 당신 때문에 잔인한 일을 해야 했다. 우리는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전쟁이 끝난 뒤 모든 걸 땅에 묻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부대장님의 자비를 빌 수밖에 없다. 불행한 우리들에게 돈을 좀 빌려주기 바란다"(셸던 해리스, 445쪽).

부하들은 731부대의 어두운 과거사에 대해 침묵하기가 어렵다면서 '돈을 빌려 달라'고 했다. 이시이의 눈에는 '입을 닫는 대가로 돈을 달라'는 협박이나 다름없이 비쳐졌다. 미국이 자신의 정보 가치를 탐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이시이는 그런 협박편지나 전화를 숨길 이유가 없었다. 맥아더사령부의 정보 담당(G-2)인 참모2부, 그에 연결된 미군 방첩대에다 협박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 뒤로 이시이의 2층 집 앞엔 사복 경찰들이 경비를 섰다.

펠 조사관, "생체 실험했던 것이 분명하다"

세 번째 '심문'을 하던 날 펠 조사관은 질문할 내용들을 메모장에 미리 적어갔다. 펠이 알고 싶었던 핵심은 이시이를 비롯한 '죽음의 의사'들이 살아있는 사람을 실험대상으로 삼아 세균실험을 실제로 했는가였다. 이 질문에 대해 이시이는 곧바로 시인을 하지 않았지만, 생체실험을 거치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정보들을 털어놓았다.

이를테면 △각기 다른 병원균이 (죽음으로 이르는) 최상의 효과를 낳는 적정투여량, △림프절 페스트로 실험대상을 감염시켜 그가 죽기 사흘 앞서 폐렴성 페스트로 상태가 악화되도록 만드는 기술, △콜레라균을 투입했을 때의 진행과정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이시이는 가장 중요한 세균전 자료는 탄저와 페스트, 그리고 전염성 뇌염이라 여겼다. 하지만 펠 조사관에게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털어놓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 '20년에 걸친 나의 연구를 자세히 적은 보고서를 제출하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그는 세균무기의 활용에 관한 전략 전술과 다양한 지형과 기후(특히 추운 날씨)에 맞는 세균무기 활용법에 대해서도 보고서에 담겠다고 했다.

그 무렵은 미국이 세균정보를 챙기면 731부대의 전쟁범죄를 추궁하지 않고 넘어갈 것이란 분위기였다. 하지만 워낙 의심이 많은 성격을 지닌 이시이의 머릿속은 과연 미국을 믿어도 될 것인가로 조금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소련이 아닌 미국에 협력하고 있다는 인상을 확실히 심어주면서도, '전범 면책 보증서'를 손에 쥘 때까지, 또는 적어도 미국의 분명한 '면책 결정'이 통보될 때까진 자신의 보고서 제출을 미루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 틀림없다.

펠 조사관은 도쿄 연합군총사령부 참모2부 정보책임자(G-2) 찰스 윌로비 준장 앞으로 올린 '보고서'에서, '이시이가 인간과 관련된 세균무기 실험에 대해선 별다른 (직설적인) 언급을 하진 않았어도, 그가 생체실험을 했던 것이 분명하다'고 보고서에 적었다(메릴랜드주 포트미드에 있는 미 육군 정보 안보사령부 소장 문서. 해리스 446쪽).

"인체실험 데이터의 가치는 엄청나다"

펠은 앞서 1,2차 조사관으로 파견됐던 이들에 견주어 엄청난 성과를 올렸다. 그들로부터 731부대가 살아있는 사람을 '마루타' 생체실험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들을 희생시켜 가며 얻어낸 세균전 자료들을 손에 넣었다. 19명의 731부대 세균 전문가들이 모두 합쳐 600쪽 분량의 연구 보고서를 내놓았다. 그들은 이를 다시 16쪽 짜리 영문 보고서로 만들어 펠에게 건네주었다. 현미경 사진과 슬라이드, 생화학무기의 개발 현황을 담은 연구보고서 등도 함께 제출됐다.

펠 조사관은 크게 만족했다. 미국에 돌아간 뒤인 47년 6월20일 펠 조사관은 위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일본군 세균전에 관한 보다 자세한 보고서('펠 리포트')를 제출했다. 마츠무라 다카오(松村高夫, 게이오대 명예교수)는 경제학자로는 드물게 731부대의 전쟁범죄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글들을 써왔다. 그가 게이오대학에서 펴내는 경제학 저널에 기고한 글을 빌려 펠 조사관의 마무리 과정을 요약해 보자.

[펠 리포트는 '세균전의 각종 병원체로 200명 이상의 (사람을 생체실험으로 죽인) 증례(證例)가 담긴 현미경 표본이 약 8000장 있고, 그 영문 리포트를 작성중'이라 했다. 펠 리포트는 또한 '중국 민간인과 병사들을 상대로 12차례 야외실험을 했다. 그 요약과 관련된 마을의 지도가 제출되었다'면서, 페스트균, 탄저균, 콜레라, 말 비저(馬鼻疽), 유행성 출혈열의 인체실험 데이터를 얻었다는 사실을 함께 기록했다](松村高夫, '731部隊による細菌戦と戦時·戦後医学', 三田学会雑誌, Vol.106, No.1, 2013).

