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조사관 "단돈 25만엔으로 피묻은 일본 세균전 자료 챙겼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58] 생체 실험과 세균 전쟁 ⑦

"내가 알기로는 아버지가 미국과 거래를 한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는 미국 쪽에서 아버지를 찾은 것이지, 절대 아버지가 (미 점령군을) 찾아간 것은 아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버지의 부하들은 그 어느 누구도 전쟁범죄자로 재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石井春海, <英文時報> 1982년 8월29일 12면. 진청민 <일본군 세균전>, 청문각, 2010, 908쪽에서 재인용).

위에 옮긴 글은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1892-1959) 군의중장의 맏딸 이시이 하루미(石井春海, 1925년생)가 1982년 일본 패전 37년을 맞이할 무렵에 했던 인터뷰다. '악마의 부대' 수괴의 딸이 아버지를 편들면서, 731부대원들이 도쿄 전범재판(정식 이름은 극동국제군사재판)의 피고석에서 전쟁범죄자로 처벌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아버지 덕분이라는 점을 내세우는 글이다.

하루미는 일본 언론과의 또 다른 인터뷰에서 아버지 이시이가 "한 사람도 전범이 돼서는 안된다. 부하들을 모두 (전범 처벌 위기로부터) 구하는 것이 (세균전 정보를 건네는) 조건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도 밝혔다. 731부대원들도 이시이가 이렇게 큰 소리 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내가 너희들을 다 구해줬다"(靑木富貴子, <731 石井四郞と細菌戰部隊の闇を暴く>, 新潮社, 2008, 438쪽 참조).

미국이 이시이 시로가 감춰둔 '피 묻은 세균전 정보'를 챙기고 그 보답으로 731부대원들의 전쟁범죄를 덮고 눈감아주는 '거래'를 먼저 제안했다는 딸 하루미의 말은 사실이다. 자식이 아버지를 편드는 것도 이해해줄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20세기에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만큼이나 사악한 범죄를 저질렀던 731부대장이 그의 아버지라면, (731부대의 생체실험으로 숨진 희생자 유족들의 아픔을 배려해서라도) '더러운 거래'에 대해선 그냥 입을 닫는 게 바람직할 듯하다.

▲ 1945년 3월 군의중장으로 승진했을 때의 이시이 시로 모습. 일본 패전 뒤 ‘마루타’의 피가 묻은 세균전 자료를 미국에 넘겨주는 대가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위키미디어

"단돈 25만 엔으로 세균전 자료 챙겼다"

미군은 일본과 한창 태평양전쟁을 벌이던 무렵인 1943년 4월15일 미 매릴랜드주 프레더릭 시에 있는 데트릭 기지에 세균전 연구소를 만들었다. 미국은 그 무렵 일본군이 731부대를 중심으로 중국에서 세균전을 펼친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고, 미군이 세균전의 피해가 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던 시점이었다.

특히 미 정보 당국은 이시이 시로가 세균무기 개발의 주역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난 뒤 이시이가 그동안 많은 마루타들을 생체실험하면서 축적한 연구 성과물을 얻어내고 싶어 했다. 그리고 실제로 얻어냈다. 전쟁범죄를 덮어준다는 조건으로.

[이번 조사에서 수집된 사실은 이 (세균전) 분야에서의 지금까지의 전망을 크게 보강하는 것이다. 이 데이터는 일본인 과학자들이 거액의 비용과 오랜 세월에 거쳐 입수한 것으로, 인간 감염에 필수적인 각 세균의 양(量)에 관한 정보이다. 이런 정보는 인체실험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우리 연구실에서는 알아낼 수 없다. 이런 데이터를 얻기 위해 (조사팀이) 오늘까지 들인 총액은 25만 엔이다. 이 비용은 이 연구의 가치에 견주면 아주 작은 액수일 뿐이다] (靑木富貴子, <731 石井四郞と細菌戰部隊の闇を暴く>, 新潮社, 2008, 438쪽).

