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 미리 결정해놓고, 어쩔 수 없이 '자위전쟁' 벌였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39] 전범 재판은 승자의 재판인가 ⑩ 자존·자위 전쟁론

일본이 저질렀던 전쟁범죄의 주역 가운데 하나인 도조 히데키와 관련, 한 독자분이 메일로 질문을 보내주셨다. 도조가 도쿄의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거듭 펼쳤던 주장("일본의 자존·자위를 위해 전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에 대한 것이다. 메일의 요점을 정리하면 이렇다. "미국이 일본에게 중국 침략을 그만두고 물러나라 요구하면서 미국 석유의 대일 수출을 막는 등 일본을 압박했다. 그러니까 도조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일본만 탓할 수는 없지 않은가."

도조 히데키의 법정 발언을 모은 <A급 전범의 증언: 도쿄전범재판 속기록을 읽다>(언어의 바다, 2017)에 따르면, 도조는 도쿄 전범재판에서 "1941년 12월의 그 전쟁(진주만 공습)이 일어난 이유는 미국을 세계대전으로 유도하고자 한 연합국 측의 도발에 있으며, 일본은 오로지 자위를 위해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했다고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도조는 "당시 국가의 운명을 헤아리고 살펴야 할 책임을 진 우리가 한 일은 국가 자위를 위한 것뿐이다"라고 거듭 강조했다(본 연재 36과 37 참조).

히로히토도 마찬가지 주장을 폈다. 1945년 8월15일 연합국의 무조건 항복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라디오 방송으로 히로히토가 내놓은 이른바「종전 조서」에서도 '자존'이란 용어가 나온다. 일본 국왕의 방송이라 해서 일본인들이 높여 말하는 '옥음(玉音) 방송'에서 히로히토는 '타국 영토를 빼앗으려는 건 나의 뜻이 아니고 일본제국의 자존을 위해서 전쟁을 했다'는 논리를 펼쳤다.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성스러운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 영, 중, 소 4개국에 대하여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토록 하였다. (중략)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었다](고모리 요이치, <1945년 8월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뿌리와이파리, 2004, 55쪽).

위와 같은 도조와 히로히토의 주장이 맞다면, 진주만 공습(1941년 12월7일)을 저질렀던 일본의 전시 지도부에게 도쿄 전범재판에서 적용된 '평화를 깨뜨린 죄'(crime against peace)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조국 방어를 위해 불가피하게 전쟁을 하게 됐다? 과연 그럴까. 이번 주 글에선 독자의 질문에 답할 겸해서, 도조를 비롯한 일본 군부 강경파들이 '어쩔 수 없이 미국과 전쟁을 하게 됐다'는 주장이 맞는지 살펴보자.

▲ 1941년 태평양전쟁이 벌어지기 앞서 코델 헐 미 국무(사진 왼쪽)는 노무라 기치사부로 주미 일본대사에게 미국 정부의 요구사항을 담은 '헐 노트'를 건넸다. ⓒ위키미디어

태평양전쟁 앞두고 벌인 미-일 교섭

1941년은 태평양전쟁을 앞둔 미국·일본 두 나라가 팽팽한 신경전을 펴던 해였다. 일본은 중일전쟁(1937)을 벌인 뒤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하나하나씩 점령해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30만 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알려진 난징 대학살(1937)도 벌어졌다. 하지만 일본은 처음의 예상과는 달리 4년 넘게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중국이 워낙 드넓은 데다 (미국의 전쟁물자 지원을 받은)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일본은 중국 점령에서 더 나아가 서구 강대국들의 동남아 식민지들을 갖고 싶어 했다. 일본이 이곳들을 점령한다면, 석유를 비롯한 전략 물자들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미국은 일본의 야심을 알아채고 경계했고, 특히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없던 필리핀이 일본군의 위협을 받을 것이라 걱정했다. 필리핀뿐 아니라 프랑스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반도(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영국 식민지(미얀마,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그리고 네덜란드 식민지(인도네시아), 포르투갈 식민지(동티모르)도 안심하기 어려웠다.

