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바위섬 폭파하자"던 김종필도 지켜낸 독도인데…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7] 누구를 위한 '역사전쟁'인가 (下②)  

독도에 대해 쓰려니 축구선수 박종우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는 지난 2012년 런던 올림픽 축구 3,4위 전에서 한국이 일본을 2 대 0으로 이긴 뒤 '독도는 우리 땅'이라 적힌 피켓을 들고 축구장을 돌았다. 그 때문에 FIFA로부터 징계를 받고 동메달 시상식에도 오르지 못했다. "올림픽 시설이나 경기장 등에서 정치적 선전 활동을 금지하는 올림픽 헌장을 어겼다"는 이유에서였다.

다행히 6개월 뒤 동메달을 전해받긴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독도는 우리 땅'인데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되느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일본에선 크게 반발했다. 축구에 져서 분한데 박종우 선수가 화를 돋우었다고 여겼다. 여기서 한 가지 새삼스런 사실이 드러났다. 독도는 한일 간의 민감한 정치적 사안일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의 눈에는 독도가 국제분쟁지역의 하나로 비친다는 것이다.

일본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한 것이 1905년이니 경술국치(한일병합) 5년 전이다. 우리 민족이 일본에 첫 번째로 빼앗긴 영토가 독도다. 1945년 패전 뒤 잠시 숨죽이던 일본은 곧'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 우기기 시작했다. 그런 억지는 21세기 넘어와서도 이어진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는 '다케시마(독도)는 역사적 사실에 비춰보더라도, 국제법상으로도 분명히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못 박고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보겠지만, 역사적 사실로나 국제법으로나 일본은 독도를 일본의 고유영토라 우길 수 없다. 억지로 채워진 일방 논리일 뿐이다.

문제는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는 듯한 (그렇다고 '독도는 일본땅'이라 자신들의 속내를 확 드러낼 용기는 없는) '신친일파'의 훼괴한 논조다. 한국 '신친일파'가 생각하는 독도는 한국의 보통사람들 마음 속 독도와는 크게 다른 이미지다. 일본 우파들과 손을 잡은 '신친일파'는 한국이 독도를 실효 지배하는 상황을 못 마땅하게 여긴다. <반일 종족주의>(이영훈 외, 미래사, 2019)의 독도 편(151-174쪽)은 책의 다른 부분들보다 읽기가 더 불편한 궤변과 언어의 희롱으로 채워져 있다.

▲ 2012년8월 10일 런던올림픽 3-4위전에서 박종우가 일본에 승리한 뒤 '독도는 우리 땅' 플래카드를 펼쳐보이는 모습. ⓒ연합뉴스

일본 원로 사학자, "학문으로 포장해 역사 왜곡 말라"

나가하라 게이지(전 히토쓰바시대교수, 역사학)는 지난 2004년에 타계한 일본의 원로 역사학자다. 일본중세사 연구의 권위자로 일본 역사학계에선 '거목'으로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타계 1년 전에 낸 <20세기 일본의 역사학>이란 책에서 역사가의 가치관이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그것을 '학문'이라 부를 수 있는 조건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 조건이란, 역사가가 제멋대로 사실 자체를 왜곡하거나 '학문 외적인 계기'에 따라 사실을 자의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대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나가하라 교수의 이 말은 일본의 우파 역사학자들이 극우 정치집단과 손을 잡고 과거사를 왜곡하는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이른바 수정주의 사관(또는 자유주의 사관)의 목소리가 점점 커가는 상황을 경고한 것이기도 하다.

나가하라의 지적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월이 흘러 동시대의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면서 '특정 의도를 갖고 (홀로코스트나 난징대학살 같은) 사실을 왜곡하면서 '역사의 수정'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나가하라는 역사가가 (많은 사람들의 잘못된) '집단 기억'에 편승하여 그 기억을 왜곡하고 역사를 감히 수정하려드는 것은 '비학문적 행위'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난징 학살의 경우, 도쿄전범재판에서는 20만 명, 중국에선 30만 명이 희생됐다고 말한다. 일본의 극우파는 난징 학살 따윈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나가하라의 비판.

