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제 파시즘'이 낳은 괴물은 왜 "일본 진의 알아줄 시대 온다" 했나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37] 전범 재판은 승자의 재판인가⑧ 도쿄 재판(下-2)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20세기 전반기 독일 파시즘을 낳은 괴물이라면,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는 일본 군국주의, 이른바 '천황제 파시즘'이 낳은 괴물이다. 둘 다 한 국가를 거대한 병영(兵營)으로 바꾸고 온 국민을 전쟁의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데 그치지 않고 이웃 나라 사람들을 괴롭히는 전쟁범죄의 공범자로 만들었다.

지난 주 글에서 살펴보았듯, 도조는 "이 전쟁을 함으로써 국제 범죄자가 되어 승자에게 기소 당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23일 다른 6명과 함께 교수형으로 처형되기 앞서 그가 내뱉은 말은 이러했다. "아무리 분석해 봐도, 도쿄재판은 정치적인 재판이었어. 그것은 오로지 전쟁에서 이긴 자들의 정의였어."

1941년 10월부터 1944년 7월까지 일본전시내각의 총리, 육군대신, 육군참모총장을 겸임했던 도조 히데키는 히로히토 일왕과 더불어 아시아·태평양전쟁(일본의 용어로는 '대동아전쟁')을 이끌었던 침략전쟁 과정에서 벌어졌던 전쟁범죄의 주역이었다. 도조가 어떤 성향을 지녔는지, 그의 됨됨이는 어땠는지 짧게 살펴보자.

'돌격 앞으로!' 외친 구식 군인

도조는 1884년 육군 장교였던 도조 히데노리(東條英敎)의 3남으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도쿄. 히데노리는 일본 육군대학(1기)을 수석 졸업할 만큼 머리가 뛰어났고, 전술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 아들 히데키와는 달리, '착검하고 돌격 앞으로!' 식의 마구잡이 공격을 반대했다고 알려진다. 히데키는 군인이 되길 바라는 부친(최종 계급은 중장)의 뜻에 따라 육군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17기)를 거쳐 직업군인이 됐다. 육군대학을 마친 뒤인 1921년 스위스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한 적도 있다.

도조는 "우리가 인격을 지녔다면 천황폐하는 신격을 지녔다"면서, 일왕을 신으로 여기고 절대 충성을 바치는 황도주의 신봉자였다. 만주를 비롯한 중국 대륙으로의 침략(그의 용어로는 '진출')이 대일본제국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 외쳐댔음은 말할 나위 없다. 만주 관동군 헌병대사령관(1935)을 거쳐 관동군 참모장(1937)으로 승진하면서 중일전쟁으로의 길을 닦았다. 당시 그는 중국과의 화평보다는 무력에 의한 철저한 제압을 주장하는 전쟁 확대파의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육군차관(1938), 육군대신(1940)으로 올랐을 땐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며 주전론을 펴는 육군 강경파를 대변했다.

관동군 참모장으로 있을 때 일을 빠르게 처리해 '가미소리'(剃刀, 면도날)란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전술·전략 이론을 공부한 젊은 장교들의 눈에 비친 도조는 낡은 '돌격 앞으로!' 전투 개념을 지닌 답답한 구식 군인이었다.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고전하던 일선 지휘관이 병력을 재정비하는 1보 후퇴를 했을 경우, 그것을 전술적 후퇴로 보질 않고 마구 호통을 쳤다. 극단적으로 군인정신을 강조하는 도조의 태도는 지휘관들의 빈축을 사기 마련이었다. 이와 관련한 요시다 유타카(히도쓰바시대학, 일본근현대사)교수의 글을 보자.

[1944년 5월 도조는 육군항공사관학교를 예고 없이 시찰했다. 도조는 한 생도에게 '적기를 무엇으로 떨어뜨리나?'라고 물었다. 그 생도가 '기관총'이라고 답하자, 도조는 '틀렸다'며 이렇게 말했다. "적기는 정신력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기관포로도 떨어지지 않는 경우에는 몸으로 공격을 감행해서라도 격추하는 것이다](요시다 유타카, <아시아·태평양전쟁> 어문학사, 2012, 174쪽).

