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통일' 아닌 다른 미래 그려야 할 때

[프레시안 books] <평화주권의 길-개성공단의 생계형 평화주의자의 꿈>

남북 간 경제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이 문을 닫은 지 7년이 지난 가운데 최근 북한이 공단 내 설비 및 관련 시설을 사용하고 있다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별다른 대책 없이 경고만 내놓고 있는데, 이를 두고 남북기본합의서 체제 하에 예정된 결과였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 4월 11일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본인 명의의 성명을 통해 "북한은 여러 차례에 걸친 우리 정부의 촉구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개성공단 내 우리 기업들의 설비를 무단으로 사용하여 재산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이는 남북사이의 투자보장에 관한 합의서와 북한의 개성공업지구법을 위반한 것으로 이러한 위법행위를 강력하게 규탄하며 이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북한에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고 말했다.

권 장관은 "정부는 북한의 위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법적 조치를 포함하여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며, 국제사회와도 적극적으로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했지만, 구체적 조치와 관련해서는 "합의서에 기초해 구체적인 법적 조치를 하는 데는 상당히 제한이 있는 게 사실"이라며 정부가 현 상황 타개를 위해 실질적인 해법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서진 전 개성공단기업협회 상무는 최근 집필한 <평화주권의 길-개성공단의 생계형 평화주의자의 꿈>(김서진 지음, 통일뉴스 펴냄) 이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개성공단 문제를 두고 남북이 상호 체제를 인정했던 '남북기본합의서'가 가지고 있던 내재적 한계가 드러난 것이라고 진단했다.

▲ 개성공단 전경. ⓒ개성공동취재단

김 전 상무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만들어졌을 때는 냉전이 해체되던 시기였다며, 이 합의서는 이후 남북관계가 발전함에 따라 사라져야 할 과도기적 문서였다고 규정했다. 그런데 '합의서 체제'가 30년 이상 지속되면서 현재 남북 간 많은 모순점이 생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남북기본합의서>가 만든 합의서체제는 냉전분단체제에서 냉전을 걷어내어 남북관계가 질적으로 발전하면, 즉 상호체제 인정에서 국가인정의 단계로 전환하여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대체되면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사라질 짧은 기간의 과도기적 문서가 되거나 혹은 파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합의서는 서로의 근본적인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냉전 해체라는 세계사적 변화 속에서 서로의 입장을 남북이 봉합한 것이다. 상대방을 국가가 아닌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면서 상대방의 체제는 인정하는 기묘하고 어정쩡한 관계를 형성한 것이다.

남과 북은 대외적으로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서 이미 국가로 인정되고 있고 유엔 회원국인데도 정작 남북은 서로를 애써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상호체제 인정이라는 족보도 없는 용어로 서로를 규정했다. 특히 국가보안법과 남북교류협력법의 상호 모순적인 두 법을 종합하면 '반국가단체와의 교류협력을 촉진한다'와 같은 모순적인 어구가 된다. 이것이 상호체제 인정을 한다는 것의 함의다.

이렇게 법과 법이 충돌하는 상호 모순적인 법제도 하에서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정부의 판단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남북교류협력은 부침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에서 정부가 바뀔 때마다 그 정부가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남북관계는 춤을 출 수밖에 없다"

1991년 당시 상황을 고려해 임시 봉합한 남북관계가 이후 수십 년 동안 계속된 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특히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 협력 사업에 차질이 생겼을 때 수면 아래에서 잘 보이지 않았던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모순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비근한 예로 개성공단을 들 수 있다. 공단관리운영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상호 협의와 합의에 의해 남북이 문제를 해결했지만, 국가와 국가 사이의 협정이나 조약이 아니기에 문제가 발생해도 구속력을 가지고 문제를 조정할 수 없었다. 금강산 관광문제도 그랬다.