미국은 일본을 견제하려 들면서도, 한편으로 전쟁만큼은 피하고 싶어 했다. 일본도 중국 장제스 국민당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끊고,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이것이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벌어지기 앞서 미일 양국이 교섭에 나서게 된 배경이다.

1941년 4월 코델 헐(Cordell Hull) 미 국무장관은 일본 해군대장과 외무대신 경력을 지닌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주미 일본대사와 비밀리에 비공식 회담을 가졌다. 헐 국무는 △일본이 중국 영토에서 일본군이 철군하고 △미일 양국 정부가 필리핀 독립을 공동으로 보장하길 요구했다. 본국의 훈령에 따라 노무라 대사는 '중국 장제스 국민당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중지하라'고 맞섰다.

일본의 베트남 점령 뒤 석유 거래 끊겨

미국과 일본이 협상을 벌이는 도중에 일이 터졌다. 일본군이 1941년 7월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로 '진출'했다. 독일이 점령중인 프랑스 비시 괴뢰정권의 마지못한 양해 아래서 이뤄진 일이었지만, 사실상 '힘의 공백'을 파고든 점령이었다. 미국은 일본의 '남진 정책'에 곧바로 대응했다. 미국에 있던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석유와 제1급 고철(철강재 원료)을 수출 허가제 품목에 포함시킨다고 발표했다.

미국 정부는 곧 이어 발동기용 연료와 항공기용 윤활유의 수출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로써 사실상 미국 석유의 일본 수출 길을 막았다. 당시 일본은 석유 수입량의 70~80% 쯤을 미국으로부터 들여오고 있었다. 군함이나 탱크를 만드는 데 쓰이는 주요 자재들도 미국 의존도가 높았다. 참고로 관련 통계를 옮겨본다.

[중일전쟁 발발 1년 전으로 마지막 평시(平時)로 기록된 1936년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석유 자급률은 20.3%에 불과했고, 수입량 370만 톤 중 68%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강재(鋼材) 생산에 불가결한 스크랩(scrap)의 수입량은 130만 톤으로, 그 중 78%가 미국, 12%가 영국(식민지였던 인도, 말레이시아)으로부터의 수입이었다. 스크랩의 생산이 중단되면 강재 400만 톤의 생산은 유지할 수 없게 된다](후지이 히사시, <일본군의 패인> 논형, 2016, 16-17쪽).

위 통계에서 보듯이, 일본은 석유나 강재 같은 주요 군수 자원들을 미국과 영국에게 기대고 있는 상황이었다. 석유, 고무, 주석 등 총력전에서의 승리를 뒷받침하는 전략물자에서부터 자립도가 낮은 상황이었는데도 일본은 이 두 나라에 맞서는 전쟁을 벌였다. 동남아시아 쪽으로 침략(일본 쪽 용어로는 '남진')한 것은 전략물자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국내 생산력에서 월등히 앞서는 미국을 상대로 속전속결의 단기전에 그쳤다면 몰라도, 장기적으로 총력전을 펼 경우 승산이 매우 낮은 모험을 저질렀다는 비판이 따른다.

▲ 1941년 12월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화염에 휩싸인 전함 USS 애리조나. 일본은 이보다 앞선 1941년 11월5일 어전회의에서 미국과의 전쟁을 최종 결의했다. ⓒ위키미디어

도조, "조선의 통치도 위험하다"

미국의 금수 조치를 두고 일본 해군은 "석유가 없다면, 일본 군함들이 움직일 수 없게 된다"고 걱정했다(일본이 1941년 진주만공습을 벌일 때 석유 보유량은 24개월 치에 지나지 않았다). 군부 강경파들 사이에서 '석유 비축량이 동나기 전에 미국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주전론이 힘을 얻게 됐다.

