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걸하듯 정보달라던 미 조사관에 "생체실험은 없었다" 농락한 '악마의 의사'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59] 생체 실험과 세균 전쟁 ⑧

"지고 있는 전쟁에선 세균무기를 쓸 필요가 없다. 효과적으로 사용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세균무기 개발에는 인력이나 돈과 재료가 많이 든다. 게다가 세균무기를 큰 규모로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작은 규모로는 효과적일 수 있다"(靑木富貴子, <731 石井四郞と細菌戰部隊の闇を暴く>, 新潮社, 2008, 289쪽).

위에 옮긴 글은 전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1892-1959, 군의중장)가 아보 톰슨 미군 중령(수의학박사)의 심문을 하면서 했던 말이다. 톰슨 중령은 731부대의 세균정보를 얻기 위해 미국이 4차에 걸쳐 보낸 조사관 가운데 2번째 조사관이다. 심문은 1946년 2월5일과 6일에 걸쳐 도쿄 신주쿠에 있는 이시이의 집으로 이뤄졌다.

"지고 있는 전쟁에 세균무기 쓸 필요 없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일본계 미국인 통역관은 50대의 전 일본 육군 군의중장이 30대의 미군 중령에게 아주 편안한 말투로 '세균전 강의'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이시이는 당시 54세, 톰슨은 30대 후반 나이였다. 나이로나 경력으로나 이시이가 톰슨을 가볍게 여길 만했다. 실제로 톰슨은 이시이에게 농락당했다. 톰슨은 심문이 끝날 때까지 '만주에서 생체실험을 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고 도쿄를 떠났다.

(이시이 심문 속기록은 원본은 메릴랜드주 데트릭 기지의 문서보관서에, 복사본은 미 유타주 더그웨이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데트릭 기지와 마찬가지로 더그웨이에는 거대한 미 생물·화학전 기지가 자리 잡고 있다. 지난 2015년 주한미군 오산 공군기지에 '살아있는 탄저균' 택배 배달사고를 일으켜 온 국민을 놀라게 했던 곳이다).

731부대는 세균무기를 만든답시고 조선의 독립투사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생체 실험으로 죽였다. 20세기 최악의 전쟁범죄 집단으로 꼽혀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지고 있는 전쟁에선 세균무기를 쓸 필요가 없다'고 한 이시이 시로의 말은 그가 전쟁의 냉혹한 특성과 세균전의 한계를 뒤늦게나마 제대로 보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많은 사람들은 궁금해 했다. 1945년 3월 일본 육군 참모본부 강경파들이 이시이 시로를 중장으로 승진시켜 다시 만주 731부대로 내보냈는데, 왜 전쟁 막판에 세균무기를 쓰지 않았을까. 이시이의 위 말은 그 답을 내놓고 있다. 이시이의 지적대로, 세균무기는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 수단은 못 된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처음 독가스를 썼고, 이어 영국과 프랑스 쪽에서도 독가스를 뿌렸다. 그로 말미암아 7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지만, 참호를 깊게 파고 적과 얼굴을 마주 바라보는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 1946년 1월1일 새해를 맞아 731부대원들의 모임에 나타난 이시이 시로. 그 무렵 이시이는 도피생활을 끝내고 세균전 정보를 얻으려는 미국의 심문에 대비하고 있었다. ⓒAising

전쟁이 몇 년 더 이어졌다면...

제1차 세계대전이 잘 보여준 것처럼, 세균무기를 쓴다고 전세가 뒤집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패전을 코앞에 두고 탄저균이나 페스트 같은 세균무기를 뿌린다면, 득보다 실이 크다. 전쟁이 끝난 뒤 패자가 서야 할 전범재판에서 전쟁범죄의 주요 항목을 하나 더 덧붙일 뿐이다. 패색이 짙어가던 1945년 초여름 '히로히토 일왕을 지키는 1억 옥쇄(玉碎)'도 마다하지 않겠다던 일본의 전쟁광들이 막판에 제정신을 차린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

냉정하게 본다면, '지고 있는 전쟁에선 세균무기를 쓸 필요가 없다'는 말도 교활한 이시이 시로가 패전 뒤에 내놓은 꿰맞추기 논리다. 그가 731부대장으로 다시 복귀했던 1945년 3월은 이미 전쟁의 운동장이 기울어 있었다. 누가 봐도 일본의 패배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본 육군참모본부의 강경파들은 전세를 뒤집을 비장의 카드로 731부대의 세균전 능력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며 이시이를 중장으로 승진시키며 만주로 보냈다.