▲ 일본 총리 관저 홈페이지에 실린 도조 히데키의 사진과 이력. 도조 히데키는 육군대신과 참모총장을 겸임했다.

헐 미 국무, "도조는 현명하진 않지만 박력 있어"

도조가 떠난 뒤, 혼란스러워하는 생도들에게 육군항공사관학교 교장과 생도대장은 "지금까지의 지도 방침을 바꾸지 않겠다. 과학적 정신이 중요하다"고 다독였다. 그들은 도조의 극단적 군인정신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셈이다. 도조가 총리대신(1941년 10월) 자리에 오르자, 불과 두 달 뒤 진주만 공습(1941년 12월)으로 일본을 전쟁으로 몰아간 것은 그의 성향으로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닐 듯하다. 도조가 총리대신이 올랐을 무렵, 미 국무장관은 코델 헐(Cordell Hull)이었다. 헐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다 도조를 이렇게 평했다.

[도조는 전형적인 일본 군인으로 견식이 좁고 직선적이고 외곬으로 나아가는 인물이었다. 그는 완고한데다 고집이 세며, 현명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얼마간 박력이 있는 인물이다](호사카 마사야스,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 페이퍼로드, 2012, 315쪽).

여기서 도조에게 '박력'이 있다는 것은 진주만공습을 저질러 일본을 끝내 패전으로 몰아갔던 돈키호테식 '돌격 앞으로!'를 비꼬아 한 말로 여겨진다. 도조의 사생활은 그런대로 깨끗했다. 아내가 헝겊을 덧대 꿰매준 헌 양말을 신고 다니는 등 검소하게 지냈다. 이런 얘기도 전해진다. 육군대신으로 있을 때 관저가 아닌 그의 개인 집을 고치게 됐다. 도조는 목수에게 '전시 하에서 배급제로 공급되는 목재를 육군대신의 집이라 내세워 특별 공급 받으려 하지 말라'고 했다. 그 때문에 집을 고치는 데 1년 가까이 걸렸다. 대인관계에서도 잡음이 나지 않도록 조심했다. 전에 알고 지내던 중견 장교들과의 사적인 만남을 끊고 결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사이판 함락으로 히로히토 신임 잃어

도조가 총리-육군대신-육군참모총장에서 물러난 것은 1944년 7월 마리아나 제도의 사이판 섬을 미군에게 빼앗긴 바로 뒤였다. 일본 본토에서 2400km 떨어진 사이판 섬을 미군이 점령했다는 것은 수도인 도쿄를 포함해 일본 본토가 B-29 폭격기의 사정권 안에 넉넉히 들어오는 것을 뜻했다(B-29의 항속거리는 5300km). 사이판의 군사적 중요성을 도조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에 4만4000의 병력으로 사이판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미군의 압도적 화력에 밀려 실패했다.

일본 수비군이 전멸(일본쪽 용어로는 '옥쇄')하고 막을 내린 사이판 전투는 한 마디로 전쟁의 운동장이 기울었음을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일본의 패배가 머지않아 곧 다가왔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그 뒤의 상황은 '절망적 저항'의 나날이었다. 만에 하나 일본이 그때 강화든 항복이든 어떤 형태로든 전쟁을 끝내려고 노력했다면 어땠을까.

여러 군사전문가들이나 역사가들은 그 무렵에 일본이 전쟁을 끝냈어야 했다고 지적한다. 그랬다면 일본이 1945년에 겪었던 일련의 파국과 고통(1945년 3월의 도쿄 대공습과 8월의 원자폭탄으로 비롯된 참화 등)을 피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히로히토와 일본 군부는 '마지막 일격으로 종전 협상에서의 발언권을 강화함으로써,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끝낸다'는 이른바 '일격 강화론'에 매달려 조기 종전 기회를 놓쳤다. 그로 말미암아 숱한 인명 피해를 낳았다.