1941년 9월6일 어전회의에서는 중요한 결정이 이뤄졌다. △10월 상순까지 (지난 4월부터 헐 국무를 상대로 벌여온) 미국과의 교섭을 통해 일본이 바라는 바를 얻지 못하면, 전쟁을 벌이기로 하고, △10월 하순까지 미국·영국·네델란드를 상대로 동남아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준비를 마치도록 한다는 결정이었다. 이와 관련, 1941년 10월14일 열린 각의에서 당시 육군대신으로 있던 도조 히데키가 했던 발언을 보자.

"(지난 9월6일 어전회의에서) 10월 상순에 이르렀을 때에도 외교협상으로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전망이 보이지 않을 경우 미국·영국·네델란드를 상대로 개전을 결의한다고 했는데, 오늘이 10월14일이다. 수십만 병력을 동원하고 중국과 만주에서도 이동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지금도 군대는 움직이고 있다. (미국이 요구하는 중국에서의) 철병 문제는 심장이다. (일본)육군으로선 중대한 문제다. 미국의 주장에 그대로 굴복한다면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의 일본 쪽 용어)의 성과를 무너뜨리는 셈이 된다. 만주국도 위험해지고 더욱이 조선의 통치도 위험해질 것이다"(杉山元, <彬山メモ 上>, 原書房, 1967, 348-349쪽. 허버트 빅스, <히로히토 평전> 삼인, 2010, 466쪽에서 재인용).

'스기야마 메모'란 이름으로 알려진 이 자료 작성자는 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 1880-1945) 육군대장이다. 일본 육사를 나온 뒤 초급 장교 시절에 러일전쟁에 참전했고, 육군 참모총장과 육군대신을 지냈다(최종계급은 육군 원수). 1945년 패전 뒤 A급 전범으로 체포되기 직전에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꼼꼼하게 기록한 메모는 히로히토나 도조 히데키 등 일본의 전시지도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는 1차 자료다.

히로히토 "군의 일은 총리보다 내가 더 잘 안다"

도조 히데키의 강경발언이 있고난 이틀 뒤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1891-1945) 총리는 사직서를 냈다. 일본 귀족 출신으로 도쿄제국대학에서 철학과 법학을 전공했던 고노에는 세 차례에 걸쳐 총리대신을 지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졌을 때 1차 고노에 내각을 이끌고 있었다. 중일전쟁에 책임과 부담을 느낀 고노에는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고자 노무라 주미 일본대사와 헐 국무와의 외교협상에 나름의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히로히토 일왕이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일본 군부 강경파의 개전론(開戰論)에 기울어 자신을 더 이상 신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총리에서 물러났다.

고노에 후임자로 히로히토가 찍은 인물이 도조 히데키였다. 고노에가 히로히토에게 내민 사직서에는 고노에가 '중국에서 일본군이 철수해야 한다'고 도조에게 네 차례에 걸쳐 거듭 말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도조는 '중국에서 철병할 경우 일본 육군의 사기(士氣)가 떨어진다' 운운하며 고노에의 철병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다(허버트 빅스, 467쪽 참조).

고노에가 사퇴할 무렵인 1941년 10월 히로히토는 군부 강경파와 한통속이 돼 있었다. 그런 사실은 고노에 총리 밑에서 서기관장을 지낸 도미타 겐지에게 고노에가 한탄하듯이 털어놓았던 말에서 알 수 있다.

[내가 총리대신으로서 폐하께 오늘 (미국과의) 개전의 불리함을 말씀드리자 그것에 찬성하셨다가 다음날 어전에 나가면 "어제 그대는 그렇게 얘기했지만, 그처럼 걱정할 것도 없다"고 말씀하시고 약간 전쟁 쪽으로 기울어가셨다. 그 다음에는 더욱 전쟁론 쪽으로 기울어지셨다. 육해군 통수부 사람들의 의견이 개입되어, '군의 일은 총리대신이 모른다, 자신이 더 잘 안다'는 마음이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군) 통수에 대해 아무런 권한이 없는 총리대신으로서 유일한 버팀목이신 폐하가 그렇게 나오니 도저히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藤原彰, <昭和天皇の十五年戦争> 青木書店, 1991, 126쪽).