위에 옮긴 글은 세균전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미국이 일본에 보냈던 마지막 조사관 에드윈 힐(미 메릴랜드주 데트릭 기지의 생물학전연구소 과학기술부장)이 1947년 12월12일에 제출한 보고서다. 힐은 '이번에 우리가 수집한 병리학 자료는 생체실험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자료'라 했다. 미국은 모두 4차에 걸쳐 세균학 또는 수의학 박사 학위를 지닌 세균 전문가를 조사관으로 파견했다. 계급이 영관급인 조사관들은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원 핵심분자들을 두루 만났다(다음 주 글에서 좀 더 살펴봄).

그 만남은 전쟁범죄자를 엄하게 심문했다기보다는 '세균 전문가인 일본 과학자'를 인터뷰를 하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분위기도 딱딱하지 않았다. 이시이 시로의 경우는 대부분이 도쿄 신주쿠의 이시이 집에서 만났다. 심지어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이불을 덮고 누운 채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소련 조사관, 이시이 만났지만 빈손으로 돌아가

1947년 5월 소련 조사관이 찾아왔을 때는 몸이 멀쩡한데도 아픈 척 누워 있었다. 소련은 포로로 잡은 731부대원들을 시베리아에서 심문하면서 생체실험과 세균전을 펼친 이시이의 전쟁범죄 혐의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이시이 심문은 전범 조사를 구실 삼아 좀 더 고급정보를 끌어내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소련 조사관은 1947년 5월부터 6월에 걸쳐 5차에 걸친 자택 심문을 했으나, 이시이의 뻔뻔스런 대응에 빈손으로 돌아갔다.

미군 조사관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그런 모습을 즐겼을 것이다. 이시이는 세균전 정보를 소련에게 내줄 마음이 없었다. 미국도 이시이가 갖고 있는 정보가 소련에 넘어가길 바라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1945년 11월20일엔 이시이 집에서 6명의 영관급 미군 장교들이 일본식 전골(스키야키)를 즐기는 등 가까이 지냈다. 이시이는 조사 임무를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사람에겐 환송회를 열어주었다.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자들이 유대인 학살 정보나 히틀러 권력 핵심부의 비밀스런 내막을 알고 싶어 안달하는 연합군 점령자들과 형량 거래를 하면서 접대 모임을 열어주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그런 영화 속 이야기 같은 일들이 1945년 가을부터 1947년 가을까지 일본에서 벌어졌다.

흔히 '민주주의와 인권의 나라'라고 주장하는 미국이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는 처벌하고, 일본에선 전쟁범죄의 성과물(세균전 정보)을 챙기고 범죄자들을 눈 감았다. 그런 이중 잣대는 20세기 최악의 전쟁범죄를 덮으면서까지 앞날의 세균전에 대비하고 생물학전 능력을 강화하려는 강대국의 맨얼굴을 떠올린다(6.25 한국전쟁을 비롯한 여러 전쟁에서 미국은 세균전을 펼쳤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에 대해선 따로 살펴볼 예정이다).

'이시이가 죽었다'는 위장 장례식

이시이 시로 731부대장(군의중장)이 생체 실험용으로 쓰려고 마지막까지 잡아두고 있던 40명의 '마루타'를 독가스로 죽이고 불 태워 묻은 것은 지난 글에서 살펴봤다(연재 56). 1945년 8월22일부터 26일 사이에 군용기를 타고 일본 도쿄에 가까운 아쓰기(厚木) 또는 타치카와(立川) 공항에 내린 이시이는 곧장 잠행에 들어갔다. 그 무렵 이시이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장례식을 치렀고 신문에 부고도 실렸다는 얘기였다.

사기꾼들이 자신의 죽음을 거짓으로 꾸며 사법기관과 피해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들이 있다. 거액의 보험상품에 든 뒤 해외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며 보험금을 타내려는 따위다. '사기의 달인' 조희팔(1957-2011?)도 위장 장례를 치렀다는 의심을 받는다. 그는 2008년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다단계 사기(경찰 추산 피해액 3조 5000억 원, 피해자 3만 명)를 저지르고 밀항선을 탔다. 3년 뒤 중국에서 심근경색으로 죽었다며 장례식 동영상이 나왔다. 많은 피해자들은 '위장 장례 사기'일 걸로 여긴다.