(전쟁 말기에 도쿄, 나고야를 비롯한 일본 주요 도시들의 민간인 주거지역을 무차별 폭격했던 미국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이와 아울러, 히로히토와 도조를 비롯한 일본 전시지도부는 '일격 강화론'이란 비현실적인 계획 아래 조기 종전의 기회를 날린 책임을 져야 한다. 이에 대해선 도쿄 대공습과 원폭을 살펴보는 항목에서 따로 더 다룰 예정이다).

1944년 7월 사이판 함락으로 일본 전시지도부는 커다란 위기감에 휩싸였다. 이른바 '조기 화평파'라 일컬어지는 도조의 정치적 경쟁자들은 '도조 총리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쑥덕거렸다. 당시 도조는 잇단 패전으로 일왕 히로히토의 신임을 잃었다는 느낌을 가졌기에, 주위 사람들에게 총리직에서 물러나야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형식상으론 도조가 왕궁으로 가서 히로히토에게 '내각 총사직을 상주(上奏)'하는 것으로 이뤄진 도조의 퇴진은 바로 그런 분위기 아래서 이뤄졌다.

히로히토 고모부가 도조 사임을 말린 까닭

하지만 그 무렵 도조의 사임을 말린 사람들이 있다. 히로히토의 고모부였던 히가시쿠니 나루히코(東久邇稔彦)가 그 가운데 하나다. 히가시쿠니는 메이지 일왕의 딸과 결혼했다. 따라서 메이지 일왕의 손자인 히로히토는 히가시쿠니에게 조카가 되는 셈이다(히가시쿠니는 일본 황족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 총리를 지냈다. 1944년 도조가 총리에서 물러나자 '총리 권한대행'을 짧은 기간 맡았고, 1945년 8.15 패전 이틀 뒤인 1945년 8월 17일부터 1945년 10월 9일까지 54일 동안의 단명 총리였다).

히로히토의 고모부이자 친왕(親王)으로도 불렸던 히가시쿠니가 도조의 사임을 말린 이유는무엇일까. 다름 아닌 히로히토 일왕을 침략전쟁의 책임으로부터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로이터통신 파리 특파원을 지내며 알제리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취재 보도했던 프랑스 언론인 에드워드 베르가 남긴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Hirohito, Behind the Myth, 1989)에서 관련 대목을 옯겨본다.

[히가시쿠니는 교활한 의도에서 도조의 사임을 말렸다. 도조나 일본의 장래를 생각했다기보다 천황제 유지에 목적이 있었다. 과거 4년 동안 일어났던 일에 대해 히로히토가 책임을 지지 않게 만드는 작업이었다. 전쟁이 악화되는 동안 도조가 현직에 있으면 모든 책임은 히틀러와 같이 그의 몫이 되어 희생양을 만들 수 있지만, 내각이 교체되면 도조의 책임은 당연히 희석되고 대신 황실로 전가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에드워드 베르,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2002, 387쪽).

도조가 히가시쿠니의 속셈을 알아챘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그는 사이판 함락 9일 뒤 전시지도부 우두머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무대 뒤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45년 8월 항복 때까지도 일본 육군 안에서의 인맥을 이용해 막후에서 대미 강경투쟁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사이판 함락 뒤 일각에서 줄곧 내밀었던 조기 강화론을 육군이 거부하고 나선 데엔 도조의 입김이 알게 모르게 서려 있었다.

