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히토는 왜 인도 판사에게 1급 훈장을 달아줬나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35] 전범 재판은 승자의 재판인가 ⑥ 도쿄 재판 (中)

도쿄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 바로 옆에는 유슈칸(遊就館)이라 일컬어지는 전쟁박물관이 있다. 일본 전국에서 '역사 수업'이란 이름 아래 몰려드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유슈'(遊就)라는 단어는 우리말에는 없는 일본식 한자다. '고결한 인물을 본받는다'는 뜻을 지녔다. 하지만 평화와 인권의 잣대로 봐서 결코 '고결한 인물'일 수 없는 자들의 사진과 유품, 어록이 버젓이 전시돼 있다. 이를테면,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비롯해 도쿄 전범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처형된 전범들과 관련된 것들이다.

지난 8월13일과 15일 이틀에 걸쳐 유슈칸을 가봤다. 건물 입구에 눈길을 끄는 비석이 하나 서 있다. '팔 박사 현창비(顯彰碑)'란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다. 여기서 '팔 박사'란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의 11인 판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인도 출신 법관 라다비노드 팔(Radhabinod Pal, 1886-1967)을 가리킨다. 2005년에 이 송덕비를 세우면서 야스쿠니 신사 책임자인 궁사(宮司)가 쓴 비문 내용을 보자.

[대다수 연합국의 복수 열기와 역사적 편견이 점차 수그러드는 현재 팔박사의 재정(裁定)은 바야흐로 문명세계의 국제법학계에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일본이 송덕비까지 세운 까닭

팔 판사는 도조 히데키 등 일본의 주요 전범들에게 교수형 등 유죄판결을 내렸던 도쿄 극동군사재판부의 판결(다수 의견)에 맞서 "침략이 범죄인지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또한 이미 지난 일을 소급 입법으로 처벌하면 안 된다.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피고인 전원이 무죄다"라며 반대 의견서를 써냈던 특이한 인물이다.

위의 야스쿠니 궁사가 주장처럼, 팔 판사의 소수의견이 국제법학계의 정설(다수의견)이 됐을까. 전혀 아니다. 침략과 인권침해를 전쟁범죄로 보는 21세기의 법학계 주류의 잣대로는 여전히 '소수의견'일 뿐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제2차 세계대전 뒤 이어져왔던 인권 개념의 확대로 말미암아 이젠 그런 주장을 함부로 내걸기도 어렵다. 하지만 일본은 우경화 흐름 속에 분위기가 다르다.

돌이켜 보면, 패전 뒤 전범국가로 몰려 주눅이 들었던 일본으로선 얼마나 고마웠으면 송덕비까지 세웠을까 싶다. 비석뿐 아니다. 류슈칸 안에는 팔 판사 단독 공간이 있다. 도조 히데키를 비롯해 도쿄 재판에서 처형된 전시 지도자들의 작은 사진 위에다 그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아울러 팔 판사가 일본 극우들의 초청을 받아 1956년 11월6일 히로시마 고등법원 강당에서 했던 강연 내용의 일부를 이렇게 옮겨 놓았다.

[나는 1928년부터 1945년까지의 18년 역사를 2년 8개월에 걸쳐 조사했다. 그것을 나는 판결문 안에 적었다. 그 판결문을 읽으면 서구야 말로 미워할 아시아 침략의 장본인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많은 지식인들은 거의 그것을 읽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아들딸들에게 '일본은 범죄를 저질렀고, 일본은 침략 폭거를 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만주사변에서 대동아 전쟁에 이르는 진실한 역사를 부디 내 판결문을 통해 충분히 연구해주기 바란다. 일본 자제들이 왜곡된 죄책감을 지는 것을 못 본 체 하고 지나칠 수 없다. 잘못된 전시 선전 기만을 불식하라. 잘못된 역사는 다시 써야 한다.]