일본의 패전이 불을 보듯 명확해지던 1945년 2월 고노에는 히로히토 일왕에게 조기 평화교섭에 나설 것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노에의 말에 따라 히로히토가 조기 종전에 노력했더라면, 원자폭탄 피해는 없었을지 모른다. 고노에는 1945년 패전 뒤 A급 전범으로 붙잡히기 직전에 청산가리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많은 잘못을 저질러왔으나, 전범으로 재판받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유서를 남겼다.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 진주만 공습 당시 일본 해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제로센((零戰). 야스쿠니 전쟁박물관(유슈칸)에 전시된 제로센 윗쪽에 매달린 것은 전쟁 후반부에 나온 자살특공기. ⓒ김재명

도조 히데키, "워싱턴이 최후 통첩을 보내왔다"

1941년 11월26일 미 국무장관 헐은 이른바 '헐 노트'로 알려진 미국의 대일정책안을 노무라 주미 일본대사에게 보냈다. 모두 10개항으로 이뤄진 '헐 노트'의 요점은 △중국 및 인도차이나에서 모든 육해군 병력 및 경찰력을 철수해야 한다(제3항), △충칭에 임시 수도를 두고 있는 중화민국 국민정부(장제스 국민당 정부) 이외에 중국의 그 어떤 정부 또는 정권(왕자오밍 난징 친일괴뢰정부)을 군사적 정치적 및 경제적으로 지지하지 않아야 한다(제4항), △독일-이탈리아와 맺었던 삼국동맹(1940년 9월27일) 탈퇴(제9항) 등이었다.

일본의 지도부에서 보기에는 위 내용은 7개월 전에 헐 국무가 내놓았던 미일교섭안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헐 노트'를 전해 받고 도조 히데키는 몹시 화를 냈다고 한다. 일본 저널리스트 호사카 마사야스의 역작인 <쇼와 육군>(원제목은 <昭和陸軍の研究>, 1999)에 따르면, 도조는 흥분한 상태에서 빠른 말투로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워싱턴이 최후 통첩을 보내왔다. 남은 길은 어전회의에서 결정한 전쟁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오늘부터는 전쟁 준비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자네들도 그렇게 알고 나라에 봉공해주기 바란다"(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글항아리, 2016, 380쪽)

일본 군부의 강경파들도 도조와 마찬가지로 '헐 노트'를 미국의 '최후통첩'이라 여겼다. "그런 가혹한 제안을 우린 받아들일 수 없다. 외교적 협상의 여지가 없다"며 끝내 전쟁을 벌이게 됐다는 것이 도쿄 전범재판에서 내놓았던 일본 쪽 주장이다. 미국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이른바 '자존 자위'를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는 말이다.

'헐 노트' 핑계 삼아 침략전쟁 합리화

'헐 노트'를 미국의 '최후통첩'으로 보고 일본이 전쟁을 결의했다는 데엔 비판이 따른다. '헐 노트'를 핑계로 일본 군부의 침략야욕을 합리화했다는 반론이다. 이 글 아래에서 곧 살펴보겠지만, 일본은 '헐 노트'를 받기 전인 1941년 11월 초에 이미 미국과 전쟁을 벌이기로 어전회의에서 결의한 상태였다.

'헐 노트'엔 '시안'이라 분명히 쓰여 있었고, 그 승낙 여부를 일본이 회답할 기한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도조의 주장대로 '최후통첩'은 아니었다. 또한 '헐 노트'가 중국에서 일본군 철병을 요구했지만 분명하게 만주국을 포함시켰던 것도 아니다. 조선반도에서의 일본 철수를 요구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도조는 미국과의 전쟁을 주장하면서 위에서 보듯 '조선의 통치도 위험하다'며 위기론을 부추겼다.