그 틈새에서 죽어나갔던 것은 남북 경협기업들이었다. 사실상 상호체제 인정에 따른 어떤 합의서도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속수무책이다. 이렇다 보니 남북경협사업이 중단된 후 정부의 피해지원도 그때그때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이뤄졌을 뿐 법적인 체계가 없었다"

▲ <평화주권의 길>, 김서진 지음, 통일뉴스 펴냄. ⓒ통일뉴스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상호 대화도 가졌던 남북이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못하고 이렇게 어정쩡한 합의서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김 전 상무는 당시 남북이 '평화 공존'이 아닌, '통일'을 국가 비전으로 택했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놨다.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남북 주민들에게 분단 체제를 고착화하는 영구분단으로 인식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북 각자가 주민들에게 상대방을 무너뜨리고 자기를 중심으로 통일하는 것이 지상과제였기 때문에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들어서는 것에 대한 남북 주민들의 내적인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고 꿈에도 소원은 통일인데 남북 주민들에게 군사분계선을 국경선화 하는 두 개의 국가는 어불성설이었다. '밑도 끝도 없는 통일'은 한 울타리 쳐놓고 별거 중인데 함께 살자고 끊임없이 외쳐대면서도 상대방이 내 밑에 들어와 살아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울타리 밖 이웃과의 관계만도 못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이 남북관계의 현실이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공식 명칭과는 달리 한반도에서 냉전을 걷어내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하지 못하고 시대적 과제를 훌쩍 뛰어넘는 '통일'을 앞세웠다. 합의 전문을 보면 하나의 민족은 하나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이데올로기화된 통일을 앞세웠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한민국 헌법 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나와 있다. 따라서 북한과 통일이 아닌, 북한을 공존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곧 헌법에 반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헌법과 달리 국제법적으로 남북은 이미 두 개의 국가로 규정돼 있고 휴전은 70년이 넘었다. 헌법과 현실에 적잖은 괴리가 생긴 셈이다. 김 전 상무는 이같은 현실을 고려했을 때 남북이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고 군사분계선을 국경선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남북 간 불필요한 갈등을 없앨 수 있고 대한민국이 '평화주권'을 가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평화 이니셔티브를 발휘하여 북한의 안전보장을 확보함으로써 북한으로 하여금 핵무기 없어도 되는 길로 가게 해야 한다. 결정적으로 이 모든 과제 해결의 출발선은 남과 북이 수교하는 것이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통일 논의가 아니라 남과 북이 평화주권 행사 차원에서 수교협상을 시작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의 지름길이다.

한반도에 두 개의 정상국가가 존재하더라도 민족적 통합은 다양하게 이뤄질 수 있다. 관세동맹, 자유로운 이동, 시장통합, 화폐통합 등 통합의 수위는 다양할 수 있다. 국가 차원에서는 한반도의 지정학 때문에 두 개의 국가가 연합하는 평화국가연합이 현실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민족적 통합은 평화국가연합 속에서 합의 가능한 만큼 하면 되는 것이다.

북한도 이러한 방향으로 변화해야 할 것이다. 1민족 1국가를 추구하는 관념적 국가통일로 남북의 긴장을 고조할 것이 아니라 민족 차원에서는 통합을 촉진하되 국가 차원에서는 두 개의 주권국가가 양립하는 것이 한반도 현실에 부합한다"

헌법을 중시하는 정신, 통일을 염원하는 국민 정서 등을 고려했을 때 통일을 포기하고 북한과 수교하며 이웃국가로 살겠다고 선언할 수 있는 정치인 또는 정치 세력은 등장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미 북한과 사실상 다른 나라처럼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계속 외면한 채 '이상'만 외칠 수도 없는 일이다.

훗날 역사는 이 시대를 과도기로 기록할까, 아니면 발해와 통일신라 같은 '남북국 시대'로 기록하게 될까. 한반도 분단이 곧 80년이고, 그 시간 동안 각자 공간에서 써내려 온 역사가 있으며,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로 인해 어느 한 쪽을 완전히 없애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 등을 생각해보면 답은 이미 나와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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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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