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변호사' 아닌 '투명한 변호사 ○○○'?

[프레시안 books] 익명의 국선전담변호사가 쓴 <국선변호인이 만난 사람들>

한 피고인의 지인이 변호인에게 묻는다. '아무개가 변호사를 선임했어요?'

"네 제가 국선변호인입니다."

"국선이세요? 아, 변호사가 없어요? 돈이 없어서 변호사도 없이 재판받고……" (책 262쪽)

국선변호인은 이처럼 종종 '투명인간' 혹은 '유령'이 된다고 한다. 우연일까. 이들이 변호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사회에서 투명인간 혹은 유령 취급을 받는 이들이 많은 상황이 묘하게 겹쳐진다.

익명의 한 국선전담변호사가 '몬스테라'라는 필명으로 쓴 <국선변호인이 만난 사람들>(샘터 펴냄)은 자칫 흔한 법조 드라마 에피소드가 될 뻔한 투명인간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온정 어린 시선으로 담아낸 책이다.

지난해 화제가 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비롯해, 법정을 소재로 한 문학·영상 작품은 많고도 많다. 이들은 대개 변호사와 검사의 화려한 법정 대결, 치밀하고 악랄한 범죄수법을 지능적으로 파헤치는 정의로운 주인공을 다룬다. 또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한 인물이나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들의 기록, 거대한 자본이나 권력에 맞선 약자들의 법정투쟁기도 책으로 나와 있다.

이 책에 그런 얘기는 없다. 죄를 저지른 주제에 변호인에게 사소하고 째째한 '갑질'을 시도하는 피고인, 대부업체에서 대출 받으려다 '통장을 담보로 제출하라'는 말에 속아 지능적 사기범죄 보이스피싱 조직의 하수인이 된 지적 장애인, 구속보다 석방이 더 큰일인 노숙인, 길거리에서 남이 잠깐 내놓은 책더미를 가져갔다가 절도범이 된 폐지 수거 노인, 불법 유턴을 했다가 자신의 차를 피하려던 오토바이가 사고를 냈는데 이를 모른 채 지나갔다가 뺑소니범으로 기소된 택시기사, 친구 오토바이를 얻어타고 가다 오토바이가 넘어져 친구가 다치자 친구를 대신해 오토바이를 운전해 무면허 운전으로 기소된 외국인 노동자 등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 당사자들이다.

저자는 책 속에서 반복적으로 '이런 이들을 벌하라고 법이 있는 것이 아닐 텐데'라는 한탄을 하곤 하는데,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이나 매사를 불법과 합법의 잣대에 올리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이야기다.

고물과 폐지를 주워 생활하는 장애인이 남의 단독주택 대문 앞에 내놓은 책을 집어가 기소된 사건에서, 피해 금액은 단돈 1만5000원이었다. 그러나 이 피고인은 비슷한 전과가 많았고(동종전과 역시 피해 물품은 책이나 쇠붙이 등이었다고 한다) 결국 누범이란 이유로 단순절도죄가 아니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절도죄로 기소됐다. 합의할 돈도 도와줄 가족도 없어 피해자와 합의도 못했다. 그는 징역 1년6개월을 받았다.

저자의 탄식이다. "억대 사기를 치고도 그 정도의 형량을 받지 않는 특별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버린 줄 알고 가져간 1만5000원치의 책무더기 때문에 받게 된 1년6개월의 형량은 너무나 가혹했다."(책120쪽) 

역시 폐지와 잡동사니를 모아 파는 것으로 생계를 꾸리는 할머니가 집 앞 주자창에 물건들을 쌓아두어서 주차장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는 일도 있었다. 이 물건들은 사회의 시선에서는 '정리'되어야 할 쓰레기였지만, 그 할머니에게는 소중한 재물이었다.

법이 약자에게 가혹한 것은,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적용하는 이들이 약자의 사정에 무지하거나 무심한 탓일 것이다. 학창시절 검사한 지능지수가 70 미만인 지적장애인 남성이 '지능형 범죄'인 보이스피싱으로 기소된 사건은 이렇다. 이혼 후 각자 재혼한 부모 대신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다, 지하철 택배함에 보관된 물건을 수거해 오는 일을 한 것이다.

뇌전증이 있는 갓 성인이 된 여성이 가계에 보탬이 되려고 채권 추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가 역시 보이스피싱 공범으로 징역 2년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고시원에서 지내는 독거노인이 딸 혼수비용에 300만 원을 보태려고 대출을 받으려다 '체크카드를 담보로 보내라'는 말에 속아 체크카드와 통장이 보이스피싱에 사용된 사건에서, 얄궂게도 그에게 선고된 형은 '벌금 300만 원'이었다.