▲ 야스쿠니신사 바로 옆 류슈칸(전쟁박물관)에 크게 마련된 라다비노드 팔 판사 사진과 어록. Ⓒ김재명

"침략이 범죄인지 단정 어렵다"며 무죄 주장

도쿄재판의 판사 11명 가운데 인도 출신 라다비노드 팔과 필리핀 출신 델핀 하라니야(Delfin Jaranilla)는 다른 9명보다 늦게 판사로 지명된 탓에 재판부 합류도 보름쯤 늦었다. 재판 진행을 하면서 드러난 사실이지만, 늦게 합류한 두 사람 가운데 팔은 '피고인 전원 무죄'를, 하라니야는 '피고인 전원 사형'을 주장했다.

(하라니야 판사는 일본군이 필리핀을 점령했을 때 붙잡혀 '바탄 죽음의 행진' 길을 미군 포로들과 함께 걸었고, 포로수용소에서 죽을 고생을 했다가 살아남은 인물로 알려진다. 하라니야의 이런 이력 때문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자면, 도쿄재판 판사로 위촉받았을 때 본인이 사양했어야 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팔은 재판부에 합류하자말자 '도쿄 재판은 승자의 정치 재판'이라는 신념을 주위에 밝히면서 반대의견을 작성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재판 후반부엔 혼자 방에서 문건 작성에 몰두하느라 법정에 얼굴을 내밀지 않고 빠지는 날이 잦았다. 김석연(국민대 국제학부)교수는 UPI 통신사 특파원으로 동경재판을 취재했던 아놀드 브랙먼이 남긴 책 <The Other Nuremberg>(Collins, 1989) 등을 바탕으로, 팔 판사가 도쿄 재판에서 어떠한 견해를 보였는가를 이렇게 적고 있다.

[동경재판에서 팔의 옆자리에 앉았던 네덜란드의 버트 뢸링(B.V.A. Röling) 판사는 팔이 도착 직후 반대의견서를 쓰겠다는 의도를 명확히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뢸링은 1983년 동경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팔은 일본이 싸운 전쟁이 처음부터 아시아 해방전쟁이었으며 침략전쟁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그것은 침략전쟁을 통해 식민지체제를 확립한 서구열강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증언했다](김석연,「동경재판과 '평화에 反한 죄'-라다비노드 팔의 죄형법정주의」일본연구 제16호, 2011).

1948년 11월 도쿄재판이 마무리하면서 팔은 도조 히데키를 비롯해 A급 주요범죄자들을 무죄로 판단해야 한다는 소수 의견으로 '반대 의견서'를 냈다. 팔이 제출한 의견서는 분량이 1235쪽에 이른다. 윌리엄 웹 재판장이 엿새에 걸쳐 읽어 내려갔던 판결문과 거의 같은 분량이다(팔의 의견서는 http://www.sdh-fact.com/CL02_1/65_S4.pdf 참조 바람).

"도쿄재판은 사후입법에 따른 승자의 정의"

팔 판사의 반대 논리를 요약하면 두 가지다. 첫째, 침략전쟁은 국제법상 전쟁범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침략전쟁'이라는 개념 정의는 국제법상 존재하지 않았기에, 통상적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범죄로 여겨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팔 판사의 논리는 재판중 변호인들이 펼쳤던 주장과 똑 같았다. 뉘른베르크에서 독일쪽 피고인들이 폈던 주장과 마찬가지로 일본 변호인들은 "전쟁범죄란 승자가 패자에게 붙인 낙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둘째, 도쿄 재판의 법적 근거인 '도쿄 극동군사재판소 헌장'은 전쟁이 끝난 뒤 만들어진 이른바 사후(事後) 입법이며 따라서 (예전의 죄를) 소급해서 처벌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뉘른베르크 재판과 도쿄 재판에서 나온 새 개념인 '평화에 반하는 죄'와 '인도에 반하는 죄'를 소급 적용하는 것도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반대 의견서를 매듭지었다. "나는 모든 피고인들이 공소장에 있는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쿄 재판 당시에 변호인단은 "이 재판은 승자의 '사후심판'에 해당 된다"고 주장했지만, 도쿄 재판보다 빨리 끝났던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도 이와 똑같은 주장이 되풀이돼 나온 바 있다. 팔 판사의 논리도 뉘른베르크 재판 때 나왔던 것과 같았다. 유하영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의 글을 보자.

