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에 호소하는 마케팅 '윤석열', '적당한 삶'이 이긴다

[문 대통령께 드리지 못한 고언] 국민의힘 '메가 서울' 전략에서 배워야 할 민주당의 선거 전략

국민의힘이 뜬금없이 김포시 등 수도권 도시들을 서울특별시에 편입하겠다고 나섰다. 아무리 따져 봐도 서울은 물론 김포에도 별 이득이 없는 대책이다. 김포시의 지방 재정은 더 어려워질 것이고 교통 등 인프라 건설에도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기 어려워진다. 가령 김포시의 현안인 5호선 연장사업의 경우, '경기도'와 '서울특별시'의 광역자치단체 간 교통 연결일 때는 중앙 정부의 문제이지만 '서울시 김포구'가 되는 순간 서울시만의 문제가 된다. 서울시 입장에서는 노원구에서 종로나 강남에 노선을 하나 더 놓는 게 훨씬 높은 편익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

단순히 지원이 조금 줄어드는 문제가 아니다. 서울의 '본토'와 살짝만 붙어 있는 김포는 해결되지 않은 본토의 민원과 욕망들을 아웃소싱하는 게토가 될 가능성이 크다. 서울시장 등 본토의 정치인들은 48만 인구의 김포 유권자들보단 900만 인구의 본토 유권자들의 손을 들 것이다. 김포의 정치인들과 유권자들은 더 나은 위탁 조건을 요구하는 하청 업자로 전락할 것이다. 서울 편입은 김포의 도시로서의 자립을 영구적으로 포기한다는 뜻이다.

계산기를 조금만 두드려 봐도 답이 나오는 문제를 대단한 대책이라며 들고 나온 국민의힘을 보며, 나는 어처구니가 없다가도 좀 무서워졌다. 저들은 욕망할 거리를 끝없이 찾아내는구나. 지혜가 부족한 나는 서울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까지만 겨우 이해했지, 행정구역명을 가지고 장사를 할 수 있으리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봉이 김선달은 강물이라도 있었는데 말이다. 집값 비싼 이웃 동네의 이름을 가져다가 굳이 아파트 단지명을 바꿔 새로 도색하는 눈 가리고 아웅을 집권여당의 총선 프로젝트로 가져올 수 있다는 과감한 기획력이 나는 좀 무섭다.

이 화수분 같은 욕망의 뒤에는 생존에 대한 불안이 있다. 쉼 없이 쳐올라가지 않고서는 끝까지 버티지 못할 것이란 공포 말이다. 더 높은 곳으로, 더 안정적인 곳으로, 아무도 나를 끌어내릴 수 없는 곳으로 가야 한다. 어떤 정치인들은 그 곳으로 가면 끝내는 행복이 있으리라 꼬드긴다. 이토록 뾰족하기만 전장에서는 모두가 가장 높은 곳에 함께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애써 숨기면서 말이다. 자신들을 뽑는 자들에게만 특권을 가질 수 있다는 약속을 모두에게 뿌린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모두 서울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서울은 어떤 특권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 때는 전 국토를 강남이라고 부를 것인가, 그 뒤에는 압구정이나 청담이라고, 그 다음엔 이 나라 전체를 '센트럴 로얄 프레스티지 캐슬 더 퍼스트'라고 부를 것인가.

불안에 호소하는 마케팅이 강조하는 건 언제나 실질적인 필요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말하는 대로 행동하고 소비해야 이 불안을 끝낼 수 있다고 단언한다. 그렇기에 서울에 편입하면 실제로 어떤 이득이 있는가는 핵심이 아니다. 끝없이 변두리로 밀려나고 있다는 마음의 고통을 끝낼 수 있다는 가능성에 우리는 집착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포시 서울 편입' 공약은 한 번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명품 가방을 이미테이션으로라도 사게 하거나, 돈 한 푼 없이 전액 할부로라도 고급세단을 뽑으면 돈벌이가 따라올 거라 믿게 하는 마케팅과 유사하다.

