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국왕, '꼭두각시'였다는 '변명록'으로 처벌 피하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6] 전범 히로히토 (下) - ① "전쟁 반대했다면 쿠데타 났다"며 기소 피해

1945년 8월15일 항복을 선언할 무렵 히로히토는 벼랑 끝에 매달린 패배자였다. 5년 전 맺었던 3국동맹(1940년 9월27일)의 지도자 가운데 둘은 이미 3개월 전에 죽은 목숨이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4월28일 파르티잔에게 처형돼 밀라노 주유소 지붕에 거꾸로 매달렸고, 아돌프 히틀러는 4월30일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권총 자살했다. 히로히토는 이 둘의 비참한 최후를 떠올리며 '도쿄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을 것이 틀림없다.

패전국의 군주로서 점령자인 맥아더 장군에게 먹힐 만한 생존 전략이 히로히토에게 절실한 시점이었다. 그를 둘러싼 측근들이 머리를 맞댄 끝에 이끌어낸 생존 방안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15년 전쟁(1931-1945) 기간 동안 히로히토의 강력한 동맹자였던 군부 강경파에게 '전쟁 책임'을 떠넘기고, 둘째, 절대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꿔 국왕의 절대 권력을 양보하는 대신 '천황제'의 상징성만큼은 이어간다는 것이다.

더 이상 군국주의의 권위적 지도자가 아니라는 이미지 변신으로 위기를 넘기려면 두 가지 작전이 필요했다. 첫째는 점령자인 맥아더 쪽과 자주 오가며 의구심을 풀어야했고, 둘째는 지방 나들이를 통해 절대군주가 아닌 친근한 군주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흉흉한 민심을 다독여야 했다. 1945년 9월말 미 대사관에서 맥아더를 만난 뒤, 히로히토는 민심이 어떠한지를 부지런히 살폈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1945년 11월12일 히로히토는 도쿄 왕궁을 떠나 사흘 동안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신사 여러 곳을 들렀다. 화려한 왕실 의복이 아닌, 목깃을 곧게 세운 철도원의 검은 제복 같은 수수한 차림이었다. 한 시골 역에 왕실 전용 기차가 머물렀을 때 히로히토의 측근들은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이 돌멩이를 던지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전쟁으로 부모나 형제를 잃은 유족들이 돌팔매를 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히로히토에겐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 1946년 2월 요코하마를 방문한 히로히토가 시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국왕 수행원들은 돌멩이가 날아들지 않을까 긴장해야 했다.

히로히토 '인간 선언'의 노림수

이미지 변신으로 살아남으려는 히로히토의 꼼수는 해를 넘긴 1946년 1월1일 연두 조서로 나타났다. 그날 아침 일본 신문들은 일제히 조서의 전문을 실었다. 이는 물론 맥아더 쪽과 미리 합의한 내용이기도 했다. 조서에서 히로히토는 자신이 '살아있는 신'(現御神)이 아니라 했다. 흔히 ‘인간 선언’이라 일컬어지는 이 조서는 국왕과 국민 사이의 신뢰와 유대를 유달리 내세웠다.

지난날 그토록 강조됐던 신격을 히로히토 스스로 부인하고 인간계로 내려온 의도는 뻔했다. 도쿄재판에서 전범으로 처벌받는 불상사를 피하고, 아울러 곧 있을 일본헌법 개정에서 절대군주가 아닌 입헌군주를 뜻하는 '상징 천황'으로나마 '천황제'를 유지하려는 속셈이었다. 맥아더와 워싱턴의 트루먼 행정부는 '미국에게 더 이상 위협이 안 되는 일본' '미국의 안보 우산에 기댄 약한 일본'을 바랬다. 이른바 ‘평화헌법’(1946년 11월3일)에 들어간 입헌군주제(1~8조), 전쟁포기(제9조) 조항은 미일 양국의 합의에 따른 산물이라 하겠다.

독백록, "나는 재가만 했을 뿐"

그 무렵 일본 ‘보수 본류’들과 미국 사이엔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일제 육군 수뇌부에 전쟁 책임을 물리자는 공감대가 이뤄졌다. 전범재판이 시작되기 전인 1946년 3월 맥아더의 참모 보너 펠러스 준장(미 CIA 전신인 전략정보국 출신)이 요나이 미쓰마사 전 총리대신(해군대신, 연합함대사령관 역임)을 만났다. 펠러스는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없다는 점을 일본 쪽에서 입증하고 도조 히데끼가 모든 책임을 지는 게 좋겠다"는 맥아더의 의중을 전했다(하야시 히로후미, <일본의 평화주의를 묻는다> 논형 43쪽).