"난징대학살에서 몇 사람이 희생이 되었는가를 확정하는 일은 분명히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확정하기 어렵다는 점에 편승하여, 그렇기 때문에 사건 자체마저 의심스럽다고 말한다면 명백히 '역사의 왜곡'이다"(나가하라 게이지, <20세기 일본의 역사학> 삼천리, 2011, 297쪽).

문제는 나가하라가 이런 지적을 하고 타계한 지 20년이 다 되는 동안, 일본의 우경화 흐름 속에 역사의 왜곡이 일반화됐다는 점이다. 정치인들은 국가주의와 애국심을 강조하며 지난날의 침략전쟁과 그에 따른 전쟁범죄 등 과거사를 말하려 하지 않는다. 일본의 우파 역사학자들, 그리고 이들과 손잡은 한국의 '신친일파'는 일반 대중에게 인기가 없는 과거사 연구를 외면하거나 축소 왜곡한 것을 '학술 연구'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해 내놓는다. <반일 종족주의> 같은 악서(惡書)가 하나의 보기다.

'세계인'인가, '뼛속까지 일본인'인가

일본의 우경화 흐름 속에서 일본 교과서는 침략전쟁을 부정하고 전쟁범죄를 축소하는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다. '다케시마(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억지주장이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버젓이 실려 있는 것이 오늘의 일본이다. <반일 종족주의>는 독도를 일본쪽 입맛에 맞게 다루고 있다. "한국이 독도 영유권을 내세우는 것은 '반일 종족주의의 가장 치열한 상징'이다"(151쪽). "1904년(정확히는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할 때 대한제국은 분쟁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한국은 독도(다케시마)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가져가자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이다"(169쪽). 그러면서 슬며시 글 곳곳에서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의문을 던져 일본인들을 기쁘게 한다.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필자이자 독도 편을 쓴 이영훈이 하는 말들은 번지르르 하다. 자신은 '대중의 인기에 신경을 써야 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지식인'이라 자부한다. '대중의 눈치를 보며 할 말을 않거나 글의 논조를 바꾼다면, 그 사람은 지식인이라 할 수 없다'고 했다. 말 자체로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국수주의적 주장이나 편협한 민족주의와 과도한 민족감정을 지녔다면 '참된' 지식인이라기보다는 '위험한' 또는 '모자란' 지식인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는 뜬금없이 '참된 지식인은 세계인'이란 말을 한다. 독도와 관련해 그 자신이 하고 싶은 궤변을 펼치기 위한 '심리적 보호 장치'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독도의 한국 영유권을 부정하는 글을 대놓고 쓴다는 게 우리 국민정서에 맞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했을 게 뻔하다. 그의 언어희롱은 이렇게 이어진다. "(참된 지식인은) 세계인의 관점에서 자신이 속한 국가의 이해관계조차 공평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라고(152쪽).

말을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영훈은 솔직하게 스스로를 '뼛속까지 일본인'이라고 차마 고백하지 못하고 '세계인'으로 위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의 주제인 독도와 관련해선 특히 그런 의심을 받는다. 이영훈이 말하듯 독도는 '한국의 이해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뉜 불행한 과거사를 지닌 한일관계'에 해당되는 것이다. 독도가 일본 영토로 편입된 20세기 초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힘의 불균형을 이용한 강탈이었음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여기에 이런저런 궤변을 늘어놓는 것은 역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일본 역사학자 나가하라 게이지의 지적, 다시 말해 '(학자는) 학문 외적인 계기에 따라 사실을 자의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대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지적을 떠올린다면, 이영훈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그는 <반일 종족주의>에서 한국인들에게 이런 요구를 했다. '도발적인 시설이나 관광도 철수하고, 길게 침묵해야 한다'고(173쪽). 일본에 대해선 너그럽게도 아무런 요구도 없다. 여기서 답이 나온다. 이영훈은 그런 자신의 궤변을 거두어들이고 이제 그만 펜을 놓고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아울러, 그의 궤변에 마음이 상한 독자들에게 늦게나마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독도는 조선 땅' 증언하는 숱한 사료들

<반일 종족주의>에서 이영훈은 "솔직히 말해 한국 정부가 역사적으로 (독도가) 그의 고유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제시할 증거는 하나도 없다"고 주장한다(169쪽). 과연 그럴까. 독도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서 한국의 영유권을 부정하는 것은 억지나 다름없다. 독도의 과거사를 잘 모르는 어린 아이라면 모를까, 대다수 독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하기 마련이다.