[사실 팔 판사 견해는 뉘른베르그 재판에서 제기된 주장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 것이었다. 특히 침략전쟁이라는 개념 정의는 국제법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단지 '승자에 의해 패자에게 붙여진 딱지'(a label applied by conquerors to the conquered)이라는 주장이었다](유하영,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극동지역 전시범죄 재판 개관」, 동북아연구 34권 1호, 2019).

팔 판사는 의견서에서 '복수에 대한 갈증을 만족시키기 위한(for the satisfaction of a thirst for revenge) 법적 절차'이란 자극적인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분명히 도발했고 일본이 행동하기를 기대했다'고까지 주장했다. 법정에서 일본쪽 변호인들과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피고인들이 주장했던 '일본의 자위전쟁론'에 손을 들어준 셈이었다.

팔은 의견서에서 도쿄 재판이 '승리자의 정의를 위한 행사'라는 것은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의 민간인 주거지역에 대한 무자비한 전략폭격과 원자폭탄 사용을 범죄 목록에서 빼놓았고 △패전국(일본)의 판사들을 재판부 구성에서 빼놓은 것에서 드러난다고 여겼다. 따라서 도쿄 재판은 '승리자들이 보복할 수 있는 기회 외에 다른 것을 제공하지 못한 재판소의 실패'(failure of the Tribunal to provide anything other than the opportunity for the victors to retaliate)를 뜻한다고 주장했다.

▲ 일본의 전쟁범죄를 무죄라 주장했던 인도 판사 라다비노드 팔(Radhabinod Pal, 1886-1967). 위키미디어.

"난징 학살 책임자도 무죄다"

팔 판사는 나아가 "전쟁은 국가가 책임을 지는 것이지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전쟁지도부 개인은 국제법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점령지역의 일반 시민들과 전쟁포로들에게 잔혹행위를 저질렀음을 인정하면서도, 일본의 전시내각 구성원들이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을 반대했다. 동남아 각지에서 벌어졌던 BC급 전범재판으로 일본의 전쟁범죄 처벌을 끝내야지, 지도부 개인에까지 죄를 묻는 것은 '공평한 정의가 아닌 보복 행위'라 여겼다.

일본군의 성폭력과 마구잡이 학살로 30만 명쯤이 희생당한 것으로 알려진 난징학살(1937)에 대해서도 팔 판사는 다른 판사들과 생각이 달랐다. 그는 난징 현지에 파견된 일본군의 잔혹행위는 인정하면서도 전쟁 지도부를 처벌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 중지나방면군 사령관 겸 상해파견군 사령관으로서 난징 학살을 막지 못한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 대장에게 '부작위(不作爲)의 죄'(사령관으로서 마땅히 조치해야 할 행위를 하지 않은 죄)를 물은 다수의견에 맞섰다.

심지어 그는 "나는 이미 발표된 난징 '강간'에 대한 기사들도 과장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도 했다. 팔 판사는 일본의 국가주권과 자위권을 옹호했지만,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난징 학살에 대해선 본 연재 3 참조).

도조 히데키, "나는 그때를 위한 초석"

팔 판사의 소수의견은 공식 판결문에 첨부됐지만, 판결이 내려졌던 1948년 11월 당시 대외적으로 공개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팔 판사의 주장을 담은 의견서 요지는 변호인을 통해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피고인들에게 전해졌다. 피고들은 '이 분이 우리의 뜻을 잘 이해하고 있구나' 하며 얼굴이 환해졌다고 한다. 특히 도조는 변호인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언젠가 (팔 판사의) 이 주장이 세계에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때를 위한 초석입니다"(호사카 마사야스,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 페이퍼로드, 2012, 663쪽).

히데키가 자신의 희생을 '초석'이라 말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우경화 흐름'이라는 큰 틀에서의 일본 전후 역사를 제대로 꿰뚫어본 셈이다. 호사카 마사야스는 팔의 판결문이 도조의 죽음에 '새로운 순교자로의 명분'을 제공했다고 풀이한다. 호사카는 <쇼와 육군>(1999)과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2005)라는 두 권의 두툼한 일본근대사 관련 역작을 써낸 작가다. 그는 팔 판사가 일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잘못된 소수의견을 냈고, 일본 극우파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이고 세력을 키우는 데 팔의 논리를 적극 이용하고 있다고 풀이한다.

