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 성공 뒤 흐뭇했던 일 국왕이 반전 평화주의자?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5] 전범 히로히토 中

1945년 패전 직전까지 일본 헌법에서 히로히토는 대원수 직함으로 군 통수권을 가졌다. 이는 당시의 일본 헌법에 보장된 권한이었다.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제1조)로 시작하는 헌법은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제11조), '천황은 전쟁을 선언하고, 강화하며 아울러 제반 조약을 체결한다'(제13조)라고 못 박았다. 그렇다면 일본군의 침략 행위와 그에 따른 전쟁범죄의 책임은 통수권자인 히로히토가 짊어져야 마땅하다.

미군 상륙 앞서 기밀문서 파기, '스모킹 건' 사라져

1945년 패전 뒤 히로히토는 "전쟁 초기부터 내 손발이 묶여 있었다"면서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군부 강경파에게 전쟁 책임을 돌렸다. 그의 측근들은 "그때의 상황은 군부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한다. 패전 30년을 맞은 해인 1975년 히로히토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기자회견에서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을 반대했으며 군부의 독주가 전쟁의 원인이 됐다"는 식으로 우겼다. 과연 실제로 그랬을까.

일본은 8월15일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 뒤 엄청나게 많은 문서들을 태워 없애거나 빼돌렸다.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기 앞서 서둘러 그들의 전쟁범죄 증거물들을 치운 셈이다. 그런 사정으로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입증할만한 자료가 많지 않다. 빼도 박도 못할 확실한 '스모킹 건'을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히로히토와 그를 감싸는 일본의 '보수 본류'들은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군부 강성파에 떠밀려, 내키지 않았지만 군사 작전을 승인하는 옥새를 눌렀다"면서 책임을 미룰 뿐이다.

히로히토를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받들었던 내(內)대신 기도 고이치는 '보수 본류'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하나다. 기도의 조부와 부친은 일본 귀족(후작)으로 왕실과 가깝게 지냈다. 기도 또한 후작 작위를 물려받았고 문부대신, 후생대신, 내무대신 등 요직을 거쳐 '국왕 비서실장' 격인 내대신을 지냈다. 그는 도쿄 전범재판 법정에서 1945년 8월15일 히로히토의 종전 선언도 자신의 진언에 따른 것이라 밝혔다(극동국제군사재판소, <기도의 고백: 도쿄전범재판 속기록> 바다의 언어, 359쪽).

▲ 해군 제복을 입고 전함 무사시 호에 오른 히로히토(왼쪽).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때도 해군 제복 차림으로 대기중이었다고 알려진다. Ⓒ일본해군성

히로히토를 미화한 <기도 일기>

기도는 1931년부터 1945년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썼다. <기도 일기>로 일컬어진 이 문건은 도쿄 전범재판에서 증거물 목록에도 올랐다. 하지만 그 안에 '스모킹 건'은 없다. 드문드문 히로히토를 서술한 대목에서는 그를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 또는 자원부국인 미국과의 전쟁이 일본에 가져다줄지 모를 불이익을 염려하는 '신중한 절대군주'로 그리고 있다.

히로히토의 최측근인 기도가 진주만 공습 계획을 몰랐을까. 당연히 미리 알았을 테지만, 법정에서 이렇게 발뺌했다. "아침 6시를 약간 지나 시종무관 중 한 명이 내게 전화를 걸어, 해군이 하와이를 공격했다는 보고를 전했다. 일본 함대가 진주만을 향해 떠났을 당시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기도의 고백> 264쪽). 밑에서 살펴보겠지만, 새빨간 거짓말이다(기도는 도쿄재판에서 종신형을 언도받았다가 1955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과 역할을 말해주는 자료들은 그래도 곳곳에 남아 있다. 일본 대본영 안에서 날마다 작성된 전쟁일지, 일본 각급 군부대에서 작성한 진중일지, 일본 수뇌부의 일기, 일지나 메모, 그들끼리 서로 주고받았던 편지나 쪽지 같은 자료들, 관계자의 증언 등이다. 이를 바탕으로 그동안 여러 연구자들이 책과 논문들을 써왔다. 하지만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에 관한 한 대부분이 원론적인 문제제기에서 더 나아가질 못했다.