따라서 위의 이시이의 말은 상황이 다 끝난 뒤의 넋두리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만에 하나,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지지 않고 소련군이 만주 관동군을 공격하는 일이 없이 전쟁이 몇 년 더 이어졌다면, 이시이는 좀 더 살상력 높은 세균무기로 많은 희생자를 냈을 것이다.

4차에 걸쳐 조사관 파견

미국은 731부대의 세균전 정보를 캐내려고 모두 4차례에 걸쳐 조사관을 파견했다. 1차는 1945년 8월말 머레이 샌더스 중령, 2차는 1946년 2월 아보 톰슨 중령, 3차는 1947년 4월 노버트 펠(데트릭 세균연구소 예비실험부 주임), 4차는 1947년 10월 에드윈 힐(데트릭 세균연구소 기초과학부 주임). 그들의 공통점은 미 메릴랜드에 있는 데트릭 기지(Camp Detrick) 세균연구소의 박사급 전문 인력이었다.

미 조사관들은 짧게는 2개월가량의 출장 기간 동안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 관련자들을 만나 세균전 정보를 얻어내려 애를 썼다. 이들이 전쟁범죄자임이 너무나 분명한 731부대 간부들을 만날 때마다 '당신을 전범으로 기소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세균전) 자료를 얻기 위해서 만나는 것'이라며 안심시키기 바빴다.

이시이 시로 일당은 서로 긴밀한 연락을 주고 받으며 대응책을 세워나갔다. 어떤 것은 말해도 되고 어떤 것(이를테면 '마루타' 생체실험 사실)은 숨겨야 한다며 입을 맞추었다. 조사관들이 겉으로는 듣기 좋게 '전범 불기소'나 '면책' 카드를 꺼내더라도, 그들이 바라는 세균 정보를 다 얻고 나면 언제 감옥으로 끌고 가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기에 잔뜩 경계를 했다. 이시이 일당은 자신들이 저질렀던 '잔혹한 마루타 학살'이 도쿄 전범재판에서 말하는 '반인도적 전쟁범죄'(war crimes against humanity)임을 잘 알고 있었다.

"세균전 정보는 전쟁범죄 증거로 못 쓴다"

하지만 이시이 일당이 미국의 속뜻을 알았다면, 그리 경계나 긴장을 하지 않았어도 됐다. 미국은 적극적으로 그들을 처벌할 뜻이 없었다. 1947년 8월 미 워싱턴의 국무·육군·해군 삼부조정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SWNCC)는 731부대의 전쟁범죄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아래와 같은 문안을 만들었다.

[일본 세균전 데이터의 가치는 '전쟁범죄'로 기소해 처벌하는 것보다 미국의 안전보장에 훨씬 중요하다.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일본 세균 전문가들을 전쟁범죄자로 만들고, 그들의 정보를 다른 국가가 갖도록 만드는 것은 이로운 판단이 아니다. 일본인으로부터 얻은 세균전 정보는 '첩보 수준'으로 묶어두고 '전쟁범죄의 증거'로 사용해선 안 된다](靑木富貴子, 435-436쪽).

위 문장에서 '다른 국가'란 소련을 가리킨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데도 동서 냉전 논리가 배어 있는 문장이다. SWNCC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11월 미 국무부와 군부 사이의 정책조정을 위해 만들어졌고, 나중에 국가안전보장회의(NSC)로 발전한 협의기구 기구다. 미국 워싱턴의 국무부나 군부, 도쿄의 연합군최고사령부(SCAP 또는 GHQ)는 731부대의 전쟁범죄 처벌보다는 그들이 지닌 세균전 정보의 가치를 더 높이 샀다.