DJ DOC이 불렀던 '독도는 우리땅'이란 노랫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독도가 도대체 누구 땅이냐 묻거나 따지는 것은 소모적이다. 그러나 '신친일파'의 목소리가 워낙 드센 실정이라 못 본 체 하기도 어렵게 됐다. 독자들에게 익숙한 내용이지만, 요점 정리 차원에서 역사의 기록들을 잠시 들여다보자. 먼저 독도문제에 관한 여러 편의 책과 논문을 펴낸 신용하(서울대명예교수, 사회학, 독도학회 초대회장)의 글이다.

[독도는 울릉도와 함께 옛 우산국의 땅이었다. 서기 512년에 우산국이 신라에 귀속됨으로써 울릉도와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로 확정됐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년조에 실려 있다. 1808년 (조선 순조 임금의 명을 받아)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에도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는 모두 우산국 땅이라고 정의돼 있다](신용하, <한국의 독도영유권 연구> 경인문화사, 2006, 385쪽).

한편 근세·근대에 이르러 독도가 처음 등장하는 한국문헌은 '독도는 우리땅'이란 노랫말에도 나오는 세종실록 지리지(地理志)다. 1454년(단종 2년) 지리지 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과 무릉 두 섬이 현의 정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 가 맑으면 가히 볼 수 있다'고 쓰여 있다. 여기서 '무릉'은 울릉도를, '우산'은 독도를 가리킨다.

신용하 교수에 따르면, 일본에서 처음으로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기록으로 나타난 것은 1667년 <은주시청합기(隱州視廳合記)>란 문헌을 통해서였다. 도쿠가와 막부(幕府) 시절에 지방 관리가 현지 조사 끝에 작성한 이 문헌에는 울릉도와 독도(일본쪽 표기는 송도와 죽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고 조선 영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로 그 무렵 기록에 나오는 안용복 같은 인물도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님을 말해준다. <숙종실록>에 따르면, 부산 동래 출신의 노군(櫓軍, 노를 젓는 군사)이었던 안용복은 1693년 울릉도 쪽으로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그곳에서 일본어민들에게 납치돼 일본으로 끌려갔었다. 담대하고 건강한 민족의식을 지녔던 안용복은 그곳 돗토리번(蕃)의 지도자를 설득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섬들임을 인정하는 서계(書契)를 받아냈다. 안용복에 대해선 송병기(단국대명예교수)의 <울릉도와 독도, 그 역사적 검증>(역사공간, 2010년, 277-298쪽) 참조 바람.

▲ 독도가 조선영토임을 보여주는 세종실록 지리지(1454년).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 우겨도 되는가"

일본 정부의 공문서에도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한 것들이 있다. 일본을 250년 동안 지배해온 도쿠가와 막부를 밀어낸 이른바 메이지 유신(1868) 뒤인 1876년, 일본 내무성은 일본 전국의 땅을 조사하고 지도를 만들고자 했다. 그때 시마네현(縣)은 '울릉도와 독도를 지적 조사와 지도에 포함시킬 것인가'를 내무성에 물었고, 내무성은 정부의 최상급자인 태정관(太政官, 총리대신)에게 물었다. 돌아온 답신(태정관 지령)은 '본방(本邦, 일본)은 관계가 없다'였다.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답신이었다(송병기, 299-303쪽).

그 무렵의 조선정부 쪽 근거 자료도 있다. 1900년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 제41호'로 울릉도를 울릉군으로 승격시키면서, 그 관할 구역에 독도가 들어간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이에 대해선 대구한의대 안용복연구소가 학술총서로 펴낸 <동아시아의 바다와 섬을 둘러싼 갈등과 투쟁의 역사>(지성인, 2013) 속 김호동(영남대 독도연구소 연구교수)의 글「조선시대~개항기까지의 울릉도 독도에 대한 정부의 인식과 정책」(398-406쪽)을 참조 바람.