그러던 중 2000년에 모처럼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을 다룬 화제작이 나왔다. 미 역사학자 허버트 빅스(전 빙햄튼대 교수)는 폐기되지 않은 1차 자료, 이미 출판된 관련 책과 논문들, 그리고 다양한 증언들을 바탕으로 <히로히토와 근대 일본의 형성>(Hirohito and the Making of Modern Japan)을 냈다. 이 책으로 빅스는 2001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일본의 극우파 논객들은 빅스의 책을 가리켜 근거가 부족하다느니, 비약이 심하다느니 하며 시비를 걸었다. '반일 위서'(反日僞書)라는 비난조차 나왔다. 하지만 빅스의 책은 퓰리처상이 말해주듯이 학문적 잣대로 검증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한 역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문 원서가 800쪽, 2010년 삼인에서 <히로히토 평전>이란 이름으로 낸 번역본은 940쪽 분량으로 두껍다.

프랑스 저널리스트 에드워드 베르가 1989년에 낸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Hirohito: Behind the Myth)도 앞의 책 못지않은 역작이다(한국어 번역본은 2002년 출간). 로이터통신 파리특파원, 뉴스위크 홍콩지국장과 파리지국장을 지낸 베르는 알제리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취재 보도했던 베테랑 언론인이다. 일제가 세운 만주괴뢰국의 무대로 한 영화 ‘마지막 황제’의 원작가이기도 하다.

빅스와 베르 두 사람의 저작을 길잡이로 삼고, 아울러 출판사 '언어의 바다'에서 번역판으로 낸 <도쿄전범재판 속기록>들을 참고하면서 전범 히로히토의 민낯을 들여다보자.

"작전 결과가 좋으면 그것으로 그만"

먼저 만주 침략과 관련된 히로히토. 1931년 9월18일 류탸오후에서 일본 관동군은 만주철도 선로를 일부러 폭파하고는 이를 트집 잡아 군사행동을 일으켰다. 관동군 사령관, 작전참모 2명 합쳐 3명이 은밀하게 오랫동안 준비해온 조작극이었다. 이로써 일본은 1945년 패전 때까지 줄곧 전쟁 상황 속에 지냈다. 일본인들은 그래서 이 기간 동안의 전쟁을 가리켜 '15년 전쟁'이란 용어를 쓰기도 한다.

히로히토는 사전에 관동군의 만주 침략 계획을 알진 못한 듯하다. 하지만 군 통수권을 지닌 히로히토의 재가 없이 조작극으로 전쟁을 일으킨 관동군 핵심 3인에 대한 징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류탸오후 조작극 사흘 뒤, 관동군으로부터 증원군 요청을 받은 조선주둔군 사령관이 '윤허'를 기다리지 않고 '재량권'으로 혼성여단을 압록강 넘어 봉천으로 이동시켰다. 히로히토의 통수권을 침해한 것이 분명했지만, 조선주둔군 사령관에 대한 징계도 없었다.

히로히토는 사태를 이미 정해진 일로 용인했다. 그는 신하의 부대가 제국의 판도를 확대하고자 하는 일을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 설령 통수권을 침해한 사실이 있을지라도 작전의 결과가 좋으면 그것으로 그만인 셈이다(에구치 게이치, <15년 전쟁 소사> 아오끼서점 1991, 36-37쪽. 허버트 빅스, <히로히토 평전> 삼인 276쪽에서 재인용).

일본 관동군이 1932년 1월 만주 전역을 점령하고 3월 괴뢰 만주국을 세울 때까지 히로히토는 군사행동을 줄곧 추인했다. 따라서 만주 침략을 두고 히로히토가 "나는 몰랐다. 책임이 없다"고 발뺌만 하는 것은 무책임 그 자체라 하겠다.

▲ 1937년 난징 점령 뒤 벌어진 100인 목베기 시합을 전하는 일본 신문기사

상하이 폭격 승인하며, "단호한 결의로 임하라"

다음으로 중일전쟁. 1937년 7월8일 베이징 남쪽 30km가량 떨어진 루거우차오(盧溝橋)에서 벌어진 총격전(이것도 만주 침략 때와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자작극!)이 벌어졌다. 일제의 중국 본토 침략과 그에 따른 전쟁범죄가 본격화됐다. 난징 대학살은 중일전쟁 초기에 벌어졌던 대표적인 전쟁범죄다.

당시 히로히토는 루거우차오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기 1주일 전 아무르 강에서 일어났던 소련군과의 소규모 충돌이 소련을 자극했을까를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참모총장과 스기야마 하지메 육군대신은 "일본 육군에 관한 한 걱정할 필요 없다. 만약 중국과 전쟁을 하더라도 2~3개월 만에 끝낼 수 있다"고 히로히토를 안심시켰고, 히로히토는 그 두 사람의 설명이 일리 있는 것으로 여겼다(빅스, 364쪽).