물론 다른 해석도 있다. 미국 루스벨트 정부도 '헐 노트'를 일본 정부가 거부하고 머지 않아 태평양전쟁이 터질 것을 예상했다는 것이다. 호사카 마사야스의 <쇼와 육군>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미국도 이러한 안(헐 노트)을 일본 측에 제시했을 때 도조 이하 일본의 지도자들이 어떤 태도로 나올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 증거로 헐 국무가 노무라 주미 일본대사를 만나기 전에 미 육군장관 스팀슨과 해군장관 녹스에게 "조만간 당신들이 미일 관계의 주역이 될 것"이라 말했다. 헐 노트는 사실상 미일 개전의 방아쇠가 되었다](호사카 마사야스, 377쪽).

미국의 육·해군 관련 장관들이 '미일 관계의 주역'이 된다는 말은 곧 미일 전쟁이 터질 것이란 뜻이 담겨 있다. 이런 말을 두고 일본의 일부 보수논객들은 '음모론'을 내놓는다. 미국이 파놓은 태평양전쟁의 함정에 일본이 빠져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1950년 1월12일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한반도를 뺀다는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이른바 '애치슨라인'(Acheson Line) 발표가 북한 김일성과 소련 스탈린으로 하여금 6.25전쟁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는 '음모론'을 떠올린다. 미국이 일본과의 태평양전쟁이 멀지 않았음을 내다보았다면, 문제는 진주만 공습과 같은 일본의 전격작전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못했다는 것이다.

'헐 노트' 받기 앞서 진주만 기습 꾀해

히로히토 일왕과 도조 히데키 총리 등 일본의 지도부가 자존자위를 위해 미국과 전쟁을 벌이기로 했다면, 언제 최종적으로 결정했을까. '헐 노트'가 주미 일본대사에게 전해진 것은 1941년 11월26일이고, 일본 외무성이 헐 노트를 일본어로 번역하여 전시지도부에 전달한 것이 다음날인 27일이었다. 바로 그 무렵, 일본 해군은 이미 진주만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11월26일 쿠릴 열도 남부의 이투루프 섬 가까운 히토카푸 만에 집결하고 있던 항공모함 6척을 포함한 해군 기동부대는 비밀리에 하와이 쪽으로 떠났다.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한 날이 언제인가는 논란거리다. 1941년 12월7일 진주만공습이 있기까지 4차례의 어전회의(1941년 7월2일, 9월6일, 11월5일, 12월1일)를 거쳐 전쟁이 최종결정했다. 태평양전쟁을 일본의 '자위전쟁'이라 주장하는 쪽에선 '헐 노트'를 받은 뒤인 12월1일이 전쟁결정일로 여긴다. 이는 '헐 노트'가 미국의 '최후통첩'이란 도조의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요시다 유타카(히도쓰바시대학, 일본근현대사)교수를 비롯한 연구자들에 따르면, 1941년 12월1일의 어전회의 최종결정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이다. 실질적인 개전결정은 그보다 앞선 1941년 11월5일 어전회의에서 이뤄졌다고 본다. 여기서 '무력 발동의 시기'는 1941년 12월 초로 결정됐다. 참고로, 그날 결정된 '제국 국책 수행요령'을 보자.

[(일본)제국은 현하 위국(危局)을 타개하여 자존 자위를 지키고 대동아의 신질서를 건설하기 위해 영미란전쟁(영국-미국-네델란드와의 전쟁)을 결의하여 다음 조치를 채택한다. 무력 발동의 시기를 12월 초두로 정하여 육해군은 작전준비를 완성한다](요시다 유타카, <아시아태평양전쟁> 어문학사, 2012, 31쪽).

