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행의 '황당 발언', 강간으로 임신해도 '정서'로 극복?

"필리핀에선 코피노 낳아도 수용 … 우리나라 같으면 낙태"

임신중단권과 관련해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을 부정하는 취지의 발언으로 논란이 된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이번엔 지난 2012년 방송에서 강간 등에 의한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해서도 낙태를 금지하고 있는 가톨릭 국가 필리핀의 법을 긍정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김 후보자는 본인이 창립한 SNS 뉴스 사이트 <위키트리>의 지난 2012년 9월 유튜브 방송에서 이 같은 발언을 했다.

해당 방송은 위키트리가 당시 주기적으로 게재하던 '소셜방송 김형완의 시사인권토크'의 9월 17일자 방송으로, 해당 회차에선 같은 해 8월 헌법재판소가 형법상의 낙태죄에 합헌판결을 내린 일을 두고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과 당시 위키트리 부회장이었던 김행 후보자가 대담을 나눴다.

방송에서 김 후보자는 우선 "여성단체가 (헌재의 낙태죄 합헌결정에 대해) 그렇게 목소리를 별로 크게 올리지 않는 이유가 현실적으로 헌법재판소에서 그렇게 (합헌결정을) 했어도 우리가 쉽게 낙태를 할 수 있으니까"라며 '제도가 무분별한 낙태를 막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이는 실제와는 거리가 있는 판단이다. 여성계 등 시민사회는 '안정적인 임신중단을 불가능하게 하고 여성들을 불법수술대로 내모는' 낙태죄를 폐지하기 위해 지난 2010년부터 '임신·출산 결정권을 위한 네트워크'를 결성해 조직적인 낙태죄 폐지운동을 벌여왔다.

특히 2012년 당시 헌재의 낙태죄 합헌 결정은 이후 이어진 수많은 낙태죄 폐지 운동의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불법을 감수하고서라도 감행하는 낙태수술' 또한 "여성단체가 목소리를 크게 올리지 않는 이유"가 아니라 임신중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취약계층 여성들의 건강권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제도의 폭력'으로 지목돼왔다.

방송 당시 김 후보자는 이어서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제일 큰 가톨릭 국가다. 거긴 무조건 낙태가 금지돼 있다"라며 "(필리핀에선) 산모가 낙태를 하러 오면 의사가 고발한다. 그래서 바로 잡혀간다. 그게 다 징역이다. 전부 다. 그리고 또 어떤 의사가 낙태를 해줬다? 그럼 그걸 아는 사람이 고발을 하면 의사를 못한다. 법이 굉장히 엄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의 대표적인 가톨릭 국가로 꼽히는 필리핀에서는 종교적 영향 아래 임신중지를 강력하게 금지하고 있다. 임신중지 사실이 적발된 여성은 2년~6년의 징역형에 처해지며 수술을 실행하거나 지원한 의사 및 간호사 역시 처벌된다.

다만 필리핀에선 종교적 영향으로 인한 임신중단 금지, 피임에 대한 문화적 거부감 등이 사회문제로 지목되고 있는 실정이다.

성·재생산 건강 연구기관 구트마허 연구소(Guttmacher Institute)에 따르면 필리핀에선 2000년 한 해에만 약 47만여 명의 여성이 불법낙태를 받았다. 필리핀 보건부는 1994년 당시 이미 "모든 산모 사망의 12%가 불법 낙태의 결과"라고 보고하기도 했다. 낙태의 금지가 불법낙태로 이어지고, 이것이 여성의 건강권을 침해하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 필리핀에도 이미 만연했다는 이야기다.

더군다나 필리핀 의회는 2012년 당시 교회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산아제한법을 통과시켰다. 높은 출산율에 비해 부족한 사회경제적 지원으로 미래세대의 생활수준 저하가 국가적인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김 후보자는 이 같은 문제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한 듯 오히려 필리핀의 종교·문화적 배경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그는 한국 내에서도 국제인권문제로 지목되곤 하는 필리핀 '코피노' 문제를 마치 필리핀문화의 긍정적 일면을 보여주는 지표인양 묘사하기도 했다.