[팔의 판결문에는 일본의 실제사정에 관해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점도 포함돼 있다. 팔은 '그들(일본의 전시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론을 따랐다'고 썼다. 많은 자료를 독파하고 많은 증인을 만났다고 팔은 말했지만, 자료는 모두 공식 간행된 것들이었고 증인은 (군국주의)시대의 지도자들이었기에 그가 시대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는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의) 일본 여론이 (삼엄한 검열 탓에) 폐쇄돼 있던 상황을 전혀 간파하지 못했다](호사카 마사야스, 663쪽).

반영 반서구 감정에서 일본을 옹호?

일본 전범자들의 손을 들어줬던 팔 판사는 어떤 배경을 지닌 인물일까. 그는 1886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현재의 방글라데시) 벵갈 지역의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지방 대학에서 수학 학사와 석사를 받은 뒤 회계사 사무소와 대학 수학 강사로 지냈다. 그러다 다시 캘커타 대학에서 법을 공부해 법률가가 됐다. 캘커타 고등법원 판사(1941), 캘커타대학 부총장(1944)을 지내다가 도쿄재판소 판사가 됐다.

팔 판사는 왜 그렇게 일본 전쟁범죄 옹호에 나섰을까. 작은 실마리가 하나 있다. 도쿄 재판에서 팔 판사의 바로 옆에 앉았던 네델란드 출신 버트 뢸링 판사의 증언이다(뢸링은 무죄 의견을 냈던 팔 판사와는 달리 법리적 측면에서 개인 의견서를 냈었다. '평화에 반한 죄'가 도쿄 재판에 소급 적용될 수 있는가, 침략전쟁을 일으킨 개인에 대해 형사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지 등에 초점을 맞춘 의견서였다. 뢸링 판사에 대한 박규훈(방송통신대)의 글에는 팔 판사의 이념적 성향을 짐작할 수 있는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1977년 뢸링이 이탈리아 출신의 국제법 학자이자 판사였던 안토니오 카세세(Antonio Cassese)와 했던 인터뷰에 따르면, 팔은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아시아 식민통치에 커다란 반감을 지녔다. 뢸링은 팔이 아시아태평양전쟁 중에 일본의 원조를 받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려 했던 인도국민군(INA)에 관여한 적이 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급진적 무장독립운동단체였던 INA는 일제가 내걸었던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라는 기만적인 정치선전에 동감하면서 대영 무장투쟁을 폈었다. 뢸링에 따르면, 팔은 INA와 그 지도자 챤드라 보슈의 열렬한 지지자였다(박규훈,「도쿄재판의 뢸링 판사 반대의견에 대한 비판적 고찰」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제21권 2호, 2022 참조).

팔의 고향 벵갈 지역은 인도의 다른 지역들에 견주어 영국의 식민지배에 반감이 더 컸다고 알려진다. 그곳에서 가난한 성장기를 보냈던 팔이 서구 제국주의에 저항의식을 품고, 일본의 이른바 '대동아전쟁'을 서구 식민주의에 맞선 아시아해방론, 또는 아시아연대론으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35년 억압통치를 기억하는 한국 사람들로서도 벵갈 지역 지식인인 팔이 영국을 어느 정도 미워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일본의 기만적 아시아 정책을 팔이 잘못 이해한 데 있다. 그가 지지했던 INA 지도자 챤드라 보슈는 1943년 11월 도조 히데키의 주도 아래 열렸던 어용 국제회의였던 '대동아회의'에 참석했던 인물이다. 일본이 INA를 도운 것은 영국을 견제하려는 것이 주목적이었지, 벵갈을 포함한 인도의 독립을 진정으로 도우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일제가 내걸었던 '대동아'라는 것이 속임수 선전에 지나지 않았다. 서구로부터의 탈식민지와 아시아 해방을 열망했던 팔 판사가 미국의 전쟁범죄(도쿄 공습, 원폭 투하)를 나치 독일의 만행이나 마찬가지라는 지적은 옳다 치더라도, 일본의 자위권을 내세워 전쟁범죄를 감싸준 논리는 비판 받아 마땅하다.