그러려면 히로히토 쪽에서 뭔가를 더 보여줘야 했다. 펠러스-미쓰마사 만남 바로 뒤 나온 문건이 '독백록'(獨白錄)이다. 여기서 그는 "군부와 의회가 전쟁 결정을 내렸고, 나는 재가만 했을 뿐"이라며 책임 회피성 발언을 늘어놓았다. 그 자신은 전쟁을 반대했으나 군부 강경파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전쟁에 휘말려들었다는 변명이다.

문제의 독백록은 1946년 3월18일부터 3주 동안 다섯 번에 걸친 모임에서 측근 5명과 함께 작성됐다. 히로히토의 구술을 받아 적는 형식이었다. 당시 궁중의 기록을 맡았던 시종이 남긴 비망록에 따르면, 히로히토는 심한 감기몸살로 집무실에 침대를 들여 놓은 채로 독백록 구술을 했다. 5월에 시작될 전범재판 개정 전에 미국 쪽에 영문본을 건네주려다 보니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독백록은 일본이 지난날 어떻게 만주를 거쳐 중국을 침략했고, 미국과 전쟁을 어떤 과정을 거쳐 벌이게 됐는가를 히로히토 자신의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다. 당시에는 그런 문건의 존재조차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히로히토가 죽은 다음 해인 1990년, 일본의 한 월간지를 통해서 그 내용이 처음 공개됐다. 1941년12월 진주만 공습과 관련된 대목을 보면 모든 전쟁책임을 도조 히데키에게 돌리고 있다.

"내가 개전 시에 도조 내각의 결정을 재가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내가 만약 주전론(主戰論)을 눌렀다면 정예군을 갖고 있으면서 미국에 굴복한다는 인상을 주기 마련이다. 일본 국내 여론이 들끓고 쿠데타가 일어났을 것이다. 이른바 어전회의라는 것도 이상하다. 출석자는 전원 의견일치이므로 반대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회의가 형식적이므로 천황에게는 결정권이 없었다."(昭和天皇の独白八時間. 文藝春秋 1990년 12월호)

▲ 1935년 무렵의 히로히토. 10년 뒤 패전국의 군주로 전범재판을 피하려고 "나는 (군부가 내미는 서류에) 재가만 했다"며 변명을 늘어놓을 줄은 생각 못했을 것이다.

'참회록이 아닌 변명록'이란 비판 받아

독백록 작성 며칠 뒤 히로히토는 같은 내용을 영문으로 옮기도록 했다. 맥아더 사령부와의 사이에서 통역을 하던 시종이 번역본을 만들었다. 일본어 독백록에 견주어 보면 영어본 분량이 훨씬 짧다. 일어본의 핵심 내용을 영어본에 담으면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보태졌다. "실제로 나는 감옥에 갇힌 죄수나 다름없는 무력한 존재였다"(허버트 빅스, <히로히토 평전> 삼인 23쪽).

한때 대동아공영이란 헛된 구호를 외치던 일제의 군 통수권자가 ‘면피성 독백’을 늘어놓는 모습이라니…. 히로히토가 자신을 '군국주의자들에게 붙잡혀 꼼짝 못하는 꼭두각시'처럼 그렸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자, 당시 남북한과 중국에선 당연히 비판 여론이 드셌다. 전쟁 책임과 죄상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참회록’이 아니라 아랫사람들에게 책임을 미루는 ‘변명록’을 남겼다는 지적을 받아 마땅했다.

일본 시민들 모르게 문제의 독백록을 맥아더에게 건넨 뒤 히로히토는 다시 전국 순행에 나섰다. 훈장을 주렁주렁 찬 군복 대신 중절모를 쓴 신사복 차림으로 시민들과 가까운 거리에서 인사를 나누는 히로히토의 모습은 물론 연출된 것이었다. 독백록과 마찬가지로 전범재판 기소를 피하려는 계산이 담겨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를 두고 한 연구자는 다음과 같이 혹평했다.

"미군 통치하의 입헌군주로서 일본 국민들의 복지에 깊은 관심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여 민정시찰을 한 것은 (전범 재판을 피하고 그 자신의 생존을 위해) 국민들을 속이는 치사한 눈가림이었다."(에드워드 베르,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508쪽).

키넌 검사, "히로히토는 갱단의 위협을 받았다"

1946년 1월19일 연합국 최고사령관 맥아더의 '특별 선언'으로 일본 전범들을 단죄하기 위해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소가 문을 열었다. 첫재판은 5월3일 벌어졌다. 독일 전범들을 다루려 만든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의 판검사 구성이나 재판 진행이 점령국 4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사이에 그런대로 공평하게 이뤄졌다면, 도쿄는 그렇질 못했다. 일본 점령자인 미국의 주도권 아래 진행됐다.