또 다른 장면을 보자. 금융위원회는 최근 내년 6월까지 주식 공매도를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과거 공매도 중단 사례와 달리 당장 직면한 금융 위기가 없이 등장했다. 공매도 중단에 신중했던 금융위의 갑작스러운 정책 변화를 두고, 많은 이들이 총선 민심을 염두에 둔 선심성 정책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공매도 금지가 중장기적으로 증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불분명하다. 공매도 금지로 단기적 폭락을 예방하는 효과는 있지만, 당연히 주식 상승 자체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공매도 금지 역시 국민들의 중장기적인 자산 형성을 뒷받침하는 실질적인 효과보다는, 이를 통해 불안을 없앨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다는 면에 정책의 심리적 구조가 서울 편입론과 유사하다. 정부여당의 총선 전략은 생존에 대한 불안을 정조준하는 자기계발서와 같을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불안을 실제로 해결하는 방법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에 맞서는 민주당의 선거 전략은 무엇이어야 할까? 결국은 '적당한 삶'이 윤석열을 이길 것이다. '적당한 삶'은 적당히 성실하기만 하면, 적당히 일할 기회를 갖고 적당히 놀고 걱정 없이 늙어갈 수 있는 삶이다. 말도 트이기 전에 의대를 보낼 궁리를 해야 하는 삶,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잠깐 방황하면 영원히 트랙에서 벗어나 버리는 삶, 노후에 살아남기 위해선 평생 전력 질주해야 하는 삶이 아니라 말이다. 갑작스러운 행정구역 변경이나 무리한 재테크 따위에 집착하지 않더라도 큰 걱정은 없는 삶이다. 좀 대충 살아도 큰일 안 나는 세상,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죄스럽지 않은 사회다.

'적당한 삶'은 모두가 최고로 윤택하게 살 수 있다는 장밋빛 약속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한 생산과 발전이 가능한 선에서, 적당한 만큼만 불편하도록 편의와 불편을 분배하는 사회다. 또 평등한 분배와도 완전히 같지 않다. 선진국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적당한 삶의 수준을 보장하는 것이다. 모두가 '센트럴 로얄 프레스티지 캐슬 더 퍼스트'에 살 수 있다고 뻥을 치는 정치가 아니라, 웬만한 국민들은 적당한 집에서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정치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아직 한 번도 '적당한 삶'이 무엇인지 사회적 합의를 이룬 적이 없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짧은 기간 동안 정규직 노동에 기반한 '중산층 사회'가 살짝 이뤄질 뻔했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이 실험은 지속되지 못했다. 나라가 망한다는 공포 속에서 생존을 위해 사력으로 총동원해야만 했던 시절을 겨우 벗어나려고 하는 그 순간, 우리는 또 다른 방식의 불안을 일상적으로 겪게 된다.

IMF 외환위기 극복 후 대한민국 경제는 세계적으로 봐도 꽤 잘 나갔다. 기업과 국가가 감당할 여력이 있는 경제적 호황기에 정치적으로 분배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지만, '만성적 위기'만 강제되면서 우리 정치는 분배에 대한 요구를 민주주의적으로 해결할 적기를 놓쳤다. 때마침 터진 코로나19는 누적되어 있던 분배의 위기를 우리 사회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폭발적으로 늘렸다.

코로나19 이후, 불평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정치적 욕망은 커지는 반면 이를 감당할 경제적 여력이 줄어든 상황에서 우리는 2024년 총선을 맞고 있다. 어느 때보다 큰 정치적 과감성과 지혜가 필요하다. 또 그런 만큼 다수 대중의 동의를 모아내 선거를 이기고,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하는 길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처한 정치적 과제의 크기와 난이도에 비해 민주당의 대응은 참담할 정도로 빈약하다. 과제가 너무 어려워 애써 모르는 척하나 싶을 정도다. 민주당은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을까? 문재인 정권에서 시행했던 소득주도성장, 임대차 3법 등 불평등 대책은 많은 한계에 부딪혔다. 정치적으로도, 정책적으로도 성공적이라고 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후 우리는 비판에 주눅 들어 방에 처박힌 아이마냥 숨어 있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반성하지도, 개선하지도 않는다.

이재명 대표가 주장했던 기본소득론 역시 마찬가지다. 한때 그의 가장 큰 정책 브랜드였지만 소리 소문 없이 폐기되었다. 선거를 치르며 대중의 반응에 따라 공약이 수정되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기본소득론이 폐기된 후 이재명 민주당을 대표할 불평등 해소 방안은 제시되지 않고 있다. 기본소득이 정답이 아니라고 해서, 불평등이라는 '킬러문항'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가장 큰 배점이 걸린 이 문제에 백지를 낸 채 선거를 치르려 하고 있다.

2017년 대선 당내 경선 당시 이재명은 성남시의 기초지자체장이었다. 다선 국회의원도, 국무총리도 아닌 이재명은 어떻게 바로 대선 후보급 정치인이 될 수 있었을까. 그가 불평등에 대한 대안을 거시적 대안을 제시하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기본소득 구상이 세밀하게 가다듬어졌다고 보긴 어려웠지만, 최소한 이재명은 대중의 불만에 응답하려 애쓰며 '적당한 삶'이 있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과감하고 거시적인 정책 대안이 없는 이재명의 매력은 무엇일까? 당장 오늘 내일의 여론 관리에만 치중하는 여론 관리형 정치인으로는 이재명보다 더 잘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민주당은 겁먹고 있다. 이 거대한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지금 중요한 건 불평등 문제가 아니라 윤석열 정부를 욕하는 것이란 회피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메스를 든 채 벌벌 떨고 있는 의사를 믿을 국민은 아무도 없다.