일본의 일부 사학자들은 오래 전에 만들어진 일본의 고지도를 내밀며 '독도는 옛부터 일본땅'이라 주장한다. 한국의 비판적 연구자들은 '그런 지도들은 나중에 누군가가 손을 보탠 것들'이라 말한다. 검증을 거친 고지도 원본들은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1785년 당대의 으뜸가는 일본 지리학자 하야시 시헤이가 만든 '삼국접양지도'의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본토의 땅 색깔과 같은 노란 색이다(임덕순,「독도의 기능, 공간가치와 소속」<독도·울릉도 연구> 동북아재단, 2010, 267-268쪽).

어떤 일본인들을 이렇게 묻는다. "일본 민간인이 옛날에 그린 지도를 보니까 독도가 일본 영토로 그려져 있으니 일본 땅이 맞는 게 아니냐"고. 이에 대해 신용하 교수는 "그런 식이라면 우리는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기한 지도를 근거로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 주장해도 되겠는가"라고 되묻는다. 독도가 역사적으로 한국의 고유영토라는 사실은 증거들은 차고 넘친다. 지면 관계상 이쯤에서 줄인다.

<대한매일신보>, 독도 침탈 소식에 '아연실색'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한 것은 20세기 초였다. 1904년 2월8일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터지자, 일본군은 울릉도와 독도에 러시아 군함을 감시하는 해상 망루를 설치했다. 일본 해군은 일찍부터 독도를 중요한 전략 거점으로 찍었다. 그러면서 독도를 탐내게 된 일본 정부는 1905년 1월28일 내각회의에서 일본 영토에 편입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런 사실을 대한제국에겐 알리지도 않았다. 이걸 두고 이영훈은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할 때 대한제국은 분쟁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썼다. 도둑질처럼 몰래 훔쳐갔는데 어떻게 대응할 수 있으랴.

뒤늦게 대한제국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년쯤 지나서인 1906년 3월 말이다. 일본 시마네현 관리들이 울릉도를 조사차 둘러보면서 울릉군수에게 '독도가 일본땅이 됐다'는 사실을 처음 알렸고, 놀란 군수는 이 사실을 중앙에 황급히 보고했다. 그때는 이미 을사5조약(1905)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일제 통감부가 들어선 상태였다. 힘으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 여론은 들끓었다. <대한매일신보>(1906년5월1일자) 기사를 보면 '독도가 일본의 속지(屬地)라 운운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니, 지금 보고받은 바가 아연실색할 일이다'라고 돼있다. <황성신문>도 일본의 독도 도둑 강탈에 놀라움과 더불어 분노를 나타냈다. 이에 대해선 곽진오(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의「고문헌에 나타나는 한국·일본의 독도인식」(<일본학보> Vol.125, 한국일본학회, 2020) 참조하기 바람.

한국이 독도를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은 것은 그로부터 40년 뒤 패전국 일본을 접수한 맥아더 연합국최고사령관의 지령에 따라서였다. 이에 따라 우리 어민들도 일본 눈치를 안 보고 독도 주변 어장에서 강치 등을 잡게 되었다. 독도와 관련된 연합국최고사령부의 지령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945년 9월 27일 미국 제5함대 사령관각서 제80호는 일본의 어로제한선을 설정하여 독도를 한국령에 귀속시켰다. 1946년 1월 연합국총사령부의 지령 SCAPIN 677호는 독도를 일본의 행정구역에서 분리했다. 또한 1946년 6월 SCAPIN 1033호는 독도를 한국의 어업구역으로 정하고 일본 어선들의 출입과 조업을 금지했다](최장근, <독도문제의 본질과 일본의 영토분쟁 정치학> 제이앤씨, 2009, 241쪽)

독도 분쟁의 씨앗 뿌린 샌프란시스코 조약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필자 이영훈은 '이승만학당 교장'이란 직함을 내걸고 '이승만 띄우기'에 매우 열심이다. 4.19혁명으로 쫓겨난 독재자 이승만의 정치적 복권을 위한 전도사 역할을 맡고 있는 모습이다. 여기서 하나 궁금한 게 있다. 무덤 속의 이승만은 독도를 넌지시 일본 영토인양 말하는 이영훈을 어떻게 생각할까.

6.25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18일, 이승만 대통령은 평화선(平和線)을 선포했다. 정식명칭이 '대한민국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인 이 선언으로 '이승만 라인'이 그어졌다. 한국 해안에서부터 평균 60마일(약 97㎞)에 이르는 해역에 '평화선'을 긋고 그 안에 포함된 광물과 수산자원을 보존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 평화선 안엔 물론 독도가 포함됐다.