미국이 전쟁범죄자들에게 '정보를 넘기면 처벌하지 않겠다'는 면책(免責) 보증문서를 주지는 않더라도, 이들을 도쿄전범재판(극동국제군사제판)의 피고석에 세우지 않는다는 사실은 갈수록 분명해졌다. 말로는 민주주의와 인도주의를 앞장 서 실천한다는 미국이 전쟁범죄자들의 피 묻은 손을 맞잡고 더러운 거래에 뛰어든 모습이었다. 그때 막 시작되던 동서냉전의 구도 아래 '국가의 안전보장'을 지킨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고 말이다. 이제부터 그 '더러운 거래' 과정을 보자.

▲ 1945년 8월 만주 관동군으로부터 빼앗은 일장기를 들고 있는 소련군. 이시이 시로는 ‘일본군이 지고 있었기에 소련군을 상대로 효과적인 세균전을 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러시아대사관

빈손으로 돌아간 1차 조사관 샌더스

1945년 8월30일 머레이 샌더스 중령(세균학박사, 1910년생)이 1차 조사관으로 요코하마 항구에 발을 디뎠다. 연합군 총사령부 참모 2부장(정보 담당) 찰스 윌로비 소장은 샌더스에게 4명의 병사와 함께 군용 지프차 2대를 내주었다. 샌더스는 2개월 가량 일본에 머물며 세균전 정보를 수집하려 했으나, 곧 벽에 부딪쳤다. 누구보다 핵심인물인 이시이 시로를 만나지 못했다.

샌더스 조사관이 일본에 온 지 열흘쯤 뒤인 9월11일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A급 전범 39명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바로 그날 도조 히데키의 권총자살 미수사건이 벌어졌다(연재 36 참조). 일본의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에는 '포로를 학대한 자를 포함한 전쟁범죄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 조항이 들어 있었다. 만주에서 돌아온 731부대원들에겐 긴장의 나날이었다. 언제 미군 헌병이 들이닥쳐 체포를 해도 놀라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 무렵 이시이도 이곳저곳 은신처를 옮겨가며 숨어 지냈다.

이시이가 샌더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지난 2005년 재미 일본 작가 아오키 토미키코(靑木富貴子)가 이시이의 고향 마을 카모(加茂)에서 찾아낸 이시이의 비망록 <1946-1-1>에도 쓰여 있다(연재 58 참조). 그 비망록에는 샌더스의 이름이 여러 군데서 나온다. 특히 '(샌더스는) 학술적 연구를 수집할 뿐이다'라는 표현은 이시이가 샌더스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궤뚫어 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세균전 정보를 얻으러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몸조심이 먼저인 이시이는 잠행을 거듭했다.

이시이 못 만나고 쓴 허술한 보고서

샌더스 중령은 이시이가 일본에 돌아오지 못하고 만주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여겼다. 이시이 일당은 그런 샌더스의 동태를 멀리서 조심스레 지켜봤다. 샌더스는 731부대 핵심 간부들을 만나지 못했다. 다만 이시이 시로가 한때 일했던 도쿄 육군군의학교의 방역연구실장, 세균학교실장 등 대령급 군의관 두 사람을 만나 간접적인 이야기만 들었다. 이 두 일본 군의관들은 "우린 세균전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 방어 측면에서 백신 개발을 해왔다"면서 몸을 사렸다.

1945년 11월 미국으로 돌아간 샌더스는 '일본에서의 과학정보조사 보고서'(이른바 '샌더스 리포트')를 써냈다. 그의 상관들의 눈에도 보고서 내용이 부실해 보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군은 1936년부터 1945년 사이에 공격적인 세균전을 준비했고, 그 규모는 매우 컸다고 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계획하고 실행한 전반적인 군사작전 가운데 세균전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소규모 작전'에 지나지 않았다고 썼다.