▲ 1942년 12월 '대동아전쟁' 1주년 기념식장. 도조 히데키 총리와 왕징웨이 난징괴뢰정부 주석(가운데)이 보인다. Ⓒ위키미디어

"일본의 진의를 알아줄 시대 온다"

히로히토의 희생양으로 도조를 내세우려 했던 히가시쿠니의 교활한 의도는 1945년 패전 뒤 현실로 나타났다. 도쿄 재판에서 히로히토가 불기소되고, 도조 히데키가 전쟁범죄의 공범인 히로히토의 죄를 덮고 죽음으로써 결과적으로 히가시쿠니의 뜻대로 됐다.

교수형을 앞둔 도조의 유서라고 알려진 문건은 여러 건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스가모 구치소에서 교회사(敎誨師)로 일했던 하나야마 신쇼에게 남긴 유서다. 하나야마는 불교 법사로, 당시 도쿄대학 문학부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죽음을 앞둔 도조에게 하나야마와의 만남은 나름 위로가 됐을 것이다.

도조에게 교수형 판결(1948년 11월12일)이 내려진 닷새 뒤, 도조는 미군 작업복 차림으로 미군 장교 3명과 함께 하나야마가 있는 법당으로 들어섰다. 도조의 왼손은 미군 장교의 오른 손과 수갑으로 함께 묶여져 있었다. 혹시나 모를 자해 행위를 막기 위해서였다.

도조는 호주머니에서 메모 수첩을 꺼내 먼저 가족에게 전해달라며 교회사 하나야마에게 그 특유의 큰 목소리로 읽어내려 갔다. 자신의 건강 상태가 매우 좋고 정신 상태 또한 평정심을 지니고 있고, 재산 몰수 판결이 없었으니 집을 계속 소유할 수 있다며 가족을 안심시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하나야마 선사에게 진술할 요건'이라는 제목을 붙인 4개 항목이 적힌 또 다른 메모를 건네주었다. 내용은 이렇다.

[모든 책임을 내가 지지 못하고 많은 동료들이 중죄에 처해지게 된 것을 괴롭게 생각한다. 본 재판으로 폐하께 누를 끼쳐서는 안 될 것이다. 패전 및 전화(戰禍) 때문에 울고 있을 동포를 생각하니 죽어서도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것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재판 판결 그 자체에 대해선 지금 말하고 싶지 않다. 세계 지식인들의 냉정한 비판을 거쳐 일본의 진의가 무엇이었는지를 알아줄 시대가 올 것이다. 생각컨대 그 사람들(전사자, 전상자, 전쟁피해자 및 그 유가족)은 뜨거운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죽고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다한 자들이다. 전쟁에 대하여 죄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 지도자의 죄이지 그들에게는 추호도 죄가 없다](호사카 마사야스, 664-665쪽).

헤르만 괴링과 닮은 꼴

재판 자체에 말하고 싶지 않다면서도, '일본의 진의를 알아줄 시대'가 올 것이라는 도조의 유서에서 언젠가 훗날 미국과 전쟁을 벌인 것은 일본의 안보를 위한 자위(自衛) 차원이었고, 서구 제국주의자들로부터의 아시아 해방과 일본의 안보를 위해서였다는 평가가 내려질 것이란 헛된 기대감이 묻어난다. 이는 마치 지난 글(본 연재 32)에서 헤르만 괴링이 승리자인 적에게 자신은 죽음을 맞이하지만, '50년만 지나면 그의 시신은 대리석 관에 뉘어지고 국가적 영웅, 순교자로 국민들의 추앙을 받게 될 것'이라 생각하는 모습과 판박이다.

도조의 괴링과 닮은꼴은 또 있다. 일반 국민들에겐 죄가 없다는 주장에서다. 괴링이 법정에서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믿고 그의 권위주의 정부를 따랐을 뿐이고, 전쟁범죄에 관련된 사건들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에 '독일인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했다(나치 정권 아래서 박해를 받았던 실존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를 비롯한 독일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나치 히틀러 정권을 지지했던 독일인들의 '집단적 책임'을 말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 본 연재 33 참조).