판사 11명, 검사 11명 모두 11개국 출신 법조인으로 도쿄 재판소가 구성됐지만, 그것은 형식이 그랬다는 것이다. 실제는 미국이 칼자루를 쥐고 흔들어댔다. 중국과 타이완, 필리핀 등 일본 점령지역의 법조인들이 참여했지만,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 출신 법조인은 없었다. 도쿄 재판은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미국 지도부의 뜻이 어떠하냐에 따라 영향을 받았다. 기소할 것인가 말 것인가, 형량은 얼마나 줄 것이냐는 핵심 사항은 미국이 영향력 아래 결정됐다.

조지프 키넌 수석검사는 맥아더 장군과 수시로 소통하면서 '히로히토 불기소' 지침을 충실히 받들었다. 그 과정에서 호주 출신의 재판장 윌리엄 웨브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웨브는 "1945년 8월15일 방송으로 일본군의 전쟁 행위를 멈추도록 한 사람이 히로히토라면, 전쟁을 시작하기로 결정한 사람도 히로히토일 것"이란 논리 아래 전쟁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키넌 수석검사가 1차로 기소한 전범들 가운데 히로히토의 이름은 없었다.

웨브 재판장이 "히로히토는 왜 기소를 하지 않느냐?"고 묻자, 키넌은 미국에서 조폭들을 단속한 경력을 지닌 검사답게 퉁명스레 대꾸했다. "모든 사람들이 히로히토가 전쟁 전에 갱단들(일본 육군 수뇌부)의 위협을 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베르, 487쪽).

웨브는 히로히토가 위협이나 강요를 받아 전쟁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고 여겼다. "어떤 통치자도 침략전쟁 개시라는 범죄를 범하고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웠기 때문이라며 당당히 면죄를 주장할 수는 없다"고(빅스, 676쪽).

웨브 재판장과 신경전을 펴던 키넌 수석검사는 다른 전범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히로히토의 관련성이 떠오를 때마다 검사의 추가 질문을 막았다. 그리곤 곧바로 다른 주제의 심문으로 넘어가도록 했다. 그런 일들이 되풀이되자, 소련과 영국에서 파견된 검사를 비롯해 몇몇 검사들이 불만을 나타냈다. 하지만 상황을 결정적으로 뒤집진 못했다. 키넌 뒤엔 점령국 사령관 맥아더가 있었다.

▲ 히로히토가 불기소된 가운데 도교 전범재판(공식명칭은 극동국제군사재판)에 출석한 주요 전범들. 재판은 1946년 5월부터 1948년 11월까지 2년6개월 동안 이어졌다.

도조, "폐하는 나의 진언에 동의했다"

히로히토를 기소명단에서 빼라는 맥아더 장군의 지침을 받은 키넌 수석검사가 가장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도조 히데키의 법정 태도였다. 도조가 "천황폐하를 지켜드리겠다"는 말을 주변에 흘리면서도, 법정에서 돌출발언을 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키넌은 무엇보다 도조가 어떤 발언을 할 것인지 걱정했다. 불안이 점점 커지자 도조의 진술 내용을 뒤졌다. 그리고 도조가 진술서에서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쓴 대목을 보고 안심했으며 법정에서도 그대로 발언하기를 원했다.' (호사카 마사야스,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페이퍼로드 636-637쪽)

도조는 법정 진술에서 가끔 오락가락 했다. 심리상태가 불안정했던 탓이었을 것이다. 키넌 수석검사가 히로히토에게 면죄부를 주는 발언을 이끌어내려고 도조에게 유도심문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도조는 키넌의 의도를 비웃듯이 답변해 한순간 법정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키넌 : (일본이) 전쟁을 한 것은 히로히토 천황의 의사가 아니었습니까?

도조 : 폐하의 의사에 반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쟁을 벌이겠다는) 나의 진언, 통수부 기타 책임자의 진언에 따라 폐하께서 동의하신 것은 사실입니다.(<A급 전범의 증언: 도쿄전범재판 속기록을 읽다 / 도조 히데키 편> 언어의 바다 455-456쪽)

'전쟁이 히로히토의 뜻이 아닌 것은 잘 모르겠다'는 표현엔 미묘한 여운이 담겨 있다. 더구나 ‘나의 진언에 동의했다'는 도조의 법정 발언은 히로히토가 군 통수권자로서 책임을 비껴가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도조는 금세 말투를 바꾸었다. "평화를 사랑하는 폐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놓지 않으셨고 전쟁 중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그 근거로 진주만 공습 다음날 히로히토가 발표한 '선전 조칙'에서 "이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지만 내 의사에 반하는 것이다"라는 (히로히토 측근들이 당시 입에 달고 살던) 문장을 들먹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키넌의 얼굴 표정이 밝아졌다.