이시이 시로가 교활하다는 사실을 새삼 드러낸 일화가 위장 장례설이다. 당시 떠돌던 소문을 요약하면 이렇다. 1945년 11월10일 도쿄 나리타 공항에서 가까운 치바현 카모(加茂) 마을에선 이시이의 장례식이 벌어졌다. 그곳은 이시이의 고향마을로, 저승으로 떠나는 이시이 유족들은 향을 피우며 넋을 달랬다. 신문에 사망사실을 알리는 부고도 실렸다.

이시이 사망설은 곧 헛소문으로 드러났다. 1946년 1월6일자 미군 기관지 <성조지>엔 '정보원에 따르면, 이시이는 촌장의 주선 아래 위장 장례식을 치렀다고 한다'라는 짤막한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시이가 본인의 위장장례식을 꾸몄다는 게 사실이라면, 지난날 숱한 '마루타'들을 죽이면서 그는 인간의 마지막 길인 죽음조차도 이용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늘 해왔던 것일까.

이시이와 731부대 일당은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심각한 정도를 잘 알고 있던 터라 몸을 숨겼다. 이시이는 고향집이 있는 카모 마을이나 몇몇 곳으로 옮겨 다니며 잠행을 거듭했다. 이시이의 딸 하루미가 훗날 일본 언론인들에게 한 얘기로는, 카모 마을에 머물던 어느 날 한밤중에 731부대 부하들이 승용차를 타고 와 어디론가 급히 떠났고, 그 뒤로도 머무는 곳을 자주 바꾸었다고 했다.

▲ 맥아더 장군이 1945년 9월2일 미주리 전함에서 일본의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모습. 맥아더는 히로히토 일왕은 물론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도 처벌하지 않았다. ⓒUnited States Navy

부하들과 함께 세균자료 감추다

재미 일본 작가 아오키 토미키코(靑木富貴子)는 이시이의 고향 마을 카모(加茂)와 하얼빈 731부대를 돌아보는 등 오랫동안 이시이 시로를 추적해왔다. 그가 쓴 <731 石井四郞と細菌戰部隊の闇を暴く>(新潮社, 2008)을 보면, 1945년 8월 세균전 자료를 일본으로 들여와 감추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아오키에 따르면, 완전 파괴·폐기하라는 육군 참모총장의 훈령을 어기고 1945년 8월22일 부산항에서 쿠코토부키마루(德壽丸) 화물선에 실어 챙겨온 세균전 자료는 처음엔 가나자와(金澤) 육군병원의 한 창고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노몬'(野問)이란 간판을 단 한 신사(神祠)는 15명 가량의 731부대 간부들이 모이는 임시 본부로 쓰였다.

가나자와 육군병원에 자료를 숨겨두는 것이 불안했는지, 얼마 뒤 이시이는 731부대의 운송병이었던 코시 사다오(越定男)를 불러 도쿄로 옮기라 지시했다. 두 대의 트럭 운전사 옆에 731부대의 제1부 세균연구부장 출신인 기쿠치(菊池) 군의소장과 731부대 총무부장 오타(大田) 대좌가 올라탔다. 둘 다 사복을 입고 자루에 담은 일본 군도를 들고 있었다. 731부대의 고위 간부들이 일본도를 들고 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치안이 불안정했던 그 무렵 노상 강도를 만나더라도 트럭에 실린 물품(세균전 자료)만큼은 지키겠다는 의지를 말해준다.

가나자와에서 도쿄로 가는 길은 험했다. 히다(飛驒) 산맥을 넘는 고불고불한 고개길을 넘어야 했다. 그러다가 트럭 한 대가 도로 옆 경사면으로 미끄러져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질 뻔한 아찔한 사고도 겪었다. 운전병 코시가 훗날 남긴 회고담(1983)에 따르면, 밧줄을 걸어 트럭을 위로 끌어올리면서 트럭 무게를 덜려고 짐 일부를 계곡 아래로 버렸다. 쇠가 부딪치는 소음과 더불어 현미경 같은 것들이 깨지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그렇게 힘들게 옮겨진 세균전 자료는 세 군데에 나눠 감춰졌다. 그 가운데 하나는 신주쿠에 있던 이시이 시로의 2층 집안으로 비밀리에 옮겨졌다(靑木富貴子, 226-227쪽 참조).