이승만이 서둘러 평화선을 그은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다. 1951년 9월 일본이 미국 등 연합국가들과 맺은 샌프란시코강화조약에서 일본이 당연히 포기해야할 한국 영토 가운데 '독도'가 빠져 있었다. 여기에는 △독도에 대한 미 국무부의 부족한 이해 △미국의 일본정치 고문관 윌리암 제이 시볼드의 친일적 입장 △일본의 집요한 로비 △한국 외무부의 미숙한 대응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졌기 때문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미국이 (한일 양국 사이의 분쟁이 될 것을 내다보면서도) 독도 영유권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조약을 끝냈다는 점에서, 미국의 책임이 크다. 이에 대해선 이석우(인하대교수, 법학)의 논문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독도의 영토처리 과정의 연구」(<북방사논총> 7호, 동북아역사재단, 2005) 참조 바람.

이승만이 무덤에서 나와 이영훈 만난다면...

일본과의 어업분쟁이 일어날 것으로 내다본 이승만은 샌프란시코조약 발효(1952년 4월) 전에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다름 아닌 '맥아더 라인'을 대체하는 '이승만 라인'으로 알려진 '평화선' 설정이다.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확인해주는 조치였다. 일본인들이 평화선을 넘어 독도 근처에 얼씬거린다면? 이승만 정부는 말로만 그치지 않고 단호히 대응했다. 1957년까지 평화선을 넘어온 일본어선 152척과 거기에 탔던 어민과 선원 합쳐 2025명을 붙잡았다. 이런 이승만이었으니 그가 무덤에서 나와 이영훈을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할까. "내 이름을 걸어 학당을 운영하며 생계에 보탬이 된다니 좋은 일이겠지만, 자네의 독도 얘기는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었어!"라고 꾸짖을 게 뻔하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승만은 8.15 해방정국에서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세력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잡았고, 친일파 처단을 위한 반민족행위자처벌특위(약칭 反民特委)를 해산하는 등의 잘못이 있었다. 지난날 일제에 아부하며 사리사욕을 채웠던 민족반역자들을 청산은커녕 정부 요직에 기용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하지만 독도 영유권을 넘보려는 일본에 대해서만큼은 결연한 의지로 맞섰다.

이승만의 뒤를 이은 역대정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국민 정서와 선거를 의식해서라도) 독도를 지켜왔다. 계산 빠른 사업가 기질을 지닌 이명박 전 대통령도 임기 말인 2012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14일 헬기를 타고 독도로 날아가 일본을 심드렁하게 만들었다. 박정희 정권에서 2인자 소릴 듣던 김종필은 1965년 한일협상 과정에서 "독도는 갈매기 똥이나 쌓이는 쓸모없는 바위섬이니 폭파해버리면 어떠냐"는 농담을 했다가 구설수에 휘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독도를 지켜냈다.

▲ 독도. ⓒ연합뉴스

일본의 전략,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들라"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라는 사실이 분명한데도 일본과 한국의 '신친일파'는 왜 그렇게 시비를 거는 것일까. 그들의 독도 전략은 '독도를 지구촌의 분쟁지역 가운데 하나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협상을 거쳐 한국이 독도를 기점으로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선포하지 못하도록 막고, 나아가 독도를 한일 '공동영역'으로 만들어 그 일대의 풍부한 자원(수자원, 가스 하이드레이트)을 챙기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그런 야무진 꿈을 이루려고 독도 문제를 네델란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ICJ) 법정으로 끌고 가고 싶어 한다. 실제로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다녀온 사흘 뒤(2012년 8월17일), 일본 정부는 각료회의에서 ICJ 제소 방침을 확정짓고 그 사실을 한국 정부에 알려왔다. 1954년과 1962년 이후 50년 만의 제소 시도였다. 그만큼 이명박의 독도 방문에 일본이 열을 받았다는 얘기가 된다. 일본이 ICJ 제소를 하려할 때마다 한국 정부는 '대응할 가치가 없다'며 묵살했고, 막상 ICJ에서의 재판도 열리지 않았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일본은 한국뿐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과도 영토분쟁을 벌이는 중이다. 러시아가 실효 지배하는 남쿠릴열도 4개섬(홋카이도 북쪽의 이투루프, 쿠나시르, 시코탄, 하보마이 등 이른바 '북방영토'), 중국과 다투는 가운데 일본이 실효 지배하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의 영유권 다툼이다. 독도와 남쿠릴열도 4개섬은 일본이 실효지배를 하지 못하는 곳이라 일본이 '못 먹더라도 찔러나 본다'는 생각으로 ICJ에 제소하려 들지만, 중국은 입장이 다르다.