괴링과 마찬가지로 도조는 일본 국민들, 특히 전사자들과 그 유족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했다. 일본이 벌인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2000만 명이 죽고 숱한 전쟁범죄가 저질러졌다. 그런 비극적 상황에서 히로히토와 도조를 믿고 따랐을 뿐이니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자성(自省)사관에 바탕을 두고 일본의 과거사를 반성적으로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사람들은 물론 도조의 그같은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

▲ 사이판 섬에 상륙한 미 해병대원들. 1944년 7월 사이판이 함락되자 히로히토의 신임을 잃은 도조 히데키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위키미디어

'일본의 괴벨스'가 고쳐준 3통의 유서

패전 뒤 일본 출판계에서는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죽은 이들이 남긴 글을 모아 책을 내는 것이 한 때의 흐름이었다.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나 유서, 전선 참호에서 웅크리고 앉아 쓴 일기, 쪽지 메모 같은 것들은 죽음을 앞둔 군인들이 느끼는 공포와 가족을 향한 그리움, 지난 삶에 얽힌 회한 등이 담겨 읽은 이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그런 출판물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2)으로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뒤인 1953년에 '스가모 유서편찬회'가 펴낸 <세기의 유서>(世紀の遺書)다.

741쪽 분량으로 두툼한 <세기의 유서>는 도쿄 재판에서 처벌받은 A급 전범들과 필리핀과 싱가포르 등지에서 벌여졌던 현지 전범재판에서 포로학대 등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처형된 BC급 전범자 692명이 남긴 글들로 편집됐다. 죽음을 바로 코앞에 둔 이들이 남긴 글이라서 독자들의 눈길을 끌만 했다. 1984년 고단샤(講談社)에서 신판으로 다시 냈다. <세기의 유서>에 도조 히데키의 유서도 들어있다. 앞서 살펴본 교회사 하나야마에게 남겼던 유언과는 다른 문건이다.

1945년 9월11일 미군 헌병에게 붙잡혀 감옥으로 가기 전에 도조는 모두 3통의 유서를 만들어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있었다. 도조의 은밀한 부탁을 받아 그 유서 초고를 검토하면서 내용을 보태고 빼는 수정작업을 했던 자는 극우 언론인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 1863-1957)였다.

일본의 극우언론사 <국민신문>의 소유주였던 도쿠토미는 조선반도의 합병에 이어 만주를 비롯한 대륙 진출을 외쳐댔던 군국주의자였다. 1910년 한일병합 뒤 조선총독부로 하여금 기관지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를 운영하도록 제안했고, 언론 장악을 통한 한반도 억압·수탈 정책에 영향을 미쳤던 자다. 도쿠토미는 <국민신문> 간부들을 <경성일보> 사장을 비롯한 주요 보직에 앉히고 조선 언론을 휘둘렀다. 그 자신은 가끔씩 일제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설을 실었다.

언론인 정일성은 <도쿠토미 소호>(지식산업사, 2005)에서 도쿠토미를 가리켜 '일본 군국주의의 괴벨스'라 불렀다. 정일성에 따르면, 춘원 이광수는 창씨개명 뒤 도쿠토미에게 '비로소 당신의 아들이 되었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런 도쿠토미에게 도조가 자신의 유서를 손봐달라고 부탁했으니, 유서의 논조가 어땠을까는 읽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도조가 도쿠토미에게 보여준 유서 3통은 '영미인에게 고함'(400자 분량), '일본 동포 국민 제군'(480자 분량), '일본 청년 제군에게 고함'(300자 분량)으로 이름 붙여졌다. 그 유서들은 제목만 다를 뿐 하나만 읽어도 될 정도로 동어반복으로 같은 내용이다. 일본은 '자존 자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했기에 궁극적인 전쟁 책임은 미국에 있고, 일본은 '천황'(일왕)을 정점으로 한 신국(神國)이어서 불멸할 것이라는 궤변이 담겨 있다.