감옥 안 가고 도쿄 집에 머문 까닭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격 해임당할 때까지 패전 일본을 5년 반 동안(1945년 9월~1951년 4월) 다스렸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맡겨진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가 전범재판이었다. 1945년 9월11일 맥아더 사령부는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39명의 A급 전범자들 체포에 나섰고, 그 뒤로도 잇달아 지난날 일본 군국주의 침략전쟁에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을 감옥에 잡아넣었다.

그 무렵 히로히토 일왕도 잡아넣어야 한다는 소리도 높았다. '무솔리니는 처형 됐고, 히틀러는 자살한 마당에 추축국 3국동맹의 주요 지도자였던 히로히토도 단죄돼야 마땅하다'는 것이 세계의 여론이자 진주만 기습을 기억하는 미국 시민들의 다수 견해이기도 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히로히토를 처벌하는 것은 일본의 안정적 통치에 도움이 안 된다고 여겼다. 1945년 9월27일 미 대사관에서 히로히토를 만난 뒤 맥아더의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히로히토를 미국의 안정적인 일본 점령통치에 이용하려 했다(본 연재 4 참조).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A급 전범자들이 하나둘씩 잡혀가던 1945년 후반기에 사람들의 관심사는 과연 언제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 일당이 전범재판에 넘겨질 것인가였다. 여기서 '더러운 거래'가 벌어진다. 731부대의 세균전 자료를 확보하는 조건으로 731부대 관련자들을 전범재판에서 뺀다는 거래였다.

미국은 히로히토의 불기소 이유와 같은 맥락에서 731부대 전범자들을 감옥에 잡아넣기보다 거래를 하는 것이 더 이롭다고 여겼다. 언젠가 비밀거래 사실이 드러나 욕을 먹더라도 '비판은 짧고 실익은 오래 간다'는 쪽을 택했다. 이는 흔히 '독불장군'이란 소릴 들어온 맥아더 장군 혼자만의 결정이 아니었다.

두 명의 캐나다 역사학자는 '세균전 정보를 둘러싼 미·일 비밀거래는 미 군부를 비롯한 주요 권력기관들이 뜻을 모아 이뤄진 담합(談合)의 성격을 지녔다'고 비판했다. 스티븐 앤디콧(전 요크대, 동아시아역사)과 에드워드 해거먼(요크대, 역사학)은 <미국과 생물전쟁>(The United States and Biological Warfare, 1998. 한국판은 원제목과 다름)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일본의 세균전 지식을 얻기 위해 미국 생물전부대와 극동사령부, 합동참모본부, 전쟁부, 국무부, 법무부, 전쟁범죄 담당 수석검사 등 모두가 이시이 장군과 그 공범자들을 전범 기소에서 면제시켜주는 데 한몫씩 했다. 그들은 지구 저쪽 편 독일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에서 미국대표가 인류에 대한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라고 규탄했던 그런 범죄를 숨기는 일에 의도적으로 가담했다](스티븐 앤디콧&에드워드 해거먼,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중심, 2003, 76쪽).

맥아더, "세균학자들 만나면, 전쟁범죄 추궁 말라"

미국에서 일본의 세균무기 개발 실태를 조사하라며 모두 4차에 걸쳐 조사관을 파견했다. 가장 먼저 간 사람은 머레이 샌더스 중령. 1910년생으로 35세의 젊은 세균학자였다. 시카고대학에서 의학박사를 받은 뒤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세균학 전임강사를 지냈다. 1943년 미 육군에 들어간 샌더스는 메릴랜드주 데트릭 기지(Fort Detrick)에서 생물학전 프로젝트를 맡았다.

1945년 8월 일본 항복 뒤 미국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핵폭탄의 위력과 파괴(피해)상황과 세균무기 상황을 조사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미 육군 태평양사령부 소속 과학기술조사단이 그 임무를 맡았다. 샌더스는 그 과학기술조사단(일명 콤프턴 조사단)의 일원으로 필리핀에서 스터전 호에 올라 1945년 8월30일 새벽 요코하마 항구에 내렸다. 스터전은 1941년 12월 미·일 사이의 태평양전쟁이 터진 뒤 일본 부두에 닿은 최초의 미국 함선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바로 같은 날인 8월30일 오후 2시 도쿄 외곽의 아츠기 공항을 통해 일본에 발을 디뎠다. 바로 그날 맥아더는 연합군 총사령관(SCAP)에 임명됐다.