가령 김 후보자는 "(필리핀에는) 한국인 남자들이 가서 필리핀 여자를 취해서 애를 낳고 도망친 코피노들이 그렇게 많다고 한다. 그런데 필리핀 여자들이 (그러한 아이들을) 다 낳는다는 거다"라며 "거기 (사는) 한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같으면 외국 사람이랑 잘못된 아이를 낳았으면 버리거나 입양을 하거나 낙태를 하거나 이런 초이스를 할 텐데 필리핀은 그러지 않는다' (고들 한다)"고 설명했다.

김 후보자는 필리핀의 이 같은 코피노 출산 현상이 "코피노를 낳아도 그 사회가 아이를 관용적으로 받아들여준다는 것"이라며 "국가에서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건 아니지만, 문화적으로 옆집사람이나 등등이 아이를 낳아야 되니까 코피노를 낳아도 마을의 일원으로 사회구성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준다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에도) 너무 가난하거나, 남자가 도망갔거나, 뭐 강간을 당했거나 (등의) 어떤 경우라도, 여자가 아이를 낳았을 적에 사회경제적 지원 이전에 우리 모두가 좀 부드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톨로런스가 있으면 사실 여자가 어떻게 해서든지 키울 수 있다고 본다"라며 여성의 원치 않는 임신·출산을 사회적 태도로 해결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물론 이는 미혼모, 빈곤층 아동 등에 대한 사회적 포용력을 길러야 한다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다만 뒤이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존중 이전에 우리가 얼마나 (아이에 대한) 관용이 있는 사회인가 반성이 필요하다"는 당시 발언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김 후보자의 이 같은 발언은 결국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미사여구"라는 등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부정하는 취지의 지난 발언과 맥락적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김 후보자는 지난 15일 인사청문준비단 사무실로 출근하는 도중 진행한 약식 기자회견에서 '임신중단에 대한 후보자의 입장이 궁금하다'는 질문에 "여성 자기결정권이라는 미사여구 포장 뒤로 감춰진 낙태의 현주소를 여쭙고 싶다"며 "경제적 능력이 안 되거나 미혼 부모가 될지 모르는 두려움, 청소년 임신 등 어쩔 수 없이 낙태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낙태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넣을 수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관련하여 한국여성의전화는 지난 19일 논평을 내고 "여성의 권리와 건강을 보장하는 정책을 고안하고 수행해야 할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의 발언이라기에는 믿기 힘들 정도로 여성인권에 관한 무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라며 "또다시 여성가족부 업무 수행의 기본도 갖추지 못한 자가 장관 후보로 등장했다"라고 평한 바 있다.

한편 김 후보자는 21일 오전 입장문을 내고 "가짜뉴스가 도를 넘어 살인병기가 됐다"라며 본인을 향한 언론보도에 반발했다.

입장문에서 김 후보자는 "제 ('톨로런스' 관련) 발언의 방점은 '여자가 아이를 낳았을 적에'다. 이들(산모와 아이들)을 여가부에선 위기 임산부, 위기 출생아라고 한다. 여가부의 정책 서비스 대상이다. 당연히 여가부와 국가가 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전에 우리가 이들에 대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이라며 "'여성이 설사 강간을 당해 임신했더라도 낙태는 불가하며 무조건 출산해야 한다'는 생각을 단 1초도 가져본 적이 없다"라고 본인의 발언을 해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제가 언제 헌재의 (낙태죄) 헌법불합치를 결정을 부정했나? 헌법불합치 결정은 (해당 방송으로부터) 한참 후인, 2019년 4월에 내려졌다"라며 "(관련 보도들은) 검증이라는 명분으로 쏟아내는 가짜뉴스, 살인병기"라고 말했다.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며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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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섭

몰랐던 말들을 듣고 싶어 기자가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비겁하고, 조금이라도 더 늠름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현상을 넘어 맥락을 찾겠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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