중국이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영유권을 놓고 일본을 상대로 ICJ에 제소하려들다가는 문제가 복잡해진다. 중국은 남중국해 영유권을 둘러싸고 분쟁중인 동남아시아 국가들(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과 ICJ에서 얼굴을 맞대는 것을 피해왔다. 만일 중국이 일본을 상대로 센카쿠열도 문제를 ICJ에 끌고가면, 동남아 국가들과의 ICJ 재판을 피할 명분이 없어진다. 중국은 그런 뒤엉킨 싸움을 피하고 싶기에 일본을 상대로 센카쿠열도 문제를 ICJ에 제소하진 않았다.

이승만 정부를 비롯해 역대 한국 정부는 독도에 관한 한 일관된 태도를 보여왔다. ICJ로 가서 해결하자는 일본의 제의도 거부해왔다. <반일 종족주의>에 쓰여 있는 대로 '1904년(정확히는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할 때 대한제국은 분쟁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약점 탓에 한국이 ICJ를 회피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한국 정부의 입장은 "독도는 사법적 다툼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ICJ도 독도에 대한 '재판 관할권'으로 한일 양국 정부의 소송 대표자를 헤이그로 불러 모을 뜻은 없어 보인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 하나. 일본이 ICJ에서 이 문제를 다투려는 것은 일본이 그만큼 한국을 만만하게 보는데다, 일단 싸움을 걸면 한국내 '신친일파'라는 지원군에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신친일파'는 유엔 인권이사회 등 국제기구에서 일제의 인권침해를 논의하는 자리에 자신이 한국 국적임을 밝히며 일본에 유리한 발언들을 서슴지 않아왔다. 이들이 해외를 오가며 드는 경비가 실제로 어디서 나오는지는 묻거나 따져볼 필요도 없다.

와다 하루키, "일본은 독도 주권 주장 접어야"

독도 문제는 어떻게 푸는 것이 바람직할까.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 사람인 와다 하루키(전 도쿄대교수, 역사학)가 생각하는 독도 해법은 무엇일까. 그는 일본이 지난날 조선 식민지 지배를 반성한다면, 다케시마(독도)를 '일본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면서 한국의 '다케시마 불법 점거'를 비판하는 것은 '도의(道義)라고는 전혀 없는 행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와다 교수의 독도 해법은 단순 명쾌하다. '일본이 독도를 단념하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실효지배는 해방 직후부터의 영유권 주장에 근거한다. 그 주장의 핵심은 1905년 1월 일본의 다케시마(독도) 영유는, 조선 침략을 시작하면서 5년 후 강압적인 한국 병합의 전조로 행해졌다는 점에 있다. 일본에서 이 주장을 논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주장에 따른 독도 지배는 한민족이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절대 철회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국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와다 하루키, <동북아시아 영토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사계절, 2012, 264쪽).

"(독도문제를 놓고) 한국인과 대화를 해보면 답이 저절로 나올 것이다. 한국이 실효 지배하는 다케시마(독도)에 대한 주권 주장을 일본이 단념하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이 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이룰 전망이 없는 주장을 계속해서 한일관계, 일본인과 한국인의 감정을 점점 더 악화시키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다"(와다 하루키, 265쪽)

1938년 생으로 올해 85세인 원로학자 와다 하루키의 지혜로운 독도 해법이 곧 이 글을 쓰는 필자의 결론이기도 하다. 또한 한반도 평화를 소중히 여기는 독자들이 생각하는 해법이자 결론일 것이다. 쓰다 보니 글이 또 길어졌다. 지난날 전쟁범죄를 축소·왜곡·부정하는 일본의 우경화 흐름 속 교과서 왜곡을 둘러싼 역사전쟁의 문제는 다음 주 글에서 살펴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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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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