석유자원이 풍부한 보르네오(당시 영국과 네델란드의 식민지)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유전지대를 점령하려면, 먼저 그 걸림돌이 되는 미 태평양 함대를 기습공격으로 궤멸시켜야 했다. 일본 군부는 당시 작전의 1단계로 진주만 기습으로 남태평양에서의 제해권을 쥐게 되면, 지구전에 필요한 자급자족 경제를 바탕으로 '난공불락'의 군사체제를 꾸려갈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품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안전한 석유수송로 확보가 생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진주만공습으로 태평양의 제해권을 쥔 다음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유전지대로부터 캐낸 석유를 일본으로 안전하게 운반하려 했다. 1942년 보르네오로 쳐들어갔을 때 먼저 서둘러 점령하려 했던 것 역시 석유 생산시설과 정유시설이었다. 네덜란드 기술자들이 파괴하고 도망간 석유 관련 시설들을 재빨리 수리하고는 일본으로 석유를 실어 날랐다.

그러나 일본의 희망대로 일이 술술 풀려가진 않았다. 미드웨이해전(1942)과 필리핀해전(레이테만 전투, 1944)을 비롯한 일련의 주요 전투에서 미군이 승리하자, 일본 본토로 이어지는 해상 석유수송로가 위태로워졌다. 미군은 일본 유조선과 화물선을 공격목표로 삼았고, 일본은 심각한 연료 부족에 시달렸다. 일본 해군은 작전다운 작전을 펼 엄두도 못 냈다. 1945년 8월 두 발의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했지만, 일본의 패망은 안전한 석유 수송로를 잃은 데서 비롯됐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 4. 1943년 4월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 내린 도조 히데키 총리. 일본은 잇단 해전에서의 패배로 태평양 제해권을 잃었다. ⓒ위키미디어

히로히토에게 결정권이 없었다?

1941년 11월5일 어전회의에서 '무력 발동의 시기'를 1941년 12월 초로 결정했던 자리엔 히로히토 일왕이 있었고, 그가 최종 재가를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도쿄 전범재판에서 '평화를 깨트린 죄'라는 전쟁범죄의 책임을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전시 지도부뿐만 아니라) 히로히토에게도 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히로히토는 맥아더 사령부 제출용인 <독백록>이란 문서에서 그때를 돌아보며 이런 구차스런 변명을 남겼다(히로히토 <독백록>에 대해선 본 연재 6 참조).

"내가 만약 개전 결정을 '비토'(거부권 행사)했다고 치자. 국내에선 (군부 강경파들의 쿠데타 움직임으로) 내란이 크게 일어났을 것이며 내가 믿는 주위 사람들은 살해되고 내 생명도 보증할 수 없었을 것이다"(寺崎英成, <昭和天皇獨白錄> 文春文庫, 1995, 160쪽).

나아가 히로히토는 '회의가 형식적이었으므로 천황에게는 결정권이 없었다'고 말했다. 누가 들어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변명이었다. 이 글 앞에서 도조에게 총리대신을 물려준 고노에가 자신의 측근에게 '천황이 개전 쪽으로 기울었다'고 한탄했던 것은 히로히토가 적극적으로 침략전쟁의 길을 닦았다는 증거다. 진주만 공습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1941년 12월8일 히로히토는 해군복을 입고 하루 종일 즐거운 표정으로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다. 그리고 4년 뒤 '나는 결정권이 없었다'고 구차스런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제 글을 매듭지어야겠다. 오늘 글의 요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헐 노트'가 일본에 전달되기 앞서 이미 일본은 히로히토가 주재한 어전회의에서 이른바 '개전 결의'를 통해 미국과의 전쟁을 벌이기로 했고, △그 '개전 결의'에 따라 진주만 기습작전을 짜나갔고 △'헐 노트'가 일본에 전달되던 시점에 일본 해군 기동부대는 비밀리에 하와이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히로히토와 도조가 '일본의 자존·자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쟁을 벌이게 됐다'고 하는 말은 그들의 침략행위를 합리화하는 궤변이자 억지주장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더구나 중요한 사실은 진주만공습을 벌이기 앞서 일본은 이미 침략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만주와 중국을 침략했고, 온갖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자존·자위란 오로지 지난날의 일본 제국주의자들, 그리고 오늘의 일본 극우끼리 통하는 그들만의 용어일 뿐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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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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