▲ 욱일기를 들고 야스쿠니 신사 안에서 구호를 외치는 극우파 대원들. 이들은 팔 판사를 구원자로 여긴다. Ⓒ김재명

일본의 리더십으로 아시아가 해방됐다?

UPI 통신사 특파원으로 동경재판을 취재했던 아놀드 브랙먼은 팔 판사가 재판정에 나올 때면 판사석에 앉기 앞서 피고인들에게 절을 하곤 했다고 전한다. 브랙먼에 따르면, 도쿄 재판이 막을 내린 뒤 팔은 스가모 형무소로 가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사토 겐료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일본의 리더였으며 그 리더십을 통해 아시아가 해방되었습니다. 이를 기억하는 나는 경의를 표합니다"(Arnold Brackman, <The Other Nuremberg>, Collins, 382-383쪽 참조)

사토 겐료(佐藤賢了, 1895-1975)는 도조 히데키 총리의 측근으로 대동아공영권의 망상을 지녔던 군부 강경파 가운데 하나다(육군 중장). 도쿄 재판에서 종신형 판결을 받아 복역하다가 1956년에 풀려났다. 1975년 죽을 때까지도 '대동아전쟁(아시아·태평양 전쟁)은 대일본제국의 성전이었다'는 주장을 거두지 않았다고 알려진다.

그런 사토에게 실제로 팔 판사가 감옥으로 면회 가서 '일본의 침략전쟁이 아시아해방전쟁이라며 경의를 나타냈다'는 말을 했는지는 확인이 어렵다. 교활하고 속된 말로 '뻥이 센' 사토가 뭔가 특종거리를 던져주길 애타게 바라는 외국기자에게 아니면 말고 식의 헛소리를 했을 수도 있다. 다만 팔 판사의 논리를 헤아려본다면, 그가 사토에게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3차례 방일, 히로히토에게 1급 훈장 받아

미국의 일본 점령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서명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일본은 이 조약에서 도쿄 국제군사재판의 판결을 받아들인다고 했다. 일본이 주권을 되찾자, 그동안 출판이 금지됐던 팔 판사의 반대 의견서도 풀려났다. 교수형으로 처형된 마쓰이 이와네 육군대장의 측근 다나카 마사키는 1952년 팔 판사의 반대의견서를 일본어로 번역해 <팔 박사의 진실한 판결>이란 이름으로 책을 냈다.

일본 전쟁범죄를 옹호하는 팔 판사의 논리는 전쟁범죄로 얼룩진 일본의 과거사를 부인·축소·왜곡하려고 애쓰는 극우파들에게는 더 없는 호재다. 청자오치(程兆奇) 중국 상하이교통대학교 교수 겸 도쿄재판 연구센터 센터장은 도쿄 재판을 다룬 책에서 팔 판사의 논리를 일본이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를 이렇게 풀이한다.

[1952년 연합군이 일본 점령 상태를 종료한 뒤 '팔의 의견서'가 공개 출판되었고, 팔의 주장은 도쿄 재판을 ('승자의 재판'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 '다수파 유죄판결 vs 팔 무죄판결'이란 관점이 전 일본에 퍼졌고, 팔 본인도 일본 사회에서 (공덕비가 세워지는 등) 높은 지위를 갖게 됐다](청자오치, <도쿄재판: 전범 일본을 재판하다>(예문서원, 2023, 119-120쪽).

일본 우익들에게 팔 판사의 반대의견서는 복음처럼 받아들여졌다. 자신들의 침략행위를 합리화해주고 도쿄 재판을 승자의 재판이라 몰아붙이는 데 팔 판사만큼의 호재는 없었다. 다나카와 뜻을 함께하는 일본 우익들은 팔을 일본으로 불러 선전에 이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52년, 1953년, 1966년 세 차례에 걸쳐 팔이 일본은 방문한 것은 이런 배경을 깔고 있다.