샌더스 보고서의 결론은 '일본군이 세균전을 준비하고 실제로 세균무기를 쓰긴 했지만 피해가 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피해 상황에 대한 서술도, 생체실험이나 세균전 자료도 없었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보고서였다. 2개월의 짧은 출장 일정 동안 샌더스로선 최선을 다하려 했겠지만, 이시이 시로를 싸고도는 음험한 인간들과 거리를 좁히지 못한 결과였다.

2차 조사관 톰슨 중령, 이시이 만나다

1946년 2월 같은 데트릭 세균연구소의 아보 톰슨 중령이 샌더스 중령에 이어 2차 조사관으로 일본에 왔다. 2개월쯤 일본에 머물렀던 톰슨 조사관은 전임자 샌더스에 견주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도쿄에 오자말자 731부대의 두 번째 부대장(1942년 8월-1945년 3월)을 지낸 기타노 마사지(北野政次, 1894-1986, 군의중장)를 만나 심문했고, 이어 이시이 시로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기타노 마사지에 대해선 다음 주 글에서 살펴봄).

메릴랜드주 데트릭 기지의 문서보관서에 있는 톰슨 중령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시이 심문은 1946년 1월22~2월 25일 사이에 도쿄 신주쿠의 이시이 집에서 이뤄졌다. 만성 담낭염과 이질을 앓고 있다는 핑계를 내세워 이시이는 미군 사령부의 조사실로 출두하지 않았다(그 무렵 맥아더사령부에서 보낸 의사가 살펴보니, 이시이의 건강상태는 좋았다). 이시이의 딸 하루미가 1980년대에 일본 언론인과 가졌던 인터뷰에 따르면, 톰슨 중령은 이시이에게 세균전 정보를 달라고 구걸하듯이 머리를 조아렸다.

"톰슨은 스스로를 '트루먼 대통령의 밀사'라고 소개하면서 세균무기에 관한 극비 데이터를 갖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말 그대로 조르고 있었어요. 동시에 그는 그 극비 데이터가 소련의 손에 잡히지 않도록 하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어요"(靑木富貴子, 292-293쪽)

1946년 2월5일에 있었던 이시이 심문 기록을 보자. 톰슨은 먼저, 육군군의학교(도쿄)와 731부대(하얼빈 외곽 핑팡) 말고는 세균전 연구가 없었지를 물었다. 이시이는 "육군군의학교는 일반적인 예방의학을 맡았고, 세균전 연구는 오로지 핑팡에서만 했다"고 답했다. 이시이의 출신 학교인 교토제국대학 연구실에서도 세균전 연구는 없었다고 했다. "그곳 선생들은 이런 연구를 싫어한다. 그래서 아무런 연구도 없었다"고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러자 톰슨은 가장 알고 싶어 했던 사항을 물어봤다. '731부대가 세균전을 펼친 것이 사실이냐'는 물음이었다. 돌아온 것은 거짓 답변이었다.

"731부대 안에서든, 731부대 바깥에서든, 아무 것도 모르는 자들이 731부대가 비밀스레 세균전을 벌였다느니 뭐니 하는 소문을 퍼트렸다. 우리 부대(731부대)가 세균전 공격을 벌이고 대량의 세균을 만들고 거대한 (세균)폭탄을 만들었고, 그걸 뿌리려고 비행기를 모았다는 것은 잘못된 소문이다. 그걸 바로잡고 싶다"(靑木富貴子, 288쪽).

이시이는 오히려 소련과 중국이 세균무기를 썼다고 우겼다. 이시이는 소련군이 페스트·탄저·콜레라 등 세균무기로 관동군을 공격할지 몰라 두려웠다고 주장했다(실제로 벌어진 일은 그 반대였다. 1939년 5월에서 8월에 걸쳐 관동군은 국경지대인 할하강에서 소련군과 전투를 벌였다(할힌골 전투). 그 전투에서 일본군이 밀리자, 731부대는 1939년 7월 장티푸스균이 들어있는 드럼통 20~30개를 그곳 강 상류에 던져 넣는 등 3차에 걸쳐 세균무기를 뿌려댔다).