▲ 야스쿠니 신사 옆에 있는 전쟁박물관 유슈칸(遊就館)에 전시된 도조 히데키의 유품. Ⓒ김재명

"미국이 조선을 둘로 나누는 잘못 저질러"

전승국 미국이 자신을 '승자의 정치적 재판'을 통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생각은 도조가 남긴 유서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히로히토 국왕과 국민들에게 패전에 대해선 전시내각의 책임자로서 사죄를 하면서도, 일본이 침략전쟁으로 벌인 전쟁범죄에 대해선 무죄를 주장했다. <세기의 유서>에 들어가 있는 도조의 아래 유서는 그 내용으로 미뤄 미군 헌병에게 체포될 때 도조가 책상서랍에 놔두었던 유서 3통 가운데 '영미인에게 고함'으로 보인다.

[도쿄 재판은 정치적 재판이며, 미국과 영국은 세 가지 큰 과오를 저질렀다. 공산주의에 대한 최후의 보루인 일본을 파괴하고, 만주의 공산화를 방치했으며, 조선을 둘로 나누었다. 이는 반드시 큰 문제를 일으키고 말 것이다. 미국은 일본이 공산화되지 않도록 보호할 책임이 있다. 인간의 (폭력적이고 탐욕적인) 본성은 바꿀 수 없으며, 따라서 제3차 세계대전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 군부가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과오'에 대해선 사죄한다. 미국은 원폭과 무차별 폭격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巢鴨遺書編纂會, <世紀の遺書> 巢鴨遺書編纂刊行事務所, 1953, 683-685쪽).

도조의 유서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미국이 조선을 둘로 나누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지적이다(도조가 유서를 쓸 무렵 이미 남북한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내세운 미군·소련군에게 북위 38도를 분기선으로 분할 점령됐다). 일본인들이 '국체'(國體)라고 여기는 '천황제'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공산주의를 미워했던 도조는 한반도를 소련과 나눠 점령할 것이 아니라, 미국 혼자서 점령하길 바랐다.

조선을 둘로 나눈 것이 '반드시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란 도조의 불길한 전망은 6.25 한국전쟁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은 남북 분단이란 불행의 씨앗을 뿌린 것은 일본이란 점이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없었다면, '일본군 무장해제'란 명분을 내세워 외국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도조는 유서에서 남북분단을 미국 탓이라 돌렸지만, 일본의 책임도 크다는 점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국민에게 명령·훈계하는 '도조식 무책임론'

도조가 남겼던 유서는 <세기의 유서>가 나오기 1년 전인 1952년 일본 월간지 <中央公論>에 부분적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도조의 유서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은 엇갈렸지만, 다수는 차가운 쪽이었다. 이와 관련, 호사카 마사야스의 글을 참고로 옮겨본다.

[법학자 가이노 미치타카는 이 잡지(中央公論)에 기고한 글에서 "도조는 결과를 말하지 않은 채 '정리공도(正理公道)는 나에게 있다'고 역설할 뿐이며, 국민에게 명령하고 청년 제군에게 훈계하는 듯한 심경을 패전 후에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 도조식 무책임론의 내용을 충분히, 아니 그 이상으로 찾아볼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런 비판이 당시 일본인들의 평균적인 생각이었다](호사카 마사야스, 590쪽).

위 유서에서 새삼 확인된 것은 도조는 교수형으로 처형될 때까지도 자신의 죽음이 '승자의 재판'에 따른 것이란 생각을 꺾지 않았다는 점이다. 도조는 그가 책임져야 할 일본 군부의 전쟁범죄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를 하지 않았다. '일본 군부가 저질렀을지도 모를 과오'에 대해 사죄한다고 에둘러 말했을 뿐이다. '저질렀을지도 모를 과오'는 '저지른 과오'와는 어감이 전혀 다르다. 죽음을 앞둔 인간은 마음을 비우고 겸허·솔직해진다는 말은 안타깝게도 도조에겐 들어맞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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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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