루거우차오 조작극 19일 뒤인 7월27일 히로히토는 베이징과 톈진 공격을 승인했고, 일본군은 총공격 이틀 만에 두 도시를 유혈 점령했다. 만주 침략 때와는 달리 히로히토는 일본군의 군사행동을 적극 격려하면서, 화북 지역으로의 일본군 파병안을 승인했다. 8년 동안 많은 이들을 희생시켰던 중일전쟁의 피바다에 히로히토 자신이 군 통수권자로서 적극 발을 내디뎠음을 알 수 있다.

1937년 8월13일 일본군은 상하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해군 지휘부가 히로히토에게 "상하이를 폭격하고 중국 연안을 해상 봉쇄하겠다"며 작전계획을 올렸다. 히로히토는 그 계획을 승인하면서, 제독들에게 "단호한 결의로 임하라"고 독려했다. 장제스 휘하의 국민당 군대가 상하이를 굳건히 방어하면서 일본군의 전투성과가 지지부진하자, 병력 증강을 6차례 승인했다(빅스, 369-370쪽).

왕궁 안에 대본영 설치, 전쟁 독려

상하이 전투가 수렁에 빠졌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전선이 고착돼 있을 무렵인 1937년 11월 말, 히로히토는 왕궁 안에 '대본영'을 설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 육군과 해군이 합동 작전을 논의하는 최고사령부가 바로 대본영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 설치됐던 것을 부활시켰다. 히로히토가 일본 헌법상 군 통수권을 지닌 대원수로서의 역할을 좀 더 적극적으로 맡아 해내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같은 무렵 육해군 통수부와 정부내각 사이의 연락기구인 ‘대본영-정부 연락회의’가 만들어졌다. 이 연락회의에서 논의된 사안의 최종 결정은 정부와 군의 핵심 인사들만이 참석하는 '어전회의'에서 내려졌다. 대본영-연락회의-어전회의 순으로 히로히토가 '전쟁국가 일본'의 주요사항들을 결정하는 자리에 빠짐없이, 그것도 핵심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 무렵의 히로히토는 '매번 결정적으로 다양하게 (주요사항에) 개입했다'(빅스, 374쪽).

"난징 학살을 그가 몰랐을 리 없다"

상하이 전투 다음으로 벌어진 것이 전쟁범죄로 얼룩진 난징 전투다(1937년 12월). 일본군이 난징에서 중국인들을 불태워 죽이고, 생매장해 죽이고, 양쯔강에 빠뜨려 죽이고, 성폭행하고 죽이는 야만적 범죄를 저지른 까닭은 무엇일까. 다른 무엇보다 (쉽게 끝날 것이라 여겼던) 상하이 전투에서 고전했던 것에 대한 앙갚음이 작용했다. 난징으로 진군하던 당시 일본군의 심리상태를 거칠게 표현하자면 '잔뜩 독이 올라 악에 바쳐' 있었다.

나카지마 중장 휘하의 일본군 제16사단은 난징 점령 첫날인 1937년 12월13일 하루 동안 중국군 포로 3만 명을 죽였다(빅스, 379쪽). 일본군은 꼬박 45일 동안 난징에서 학살극을 펼쳤다. 난징에 파견돼 있던 미국과 유럽 기자들, 일본군을 따라 다니던 뉴스영화 촬영기사를 포함한 종군기자들이 목격자다. 난징의 참상은 곧 미국과 유럽에 알려졌다.

히로히토는 난징에서 끔찍한 전쟁범죄가 저질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그렇지 않다.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에 일본인 소위 둘이 이른바 '100인 목베기 시합'을 벌였다는 소식을 얼굴 사진과 함께 실어 화제를 모았다. 잔혹한 전쟁범죄를 드러내놓고 자랑하는 기사가 어떻게 전시 검열을 통과했을까. 힘들었던 상하이 전투 뒤 일본인들의 사기를 높일 목적으로 게재 허가가 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도쿄니치니치신문>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 군도를 짚고 나란히 서있는 두 일본 장교의 모습이 실려 있다. 그 사진을 바라보며 히로히토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얼빠진 전시 지도자가 아니라면, 난징에서 잔혹한 전쟁범죄가 마구 저질러졌음을 짐작했을 것이다. 빅스는 이렇게 비판한다.

히로히토가 (난징 학살을) 몰랐을 리는 없을 것이다. 일본군의 지휘명령 계통의 정점에 있었고, 일본군의 모든 동정을 상세히 쫓고 있었고, 매일 외신과 신문을 읽었다. 히로히토는 군기 붕괴에 관심을 쏟을 의무를, 헌법상으로나 최소한의 도의상 지고 있었다. 이러한 의무를 실천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빅스, 382쪽).