▲ 1937년 11월 중국 상하이를 공격하는 일본군 병사들. 방독 마스크를 쓴 모습은 독가스로 중국군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위키미디어

이시이, "아주 작은 규모로 세균전 연구했다"

톰슨은 '세균무기가 앞으로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보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시이는 (이 글 맨 앞부분에서 살펴봤듯이) '지고 있는 전쟁에선 세균무기를 쓸 필요가 없다'고 답하면서 자신의 세균전쟁론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톰슨이 '그렇다면 특정 조건에서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말인가' 하고 묻자, 이시이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아마도 그는 위의 할힌골 전투나 중국에서 페스트균을 몰래 뿌린 일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런 문답들이 오고간 뒤 톰슨은 이시이로선 감추고 싶은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다. "세균무기 개발을 위해 인간의 피가 쓰였는가?" 다시 말해, '생체실험을 했느냐'는 물음이었다. 이시이는 애매한 답변으로 톰슨의 질문을 비껴갔다. "우리의 임무는 (일본)병사를 지키는 것이다." 전염병을 막고 깨끗한 물을 정화시켜 병사들에게 공급한다는, 731부대의 대외 위장명칭인 방역급수부의 임무를 톰슨에게 녹음기 틀듯이 들려주었다.

그런 뻔한 말을 듣던 톰슨은 이시이를 빤히 쳐다 보면서 '세균전 실행을 지시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어봤다. 교활한 이시이는 '명령서도 없고 상부의 지원도 없이 아주 작은 규모로 세균전 연구를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지난 글(연재 55)에서 살펴봤듯이, 1940년 6월4일 만주 눙안(農安)에 독극성이 강한 페스트균 무기(PX) 5g를 극비리에 뿌렸다. 1940년 9월18일부터 10월7일 사이에 6회에 걸친 페스트균 공격이 저장성(浙江省) 주요도시인 닝보(宁波), 진화(金华) 등지에서 이뤄졌다. 이런 못된 페스트균 공격이 이시이의 표현대로라면 '아주 작은 규모로 세균전 연구를 했다'는 것인가.

"마루타 생체실험 없었다"고 톰슨 속여

톰슨은 1946년 2월25일 심문을 마칠 때까지 2~3일 터울을 두고 모두 8차례 만났다. 맥아더 사령부의 정보(G-2) 담당인 제2참모부 소속으로 추정되는 영관급 장교들과 함께 이시이 집에서 일본식 불고기(스키야키)로 식사를 하기도 했고, 톰슨이 미국으로 돌아갈 무렵엔 환송연을 열어주었다.

겉으론 얼굴에 웃음기를 띠고 있었지만, '악마보다 더한 살인귀 집단의 수괴'로 음험한 성격을 지닌 이시이는 톰슨을 내내 속였다. 헤어질 때까지도 '마루타 생체실험'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데트릭 기지로 돌아가 톰슨이 쓴 '일본의 생물전 연구준비에 관한 보고서'(1946년 5월31일)는 기지 문서보관서에 극비로 분류돼 있다가, 1978년에 공개됐다. 그 주요내용은 이러하다.

[△일본군은 세균 공격과 방어에 대해 광범위한 연구를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활동에 사용했다. △일본 육군의 세균 연구와 개발은 주로 이시이 시로 중장의 영향과 지휘를 받았다. △세균전쟁에 응용할 수 있는 장티푸스, 콜레라, 적리, 탄저, 말 비저, 페스트, 파상풍, 기포성 괴저 등 병균과 바이러스 및 리케차(발진티푸스 등 병원체)를 만들어냈다. △가장 효과적인 세균살포의 방법을 발전시키기 위해 연구의 중점을 세균폭탄에 두었다](궈청저우, 랴오잉창,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의 세균전 실록>. 베이징 연산출판사, 457-458쪽. 진청민, <일본군 세균전>, 청문각, 2010, 912쪽에서 재인용).