'적당한 삶'을 만들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에게 부여된 기본권의 의미를 되새기고, 이를 확장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최소한의 생명권, 아사하지 않을 정도의 의식주 정도만 기본적 권리로 받아들여진다. 그 이상의 가치와 재화를 누리려면 일정한 자격과 성취를 입증해야만 정당성을 갖는 '면접관 사회'다.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한 자는 비천한 상태에 머물러야 한다. 면접관 사회는 특정한 방식으로 '공정함'에 대한 감각을 형성한다.

문재인 정부의 불평등 대응 정책의 핵심인 소득주도성장이 부딪힌 한계도 이 '공정'이다. 왜 저런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 높아진 최저임금을 받아야 하는가, 왜 어려운 시험도 보지 않은 노동자들까지 안정적인 고용을 누려야 하는가. 일정한 임금과 안정적인 고용이 기본적 권리가 아니라 심판에 통과한 '성취물'로 여겨질 때, 이를 보편적으로 만들려는 정부의 노력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젠더갈등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성별과 무관하게 '적당한 삶'을 가져야 한다는 명제가 성립하지 않는 사회에서 성평등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어떤 정도의 삶의 질을 누려야 차별 받지 않는 상황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는 특정한 구성원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정책은 모두 '특혜'와 '불공정'이란 시비를 피할 수 없다. 정책적 수혜를 받는 대상들은 그럴 자격이 되는지 입증하라고 계속 요구받는다. 불평등한 현실은 각자의 자격에 따라 얻어낸 정당성 있는 질서가 된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노인, 청년 등이 더 많은 것을 얻으려 하는 것은 질서를 깨는 행위가 되며, 그런 '프리 라이더'에게 가당한 것은 혐오뿐이다.

면접관 사회는 시민들이 다른 시민을 평가하는 잣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스스로를 평가하는 잣대이다. 아무런 성과도 자격도 없는 나는 여전히 비참한 상태에 머무르는 게 당연하다. 세상에는 돈이 발에 치이는데 나만 가난한 것 같은 이 상황을 씹어 삼켜 수긍하기 위한 스스로에 대한 주문이다. 면접관 사회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스스로를 더 나은 일꾼이 되게 하기도 하지만, 인생이라면 당연히 곁들여질 불운과 구조적 문제까지 자책의 굴레로 몰아넣게 한다.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자살률이 줄어들고, 애를 낳겠는가. 우리 국민들은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고 재생산할 자격이 없다고 여기고 있다.

'적당한 삶'을 국민 모두가 누려야 한다는 정치적 합의를 이루기 위해선 '공정'에 대한 감각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민주당 스스로가 적극적인 반차별 정책을 확고히 해야 한다. 기본법인 차별금지법에 대해서조차 입장을 조변석개하는 민주당이 모든 국민의 권리를 두텁고 폭넓게 보호할 것이라 기대할 수 있을까? 차별금지법은 일부의 소수자들의 인권을 위해,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고 마지못해 해야 하는 입법이 아니다. 차별금지법은 '보편적 적당한 삶'을 위한 입법전략으로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다"는 당연한 명제를 새삼 강조되어야만, 대한민국 국민의 기본적 권리와 보장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논쟁이 시작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은 민주당이 다수 유권자를 묶어낼 새로운 전략이자, 대한민국의 새로운 사회계약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공세적인 입법이 될 수도 있다. 이 지점에서 기본소득, 소득주도성장 등 소득 보장 프로그램에 대한 치열한 논의가 재개되어야 한다. 또 공적 연금, 건강 보험 등의 사회보장 정책과 노동시간 축소, 일자리 나누기, 사회적 재교육 및 불안정 노동자 보호 등 노동 정책이 얹혀야 한다. 그리고 생활동반자법과 이민 정책 등 현 시대의 주요한 구조적 차별과 관련한 의제가 더해져서 사각지대를 최대한 해소해야 한다.

하나하나가 결코 쉽지 않은 논쟁이다. 그리고 당장 5개월 앞으로 다가온 총선까지 우리가 답을 완성할 수 있으리란 것도 비현실적 기대다. 하지만 이 시대의 불평등에 맞서 '보편적 적당한 삶'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명확한 방향만이라도 확립해야 한다. 결국 국민들은 자신들이 계속 살아가고 싶은 삶의 방향에,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사회에 표를 던질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가 6일 국회에서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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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두영

정치학을 공부하고 정치권 노동자로 온갖 실무를 해왔다. 국회인턴부터 시작해 국회의원 보좌관, 청와대 정무수석실 행정관, 더불어민주당 공동비대위원장 정무조정실장까지 열심히 일했다. 정치권 안에서 도무지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던지고 합리적인 대답을 찾기 위해 글을 쓴다. 단행본 <<외롭지 않을 권리>>, <<후보단일화 게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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