법을 탓할 수만은 없는 사연들 역시 있다. 어려운 사정에도 법을 지키켜 살아가는 다수의 선량한 이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들도 단순히 '사건'이 아닌 '사연'으로 보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예컨대 무전취식, 절도, 공무집행방해 등 사건으로 노숙인들도 국선변호인을 찾는다. 형을 적게 받도록 노력하겠다는 변호인의 위로에 "여기서 언제 나가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나가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게 막막하다"고 한숨짓는 이들의 '사연'을 보면, 변호인의 노력으로 이들이 무죄 혹은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난들 앞으로 이들의 삶이 크게 달라질까 하는 안타까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책에는 변호사라는 직업의 고충도 담겼다. 사기·절도 전과가 다수 있는 피고인이 절도가 아니라 점유이탈물횡령, 즉 '훔친 게 아니라 주웠다'고 이치에 닿지 않는 주장을 하다가 법정에서 난동을 부려 변호인이 뒷목을 잡자, 건너편에서 검사가 '참 먹고살기 힘드시겠다'는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는 에피소드는 희극으로 봐야 할지 비극으로 봐야 할지 판별이 난망하다.

특히 저자와 같은 국선전담변호사는 법원이 배정하는 사건 외에 다른 사건을 사적으로 수임할 수 없다고 한다. 사건을 고를 수 없다는 얘기다. 친했던 직장 동료를 음주운전 사고로 잃은 저자가, 법정에서 음주운전 가해자를 변호해야 하는 심정을 저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자연인의 한 사람으로서 내 감정과 가치관 그대로 음주운전 사건 피고인을 대한다면 그들은 검사보다 나를 더 무서워해야 할 것이다." (책 36쪽)

아내와 딸을 때려 상해를 입혔다는 혐의로 기소된 가정폭력 전과자의 사례, 이혼한 전처를 상습적으로 구타하다가 구속된 피고인의 입에서 나온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았죠"라는 기막힌 말(저자도 기혼 여성이다), 실제로 자식들을 학대한 정황이 비교적 뚜렷한 아동학대 혐의 피고인의 무죄 주장을 대리해야 하는 경우(저자도 아들을 키우는 어머니다) 등에서는 변호사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고충이 엿보인다.

국선전담변호사는 법정이 의뢰한 사건만을 수임하는데도 다른 사건을 봐달라며 '얼마면 돼'라는 20년 전의 유명 드라마 명대사를 부적절하게 소환하는 사람, 국선전담이라 귀찮아서 변호를 대충 하거나 자백을 강요한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국선변호인이 만난 사람들' 중 일부다.

술을 마시고 버스기사와 욕설 다툼을 벌이다 기소된 피고인의 직업은 학교 윤리교사, 구속된 이후 심각한 우울증과 수면장애를 겪는 피고인의 직업은 스포츠 선수 멘털 코치, 우울증 진단서로 선처를 호소하는 피고인이 사실은 '웃음 치료사' 자격증 소지자라는 부조리는 씁쓸한 블랙 유머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은 궁금증 하나. 수많은 사건을 동시에, 혹은 순차적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는 국선변호인은 많은 사건 중에 어떤 사건에 특히 힘을 쏟을까?

저자는 개와 산책하다 개가 사람을 물어 과실치상죄로 기소된 피고인이 "재판에서 지면 저는 바둑이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자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중요한 시국 사건을 변론하듯 서면을 쓰고 조사를" 하기도 하고, 사채업체에 리스 차를 저당잡혀 리스 업체로부터 권리행사방해죄로 고소당한 피고인의 여자친구가 법정에 진한 화장에 명품 백을 들고 오자(하의는 털 수면바지였다고 한다) 아연함과 함께 인간적 실망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그러나 대개는 "기록에 나타난 그의 지난 삶과 현재 그에게서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성품과 태도 그리고 마음가짐"(108쪽)이 특별히 힘을 쏟는 사건, 즉 'VIP'를 가리는 기준이 된다고 한다. 변호인에게 미안해 하는 한 피고인에게 저자가 했던 "제가 모든 피고인을 위해 피해자에게 이 정도로 심한 욕을 들어가면서 합의하려고 하지는 않는다"(112쪽)라는 고백을 보며 '어진 사람은 외롭지 않으며 반드시 도우려는 이웃이 있다(德不孤必有隣)'는 동양 고전 속의 한 구절을 새삼 떠올린다.

▲<국선변호인이 만난 사람들>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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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훈

프레시안 정치팀 기자입니다. 국제·외교안보분야를 거쳤습니다. 민주주의, 페미니즘, 평화만들기가 관심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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