톰슨은 이시이 시로 말고도 기타노 마사지(이시이의 731부대 후임자) 등 731부대 핵심 지휘관들을 만나 심문을 했다. 그러나 731부대 관련자들은 모두 '생체실험은 없었다'거나 '세균전도 걸음마 단계였다'고 톰슨을 속였다. 그로 말미암아 톰슨은 보고서에서 731부대의 세균전 능력을 저평가하는 결론을 내렸다.

[공격적인 세균전을 발전시킨 것과 관련하여 731부대의 일부 행위에 대해선 관심을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본은 아직 세균무기를 사용할 능력을 절대 갖추지 못했다](진청민, 909쪽).

분명히 잘못된 결론이었다. 731부대는 중국 농촌이나 도시들을 겨냥한 세균전을 펼쳐 많은 피해를 안겼다. 하지만 이시이 등은 그런 사실들을 감추거나 줄여 말함으로써 톰슨의 판단을 흐렸다. 일본이 세균무기를 실용화시킬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톰슨 보고서의 결론은 실제 상황을 정확히 짚은 게 아니었다.

물리학자 콤프턴, "뭔가 입을 맞춰 숨기려 한다"

두 명의 세균 전문가를 일본으로 보냈지만, 미국은 731부대의 세균전 비밀을 제대로 캐내지 못했다. 미 전문가들은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의 간부들이 서로 입을 맞춰 불리한 내용은 입을 닫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1차 조사관인 샌더스 중령은 물론, 2차 조사관인 톰슨 중령도 그런 생각을 품었다.

칼 콤프턴(1887-1954)은 미 매사추세츠 MIT 학장을 지낸 당대의 이름난 물리학자였다. 1차 조사관 샌더스가 일본에 머물던 1945년 10월, 콤프턴은 아시아·태평양전쟁 중에 일본이 개발했거나 (초보 단계에서 끝난 핵무기 개발 움직임 등을 비롯해) 개발을 꾀했던 군사기술을 알아내려는 학문적 호기심으로 일본에 왔었다.

콤프턴이 만난 일본 과학자들은 한결같이 공격용 세균무기를 개발하려거나 실험한 적이 없다고 우겼다. 그런 주장에 콤프턴은 의심을 품었고. 그들이 뭔가 숨기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731부대의 전쟁범죄를 고발한 미 역사학자 셸던 해리스의 글을 보자.

[콤프턴은 일본 과학자들이 생물무기(BW) 연구사실을 뺀 나머지 분야에 대해선 열성적으로 자신들의 업적을 알리고 싶어 한다고 느꼈다. 일본 과학자들의 이런 태도에 대해 콤프턴은 동료(학자)들에게, 일본과학자들은 자신들끼리 회의를 열어서 '그 분야에 대해선 절대 말하면 안 돼'라고 합의한 것처럼 행동한다고 말했다](셸던 해리스, <일본의 야망과 죽음의 공장>, 눈과마음, 2005, 429쪽)

물리학자 콤프턴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세균전 공격이 있었다거나 '마루타' 생체실험이 되풀이됐다는 사실을 731부대 간부들은 좀처럼 털어놓지 않았다.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악마의 전범집단'은 도쿄 전범재판(1946년 5월 첫재판)의 진행상황을 지켜보며 자유롭게 지냈다. 그러면서 미국이 오로지 세균전 정보에 목말라 있고 자신들을 처벌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아챘다. 그러면서 이들이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은 1947년 넘어서였다.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을 것이란 전제 아래, 731부대 군의관들은 3차, 4차 조사관들에게 저마다 세균전 실험 자료들을 내놓았다. '전쟁범죄 불기소'와 '피 묻은 세균전 정보'를 맞바꾸는 거래는 1947년 말 731부대 '악마의 의사들'과 미국 둘 다 만족스럽게 매듭 됐다. 미 조사관들이 세균전 자료를 얻기 위해 쓴 돈은 (자료의 가치에 견주어) 너무 적게 들었다. 3차 조사관 노버트 펠은 15~20만 엔, 4차 조사관 에드윈 힐은 25만 엔을 썼다고 보고했다. 다음 주에 이 '더러운 거래'의 내막을 독자들과 함께 들여다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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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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