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운동권'입니다"

[조금 특별한 '페미' 연대] 청소노동자 투쟁과 페미니즘 운동의 만남, 그리고 교훈

<프레시안> 연재 '조금 특별한 페미 연대'는 지난해 시작된 덕성여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과 이에 연대한 페미니스트들 간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관련기사 ☞ 지난 연재 보러가기)

시작은 내가 했다. 나는 스무 살 때부터 소위 의식화된 운동권이 됐다. 대학교 1~2학년 때 학교 청소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녔던 경험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미디어오늘>, <미디어스> 등 매체에서 기자로 일하다가 2016년 11월부터 노동조합에서 활동하고 있다. 희망연대노조를 거쳐 지금은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에서 조직부장으로 일한다. 나는 조직담당자, 노조활동가로 불린다. 그렇다. 이른바 '전문 시위꾼'이다.

반면 엄마는 예순이 넘어 운동권이 됐다. 엄마는 만학도로 중학교를 다니면서 우연히 학생회 활동을 하게 됐는데, 당시 학생회는 학교를 사유화하려는 집단에 맞서게 됐다. 엄마와 친구들은 싸움을 시작했고, 나는 엄마에게 농성장에 칠 천막을 어디서 빌릴 수 있는지 알려줬다. 그리고 민중가요 파일을 이메일로 보냈다. 틈틈이 투쟁방향과 전술을 조언했다. 엄마와 동지들은 끈질기게 싸웠고 이겼다. 함께 대학생이 됐다.

사실 내가 운동권이 된 이유 중 하나는 엄마 때문이다. 오랜 시간 청소노동자로 일했고 평생 성실하게 살아온 아빠가 내게 미친 영향도 크지만, 엄마의 인생과 태도가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엄마는 국민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노동자로 살았다. 내가 알기로 엄마는 그물공장, 대형마트, 유람선에서 일했다. 한때 보험영업도 했었고, 동네에서 작은 슈퍼마켓을 운영하기도 했다. 내가 중학생일 때 엄마는 노점을 시작했다. 15년 정도 목포역 앞에서 오징어, 쥐포, 붕어빵, 옥수수, 떡꼬치를 팔았다. 일 년에 하루 이틀밖에 쉬지 못할 정도로 빡빡한 살림이었지만 엄마는 그 와중에도 다른 사람을 도우며 살았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가르쳤다. 나는 엄마 덕을 많이 봤다.

사회생활을 해보니, 또 노동조합에서 활동해보니, 우리 엄마 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인생 마지막 직장에서 인생 첫 노동조합을 만나 운동권이 된 우리 조합원들 이야기다. 나는 운 좋게도 내 인생 첫 노조인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에서 조직담당자로 활동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내가 담당하는 현장의 조합원들은 58년생인 엄마와 비슷한 연배다.

감정이입이 더 되는 게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 엄마도 우리 동지들도 60여 년 동안 고단한 삶을 살아왔을 테고, 그만큼 억세고 단단하게 버텨왔을 것이고, 턱없이 낮은 임금에 가사노동까지 떠맡으며 힘들었을 테고, 하소연할 곳은 거의 없었을 것 같다.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 엄마와 우리 동지들이 자신, 동료, 세상을 바꾼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란 점이다.

거의 모든 사용자들이 청소노동을 폄하하고, 청소노동자들을 용역업체를 통해 간접고용(외주화)하며, 틈만 나면 인원을 줄이거나 단시간노동으로 바꾸려는 사회. 이런 곳에서 고령의 여성 청소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직접고용-정규직-핵심업무-남성 중심의 질서에서 밀려난 노동자들이 십 년 넘게 민주노조를 지키면서 여느 정규직노조 못지않은 권리를 쟁취한 것은 기적에 가깝다. 귀족 말고 기적노조다.

나는 그래서 우리 조합원들이 시급하고 중요한 고민과 역할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상당수 노조활동가들이 그렇듯) 우리 동지들과 함께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또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 현장과 우리 조직과 우리 사회에 페미니즘적 개입을 시도하고 싶다. 투쟁사업장에 연대하는 것을 넘어, 장애인 동지들의 운동에 결합하고, 기후정의를 위한 파업을 해내면 좋겠다. 이주노동자, 난민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발언하면 좋겠다. 이렇게 해야만 바꿀 수 있고, 제대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노동조합과 페미니즘은 이미 만났고 결합하는 중이다. 성별화되고 성차별적인 노동시장에 대해 많은 노동조합들이 문제의식을 갖고 나름의 사업과 투쟁을 해왔다. 성별 임금격차를 줄이고 성폭력을 중단하기 위한 행동들도 이어지고 있다.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가 매년 하는 생활임금 쟁취 투쟁은 저임금·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이면서 동시에 여성노동자들의 노동권을 강화하는 싸움이다.

지난해 가을 페미니스트들과 여성운동단체들이 '덕성 투쟁'에 주목하고 연대한 배경에는 이런 흐름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페미니스트연대에 참여한 단체들과 동지들의 끈질긴 연대 덕에 덕성여대분회 조합원들은 자신의 몸과 건강, 그리고 질병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다른 여성들의 삶과 노동에 대해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함께 스트레칭을 하면서 자신의 몸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여성운동단체들이 어떤 활동을 어떻게 또 왜 하는지 알게 됐다. 그리고 페미니즘의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또 다른 사업을 하려고 고민하게 됐다. 당장 다음 주에는 성공회대에 견학을 가서 모두의화장실을 만들게 된 이유와 과정을 공부하려고 한다.

덕성여대 청소노동자 투쟁은 너무 힘들었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엄마가 조합원이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페미니즘과 만나는 민주노조의 조합원.

엄마가 조합원으로 활동했다면 엄마 자신, 엄마의 직장, 엄마의 가족 … 엄마의 세상은 분명 바뀌었을 것이다. 모두에게 좀 더 평등하고 모두에게 좀 더 호혜롭게 말이다. 이것이 덕성여대 청소노동자 투쟁과 페미니스트연대 활동이 내게 준 가장 빛나는 교훈인 것 같다.

▲지난 3월 8일 행진 중인 덕성여대 청소노동자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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