'펠 리포트'는 △대인 공격 세균무기 △농작물을 겨냥한 세균무기 △중국인들을 세균무기로 공격한 현장 실험 △가축을 겨냥한 생물무기 △병리학적 연구 등 모두 5개 주요항목을 나열하고 있다. 펠의 보고서 결론 부분을 보자.

[일본군이 연구한 세균무기 병원체 가운데 (대량 살생에) 유효한 것은 탄저균과 페스트균이었다. 일본인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나는 믿지만, (일본인들이 내놓은) 모든 연구 보고서를 분석한 뒤 일본인에게 묻고 싶은 더 심도 깊은 질문이 나올지도 모른다. 인체실험에 관한 데이터는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녔다. 미국이나 미 동맹국들에서는 동물 실험에 의해서만 이런 데이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얻은 정보는 우리의 연구에 매우 도움이 되며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은 확실하다](靑木富貴子, 416-417쪽).

▲ 1947년 7월17일 도쿄 연합군사령부 정보 책임자 찰스 윌로비 준장이 워싱턴 합동참모본부의 정보 책임자 챔벌린 소장에게 보낸 기밀 문서. 3차 조사관 노버트 펠이 세균정보를 얻는 데 쓴 비용이 15만~20만 엔을 넘지 않았다고 밝혔다. ⓒ미 국립문서보관소

"들인 비용은 15만~20만 엔 넘지 않았다"

여기서 일본의 침략전쟁과 전쟁범죄를 비롯한 어두운 과거사를 밝혀내고 사죄와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일본의 사학자 츠네이시 케이이치(常石敬一)가 떠오른다. 2023년 79세에 타계한 츠네이시는 가나자와(神奈川)대학에서 과학사를 전공했고, 일찍이 731부대의 전쟁범죄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선구적인 연구자였다.

츠네이시는 1981년 <사라진 세균전 부대>(消えた細菌戦部隊-関東軍第731部隊, 海鳴社)란 제목의 연구서를 써냈다. 이 책의 요점은 731부대가 생체실험이란 끔찍한 방법으로 세균무기를 개발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을 희생시켰다고 비판했다. 그의 책은 그때껏 731부대의 흑역사를 잘 모르던 많은 일본 시민들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뒤로도 줄곧 731부대의 전쟁범죄를 추적하던 츠네이시는 2005년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기밀문서 하나를 찾아냈다. 그것은 1947년 7월17일 도쿄 연합군사령부 참모2부장으로 정보(G-2) 책임자였던 찰스 윌로비 준장이 (펠 조사관의 일본 세균전 조사 결과를) 미 합동참모본부의 정보 책임자 S.J. 챔벌린 소장에게 보고한 문서였다. 재일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리드가 쓴 글('미국과 일본인 멩겔레')에서 문서 내용을 보자.

[인간 실험에 대한 자료는 매우 귀중할 수 있다. 병리학적 연구는 백신을 개발하는 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정말로 중요한 연구 결과들은 일본 최고의 병리학자들을 상대로 아주 세련된 심리학적 접근을 통해서 얻어낼 수 있었다. 그동안 들인 비용은 직불금, 현물 지급(음식, 다과, 오락), 호텔 요금을 합쳐 15만~20만 엔을 넘지 않았다. (이런 저렴한 비용으로) 미국 연구소에 머물면서 20년 동안의 연구를 해온 것과 같은 결실을 얻게 됐다].(Christopher Reed, The United States and the Japanese Mengele. The Asia-Pacific Journal: Japan Focus, Volume 4, Issue 8, 2006년 8월).

도쿄의 미군 지휘부는 물론 워싱턴의 미 합동참모본부도 '펠 리포트'를 읽고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의 세균 전문가들로부터 세균전 정보를 얻어낸 데 대해 크게 만족했다. 재일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리드가 글 제목에 쓴 '멩겔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음의 천사'로 악명 높았던 나치 친위대(SS) 소속 군의관 요제프 멩겔레 대위를 가리킨다. 그 멩겔레보다 훨씬 더 잔혹했던 '악마의 의사'들이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 군의관들이었다(본 연재 52 참조).

이제 글을 마쳐야겠다. 1947년 10월 4차 조사관으로 파견된 에드윈 힐(데트릭 세균연구소 기초과학부 주임)은 전임 조사관들보다 훨씬 편했다. 힐은 앞서 다녀간 3명의 조사관들처럼 '전범 기소되는 것을 막아주겠다'는 말도 꺼낼 필요 없었다. 미국에 협력한다면 전쟁범죄자로 넘기지 않을 것이란 소문이 사실로 굳어지자, 731부대 간부들이 제 발로 찾아와 세균전 실험 자료들을 내놓았다.

다음 주 글에선 이시이 시로에 이어 731부대장에 올랐던 기타노 마사지(北野政次, 1894-1986) 군의중장이 미 조사관들과 어떤 식의 만남을 가졌는지와 더불어, 4차이자 마지막으로 파견된 에드윈 힐 조사관과 731부대 '악마의 의사들'이 주고받은 '더러운 거래'의 내용과 문제점을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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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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