1952년 10월 말 일본으로 간 팔 판사는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1개월 동안 일본 전역을 돌며 순회강연에 나섰다. "일본은 침략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도쿄 재판에서 전승국들은 패전국 지도자들을 전쟁범죄자로 몰아세워 처벌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팔 판사의 강연을 들으면서 일본 청중들이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음은 말할 나위 없다.

1966년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일본에 갔을 때 히로히토 일왕은 '팔 판사가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이 크다'며 1등급 훈장을 달아주었다. 본 연재 4~6에서 살펴봤듯이 도쿄 재판에서 히로히토가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았던 것은 맥아더 장군 덕이 컸지만, 그의 부하들이 무죄라고 줄곧 주장했던 팔에게도 엄청난 고마움을 느꼈을 것이다. 훈장을 받을 무렵 팔 판사는 여든 살이었고, 만성질환으로 건강이 좋질 못했다. 그런데도 '도쿄 재판이 승자의 재판'이라는 그의 강연회를 하나라도 더 열려고 초청자들은 연속 강연 일정을 잡아놓고 있었다.

그런 강행군 탓이었을까, 팔 판사는 다음해인 1967년 숨을 거두었다. 일본 정부는 인도로까지 추모 사절단을 보냈다. 글 앞에서 살펴봤듯이 2005엔 야스쿠니에 '팔 박사 현창비'를 세웠다. 일본이 얼마나 팔의 주장을 고마워하는지를 두루 짐작할 수 있다.

일본 역사교과서에도 길게 소개돼

전후 일본의 우파 정치인들이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 뻔뻔할 만큼의 발언을 하는 것은 팔 판사의 반론과 맥이 닿아있다. 지난 주 글에서 살펴봤듯이, "A급 전범들은 일본법상으로는 전범이 아니다. 승자의 판단에 따라 단죄됐다"라고 말했던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발언 등이 그러하다. 일본 극우파들의 시각에서는, 팔 판사의 논리는 전범자들을 '순교자'로 만드는 마법의 논리였다.

팔 판사의 논리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이를테면, 메이세이샤(明成社)의 고교용 역사교과서는 '평화에 대한 죄와 군사재판이 남긴 과제'라는 소제목 아래 팔 판사를 이례적으로 길게 다루었다. 팔 판사가 도쿄 재판의 다수 의견에 맞서 반대의견을 내면서, 연합국(전승국)이 전범들에게 '평화에 반한 죄'를 소급 적용한 것을 비판했다고 적고 있다.

교과서는 원자폭탄 사용을 비롯한 연합국의 전쟁범죄 책임을 따지지 않았기에 '재판 그 자체의 공정성을 의심하는 견해도 있다'고 덧붙였다. 일본 정부의 교과서 검정에서 합격 판정을 받아 실린 위의 내용은 그동안 일본 우익들이 늘 해오던 주장이다. 짚고 넘어갈 점 하나. 메이세이샤 역사교과서가 팔 판사의 견해를 자세히 소개하면서도, 일제의 '위안부' 성노예 문제나 강제 연행에 관해서는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이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팔의 의견서 또는 강연록은 극우파들과 손잡은 일본 학계(정치학, 사학)의 역사수정주의자들(또는 자유주의사관론자)들 또한 단골메뉴처럼 빠뜨리지 않고 인용하는 대목이다. 일본이 전쟁범죄를 저질렀기에 도쿄 재판에서 응당한 처벌을 받았다는 이른바 '도쿄재판 사관'을 가리켜 '자학(自虐)사관'이라고 비난하는 일본의 극우학자(역사수정주의자)들도 걸핏하면 팔 판사를 들먹인다.

팔 판사를 구원자 또는 우상처럼 여기는 이들은 한 목소리로 외친다. "일본은 자위를 위해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도쿄재판은 승자의 재판이었다. 일본이 승리했다면 피고석에 다른 자들이 섰을 것이다"라고. 다음 주엔 도쿄 전범재판의 피고인 주역이었던 도조 히데키를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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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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