1945년 9월27일 히로히토를 미 대사관에서 만났던 무렵, 맥아더장군은 샌더스 중령을 집무실로 불렀다. 맥아더는 샌더스에게 '731부대원의 세균학자들을 만나면, 전쟁범죄를 추궁하지는 말고 필요한 (세균전) 정보를 챙기도록 하라'는 지침을 내렸다(靑木富貴子, 272쪽 참조).

맥아더가 패전국 일본 통치의 전권을 지닌 '일본 대군(大君)'으로 불렸다고는 하지만, 워싱턴 투르먼 행정부와의 사전 교감 없이 독단적인 지침을 내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에서 살펴본 두 명의 캐나다 역사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워싱턴 백악관과 행정부, 도쿄 연합군사령부 사이엔 일찍부터 일본의 세균전 전문가들과 '더러운 거래'를 트기로 뜻을 모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미 역사학자 해리스의 글을 보자.

[1945년 10월과 11월에 머레이 샌더스 중령은 일본 과학자들에게 자신은 전범을 색출하려고 일본에 온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과학자들이 이룩한 BW(생물무기) 연구 결과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일본에 왔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BW 및 CW(화학무기)에 관한 잔학행위를 은폐하자는 결정은 그 전에 미리 내려진 것일지도 모른다](셸던 해리스, <일본의 야망과 죽음의 공장>, 눈과마음, 2005, 425쪽).

샌더스 중령은 731부대의 수괴인 이시이 시로가 피하는 바람에 끝내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따라서 그의 보고서는 엉성했다. 이어 1947년 말까지 2차, 3차, 4차 조사관들이 파견됐다. 세균전문가인 이들은 이시이를 비롯한 731부대의 핵심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입을 열곤 했다. "당신을 전범으로 기소하려고 만나는 것이 아니다.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자료를 얻기 위해서 심문하는 것이다"(셸던 해리스, 441쪽).

▲ 하얼빈 731부대 죄증진열관. 멀리 이시이 시로 731부대장의 청년 시절 모습이 보인다. ⓒEditQ

맥아더사령부, 체포 대신에 출두시켜달라 요청

미군 헌병들이 도조 히데키 등을 잡아가면서도 자신을 놔두는 것으로 미뤄, 그리고 조사관으로 파견된 샌더스 중령의 태도로 미뤄, 이시이 시로는 미국이 자신을 감옥에 가둘 뜻이 없음을 금세 알아챘다. 그 사이에 맥아더 사령부(GHQ)에는 이시이와 731부대의 악행을 고발하는 투서들, 이시이 일당이 숨어 있는 곳을 알고 있다는 제보들이 쌓여갔다. 개중에는 자신이 731부대에서 있었다고 밝히는 제보자도 나왔다. 하지만 사령부는 그런 제보들을 눈 여겨 보지 않았다.

해를 넘긴 1946년 1월9일 맥아더 사령부는 '종전(終戰)연락중앙사무국'을 거쳐 '일본제국정부'에게 이시이를 데리고 맥아더 사령부에 출두하도록 요구하는 공문서를 보냈다. 도조 히데키처럼 미군 헌병이 직접 나서는 현장 체포가 아닌, 일본 관리가 이시이를 데리고 와주길 요구하는 공문서는 누가 봐도 그야말로 솜방망이처럼 보였다.