교수형 7명, 조선총독 2명 포함 16명 종신형

도쿄 재판은 1946년 5월 개정부터 1948년 11월 판결까지 2년6개월을 끌었다. 7명이 교수형, 16명이 종신형을 언도 받았다. 1948년 12월23일 처형된 이들 7명 가운데는 전시내각의 우두머리였던 도조 히데키(대장), 난징 학살의 주범이었던 마쓰이 이와네(중지나방면군 사령관, 대장)가 포함됐다. 히로타 고키(전 총리, 외무대신)가 유일하게 문관 출신이고, 나머지 6명은 모두 육군 고위 장성들이다.

종신형을 받은 16명 가운데는 전 조선총독이 2명 포함됐다. 고이소 구니아키(육군대장, 전 총리대신), 미나미 지로(육군대장)가 그러하다. 고이소는 스가모 교도소에서 옥살이하던 1950년 식도암으로 죽었고, 미나미는 1955년 병으로 가출옥해 1년 뒤 죽었다. 사람이 나이 들면 회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못된 과거를 털어놓고 사죄를 한다지만, 이들은 죽을 때까지도 "조선 민족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진 않았다.

히로히토의 최측근 기도 고이치(내대신)도 종신형을 받았다. 히로히토가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전범자들의 선고 형량을 하나하나 전해들을 때, 최측근이었던 기도가 종신형을 받았다는 대목에서 특히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베르, 497쪽). 기도는 1955년 가석방으로 풀려나 1977년 88세로 죽었다. 말년에 이런저런 인터뷰를 하면서도 주군인 히로히토에게 불리한 말은 삼갔다.

▲ 전범재판에 출석한 도조 히데키. 일제의 전시내각을 이끌었던 도조는 교수형 판결을 받고 1948년 12월23일 처형됐다.

도쿄재판은 히로히토-맥아더의 합작품

도쿄재판의 결과를 놓고 보면, 히로히토를 ‘국체’(國體)로 여기고 지키려던 궁정 세력과 안정적인 일본 통치를 바라던 점령국 사령관 맥아더의 계산대로 된 셈이다. 따라서 도쿄재판은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일본 육군 강경파를 제물로 삼은 히로히토와 맥아더의 합작품이라 평가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흔히 말해지듯이 승자의 일방적인 재판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얘기다. 일본현대사 전공자인 하야시 히로후미(간토가쿠인대학)의 아래 분석은 귀를 기울일 만하다.

"도쿄재판은 승자의 재판이며, 일방적인 재판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오히려 미국과 일본의 합작으로 진행되었다는 성격이 강하다. 미국으로서는 새로운 동맹자를 만드는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측도 그 각본에 호응해 자신들의 생존을 도모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과 내통하던 세력이 뒷날 요시다 시게루 내각을 지탱하는 세력, 즉 '보수 본류'가 된다." (하야시, 44쪽)

지금도 많은 일본인들은 "일본 국왕은 평화주의자였는데, 도조 히데키를 정점으로 한 육군 강경파가 국왕과 그 측근들, 정치가, 관료들을 협박해 전쟁을 밀어붙였다"고 여긴다. 깡패 같은 도조가 선량한 군주인 히로히토를 윽박지르며 잘못 모셨다는 것이다. 1945년 패전 뒤 지금까지 대다수 일본인들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는 이런 ‘태평양사관(史觀)’은 역사의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하야시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이런 잘못된 태평양사관을 바탕으로, (도조 히데키에게 모든 전쟁 책임을 씌우려고) 미국과 일본이 한통속이 돼 도쿄재판에서 만들어 퍼뜨린 사관이 ‘도쿄재판사관’이다. 이런 관점에서 도쿄재판을 바라본다면, 흔히 알려진 대로 ‘승자의 재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도쿄재판이 히로히토와 맥아더가 야합한 상태에서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1948년 12월23일 주요 전범자 7명의 처형을 끝으로 히로히토의 전쟁범죄 단죄는 이뤄지질 못했고, 그와 관련된 사안은 ‘과거사’란 이름의 역사 저장소로 옮겨진 다음 자물쇠가 채워졌다. 일부 연구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봉인’(封印)됐다. 일본인들은 흔히 "훗날 역사가들이 평가를 내릴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뒤로 미루기만 한다면, 그 때가 언제 올 것인가. 도쿄재판이 끝나고 75년, 1989년 히로히토가 죽고 34년이 흘렀다. 역사의 냉정한 평가를 받을 때가 이미 지나지 않았나 싶다.

쓰다 보니 분량이 길어져, 생각 끝에 ‘하1’과 ‘하2’로 나누었다. 다음 주 ‘하2’ 글에선 히로히토가 전범으로 처리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난 도쿄재판의 문제점, 그 뒤로 지금껏 이어져온 부정적인 유산을 살펴볼 참이다. 아직까지도 지난날 일본제국주의의 망상을 역사의 쓰레기장에 내다버리지 못한 일본인들이 적지 않다. 이들이 반드시 되새겨야 할 역사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독자들과 함께 짚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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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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