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간 몰아친 '과거사 면죄' 폭주, 尹대통령 목적지는?

[분석] 대일외교 중심축 '과거사' 전선 붕괴…미국 주도 냉전질서 블랙홀로

윤석열 대통령의 짧았던 일본 방문 일정이 지난 17일 마무리됐다. '3월 한일 관계 정상화 → 4월 한미동맹 확장 → 5월 한미일 공조 강화'로 이어지는 외교 국면의 첫 단계를 넘은 것이다.

미중 경쟁 가열과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로 국제질서가 급변하는 가운데, 서둘러 일본에 과거사 면죄부를 준 윤 대통령의 이번 방일은 "조공 외교"라는 빈축을 사며 정치·외교적으로 적지않은 후과를 남기게 됐다.

취임 후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가진 세 번째 양자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은 2018년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대법원 판결 여파로 양국이 치고받았던 일련의 조치들을 거둬들였다.

일본은 반도체 소재 3종에 대한 대(對)한국 수출규제를 해제하고, 한국은 일본에 대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취하했다. 2019년 한국 정부의 '종료' 통보 이후 효력정지 상태이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GISOMIA)도 윤 대통령이 '완전한 정상화'를 선언했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은 "우리 국익은 일본의 국익과 공동의 이익에 배치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법원 판결 이후 양국이 출혈을 감수하고 난타전을 벌였던 경제와 안보 쟁점들이 일거에 해소된 만큼, 한일은 "안보, 경제, 글로벌 아젠다에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협력해야 할 파트너"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국적 차원에서 내린 결단"이라고 자평한 윤 대통령과 달리, 일본은 윤 대통령이 기대한 '물컵의 나머지 반'을 채우는 성의를 끝내 보이지 않아 '미래를 위한 대전환'이라는 방일 목표를 무색케 했다.

한일 외교의 중심축인 과거사 문제는 기시다 총리의 완승으로 끝났다는 평가다. 기시다 총리는 강제동원 문제에 관한 한 마디 사과 없이 "한국 재단이 판결금을 지급하게 된다"며 '제3자 변제' 방식에 쐐기를 박았다. 기시다 총리와 공동기자회견장에 나란히 선 윤 대통령은 "구상권 행사는 상정하지 않고 있다"고 이를 재확인하는 모습을 보였다.

소멸시효가 10년인 구상권을 5년 단임 대통령의 자의적 판단으로 상대국에 공언해버린 파장은 국내에서 크게 번질 조짐이다. 제3자 변제를 거부하는 피해자 측이 추심소송을 제기했고 여론의 반대도 거세다.

나아가 강제동원 해법에서 '불가역성'을 얻어낸 기시다 총리는 한일 위안부 합의 이행과 독도 영유권 문제도 윤 대통령 면전에서 언급했다고 일본 언론들이 보도했다. 대통령실은 "논의된 바 없다"고 부인했으나, 일본 측은 "독도 문제가 포함됐고 위안부 합의에 대해 착실한 이행을 요구했다"(기하라 세이지 일본 관방장관)라는 설명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16일 오후 일본 도쿄 긴자의 오므라이스 노포에서 친교의 시간을 함께하며 생맥주로 건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익숙한 과거'로 되돌아간 尹대통령의 '미래' 외교

3.1절 기념사를 시작으로, 6일 '제3자 변제 방식'의 강제동원 해법 발표, 16일 정상회담까지 보름 동안 쉴 틈 없이 이어진 윤 대통령의 대일 외교 드라이브의 최종 도착지는 결국 '한미일 안보·경제 공조 강화'다.

윤 대통령은 다음달 조 바이든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을 국빈 방문할 예정이다. 이어 5월에 기시다 총리의 초청으로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하면 한미일 정상이 한자리에 모이는 장면이 연출된다. 미국의 세계전략이 윤 대통령의 성급한 과거사 양보를 추동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일본은 물론이고 '보편적 가치 공유'를 내걸고 중국 견제를 위한 동맹국 결속을 도모하는 미국도 한일 관계 정상화의 수혜자다. 한일 간 과거사 갈등 봉합으로 미국 중심의 인도·태평양 전략 추진에 걸림돌이 제거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일 정상은 "한국의 자유, 평화, 번영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일본의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전략 추진 과정에서도 국제사회와 함께 긴밀히 연대하고 협력해 나갈 것"(윤 대통령),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 지역을 구축하는 중요성에 대해 합의했다"(기시다 총리)라고 다짐했다.

미국의 반응은 어땠나.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앞서 한국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에 즉각 "역사적인 발표"라며 "조 바이든 대통령은 역사적 이슈를 해결하고 양자 관계를 개선하려는 이 발표를 환영했다"고 했다.

일본에 면죄부를 준 윤 대통령의 결정을 추어올린 것이지만, 백악관의 속내는 "인도·태평양을 위한 공통의 비전을 발전시키는 게 이 파트너십의 핵심"이라는 데에 방점이 찍혀 있다.

<뉴욕타임스>는 "화해를 향한 양국 정상의 조치는 한일 양국에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미국과 한·일 간의 동맹에도 의미가 있다"며 "미국은 대(對)중국 보루를 만드는 데 집중하기 위해 이 지역의 가장 강력한 동맹국이 서로 잘 지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군사적 3각 공조 수위를 끌어올리고 동맹국 중심으로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하는 미국의 목적이 '중국 견제'에 집중돼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서술이다.

워싱턴 싱크탱크인 신미국안보센터(CNAS)도 지난 15일 발간한 보고서에서 중국의 '긴급 사태'를 대비한 작전계획 개정을 주문하며 지소미아 정상화, G7 정상회의 한국 초청,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중국 견제 협의체인 쿼드(Quad) 등에 '플러스' 형식으로 한국이 참여하는 등의 방안을 제시했다. 모두 윤석열 정부가 속도를 붙여 가시권에 접어들었거나,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서 '미래를 위해 달성한 성과'로 열거한 것들이다.

그러나 일본과의 중심 갈등에서의 완패는, '미래'에서의 역관계 또한 미일동맹에 한국이 하위 파트너로 결합하는 '익숙한 과거' 형태가 될 것이라는 관측에 힘을 싣게 한다. 중대한 인권 침해 사건인 강제동원,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를 덮고 나아가는 '미래' 역시, 피해자 고려 없이 일본의 식민지배 책임에 면죄부를 줬던 과거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그에서 비롯된 동아시아 냉전 체제의 재연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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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구

2001년에 입사한 첫 직장 프레시안에 뼈를 묻는 중입니다. 국회와 청와대를 전전하며 정치팀을 주로 담당했습니다. 잠시 편집국장도 했습니다. 2015년 협동조합팀에서 일했고 현재 국제한반도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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