종잇조각에 지나지 않는 문서를, 그것도 이시이 본인에게가 아니라 에둘러 '일본제국정부'에 보낸 것은 무엇을 뜻할까. 이시이가 세균전 정보 가치를 지닌 만큼 그를 전쟁범죄자로 엄하게 다룰 의지가 없음을 보여준다. 그때부터 이시이는 도쿄의 집에 머물며 병을 핑계로 밖으로 나가질 않고, 느슨한 형태의 가택 연금상태로 지냈다. 집밖에 헌병이 지키고 서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시이는 7명의 자식을 두었다. 만주 하얼빈 외곽의 핑팡에서 731부대장을 지내는 동안, 그의 가족은 러시아 부호가 지었다는 하얼빈의 대저택으로 옮겨와 있었다. 일본 본토를 겨눈 잇단 미군 공습을 피해서였다. 신주쿠 와카마츠쵸(若松町)에 있던 이시이의 도쿄 2층 집은 하얼빈의 대저택에 견주면 소박하고 작은 집이었다. 도쿄 대공습(1945년 3월10일)을 비롯해 미군의 잇단 공습으로 성한 집들이 많지 않던 시절에 이시이의 집은 폭격을 비껴가 멀쩡했다.

1945년 패전 당시 스무 살이었던 맏딸 이시이 하루미가 일본 언론인들과 훗날 했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아버지 이시이는 그 무렵 일본 육군성 간부들, 또는 만주에서 도망쳐온 731부대 간부들과의 은밀한 만남을 신주쿠 집에서 이어갔다. 그 집을 드나드는 미군 장교들을 환대하는 것도 딸의 몫이었다.

두 권의 이시이 비망록

그 무렵 민간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시이의 모습을 짐작케 하는 자료가 있다. 그가 남긴 비망록 2권이다. 지난 2005년 재미 일본 작가 아오키 토미키코(靑木富貴子)는 이시이의 고향 마을 카모(加茂)에서 집안일을 돕던 사람에게 이시이가 숨겨 놓고 (그런 사실을 잊었는지) 1959년 죽을 때까지 도로 챙겨가지 않았던 것을 찾아냈다.

A5판 대학노트 크기의 비망록 겉장에는 '1945-8-16 종전당시 메모'와 '종전메모 1946-1-11 이시이 시로'라고 적혀 있다. 날짜로 보면 일본 패망 직후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노트에는 731부대 간부의 주소를 비롯해 이시이 본인이 아니면 제대로 해독하기 어려운 메모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철수 당시의 상황을 적은 듯 '철저히 폭파, 소각, 철저한 방첩을 결정'이란 문구도 들어있다. '추출지입(持入), 반출적입(積入)'이란 표현은 중요한 세균자료를 골라 챙기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시이 비망록엔 제1회 복권을 구입한 다음 그 번호를 적어놓은 것도 눈길을 끈다. 일본은 전쟁 뒤 가난이 넘치던 시절이라 사람들에겐 꿈이 필요했다. 정부로선 복권 사업을 통해 기금을 마련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이시이가 복권을 구입해 일확천금을 바랄만큼 경제적으로 궁핍했을까. 물론 그렇지 않았다. 만주에서 펑펑 쓰던 부대의 비자금을 빼돌려온 것은 물론이다. 만주에서 거저 얻다시피 모은 귀금속들을 챙겨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시이는 그 비자금으로 부하들의 충성을 관리했다.

겉장에 '종전메모 1946-1-11 이시이 시로'라 적힌 두 번째 비망록에는 1945년 11월 맥아더 사령부 간부들과 회식을 한 사실도 적혀있다. 이미 미국과의 더러운 거래가 벌어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시이 일당의 전쟁범죄를 없던 일로 덮어주는 조건으로 세균전 자료를 대량으로 챙긴 것은 1947년에 들어와서였지만, 맥아더의 군정이 시작된 초기부터 거래를 트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이 비망록은 말해준다.

글이 길어져, 피 묻은 세균전 정보를 둘러싼 '더러운 거래'는 다음 주로 이어진다. 분위기 파악을 못한 미 검찰관(대령)이 정의감 하나만으로 이시이를 도쿄전범재판에 기소하려다가 조지프 키넌 수석검사의 눈 밖에 나 미국으로 쫓겨 간 사실, 미 조사관들에게 처음엔 '생체실험 따윈 없었다'고 오리발을 내밀던 이시이와의 신경전, 전범 기소가 없을 것으로 확신한 이시이 일당이 건네준 '세균전 자료 선물 보따리'와 조사관들의 보고서 등을 살펴보고, 히로히토 일왕에게는 731부대의 전쟁범죄 책임이 없는지도 따져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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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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