히로히토가 난징 대학살과 관련해 일본군을 질책을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난징 점령을 지휘했던 일본 중지나방면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 대장이 1938년 2월 잠시 도쿄에 들렀을 때 그의 ‘위대한 전과’를 기리는 칙서를 내렸다. 훗날 도쿄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마쓰이의 전쟁범죄를 히로히토는 묵인했을 뿐만 아니라 치하까지 했다. 마쓰이가 도쿄 전범재판에서 교수형을 받았듯이, 히로히토도 군 통수권자로서 난징 학살에 책임을 졌어야 마땅하지 않았을까.

▲ 1941년 12월7일에 벌어졌던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미국에게 선전포고문이 전달된 것은 공습 1시간 뒤였다.

"진주만 공습 앞서, 공격계획 보고받고 지도 살폈다"

미국이 도쿄 전범재판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룬 안건은 무엇일까. 난징 학살이나 조선인 강제징용? 아니다. 진주만 공습이었다. 1941년 12월7일 일요일 아침 7시50분(미국 시각)부터 벌어진 기습공격으로 미군 2335명, 민간인 68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전함을 비롯해 군사 장비의 피해도 컸다(일본군은 사망 64명). 일본쪽 1차 자료와 문헌을 바탕으로 빅스는 히로히토가 진주만 기습작전에 관련됐다고 잘라 말한다.

(진주만 공습 한 달 전인) 11월8일 히로히토는 진주만 공격 계획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15일에는 전쟁 계획의 전모와 세부사항을 받아 보았다(빅스, 471쪽).

12월2일부터 8일, 곧 ‘X데이’까지 일본 시민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히로히토는 일본군 통수부와 면담을 거듭하며 함대편제를 점검하고, 전쟁계획과 지도를 살피고, 여러 침공 지점을 향해 이동하는 전 부대의 동정을 보고받았다(빅스, 483쪽).

선전포고 없이 침략전쟁을 벌였기에, 도쿄 전범재판은 '평화를 깨뜨린 죄'(crimes against peace)라는, 그전까지 국제형법에 없던 죄명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이른바 A급 범죄다(B급 범죄는 일반적인 전쟁범죄, C급은 반인도적 범죄). 히로히토가 진주만 공습작전을 미리 알았다면, 다른 무엇보다 평화를 깨뜨린 A급 범죄로 기소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일본 주미대사 노무라 기치사부로는 미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일본 정부의 선전포고문을 내민 것은 진주만 공습 1시간 뒤였다. 히로히토는 공습 8시간 가까이 지난 뒤에야 일본 국내용 '선전 조칙'을 발표했다. 어디까지나 히로히토를 보호하려는 충성심에서였을까, 도쿄 전범재판정에서 도조 히데키는 진주만 공습 전 히로히토 관련 행적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미국에게 전쟁) 통보를 (진주만) 공격 개시 전에 전달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천황폐하께서는 나와 (육군과 해군) 양 참모총장에게 여러 차례 지시를 내렸고, 내가 그 뜻을 (대본영과 정부 사이의) 연락회의 관계자에게 전달했다."(<A급 전범의 증언: 도쿄전범재판 속기록을 읽다 / 도조 히데키 편> 언어의 바다, 182쪽)

히데키는 주군을 지켜주려는 충성심에서 "진주만을 공격한 뒤에 선전포고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히로히토의 뜻이라고 밝혔지만, 그걸로 히로히토의 죄가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증언으로 히로히토가 진주만 기습을 사전에 알았고, 기습작전을 최종 승인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뿐이다.

진주만 공습 때 해군제복 입고 소식 기다려

진주만 기습이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히로히토는 들뜬 상태에서 하루를 보냈다. 시종무관 조에이 이치로가 남긴 일기에는 진주만 공습 성공 다음날 히로히토가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가가 시간대별로 기록돼 있다. 그날 일기는 이렇게 끝난다. '오늘 하루 종일 해군복 차림으로 흐뭇하게 배알을 받으시다'(빅스, 486쪽).

여러 기록에 따르면, 진주만 공격을 앞둔 히로히토는 해군 제복을 입고 상황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보좌관과 함께 무전기를 틀어놓고 앉았다. 히로시마 근해에 정박 중이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연합함대사령관)의 기함 나가토 호로부터 진주만 공격이 성공했다는 첫 번째 소식을 듣기 위해서였다(에드워드 베르,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354-355쪽 참조).

히로히토의 측근인 기도 고이치는 도쿄전범재판에서 "천황은 마지막까지 전쟁을 바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기도를 비롯한 일본의 '보수 본류'들은 진주만 공습 바로 뒤 히로히토가 발표한 조칙에서 "이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지만, 내 의사에 반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들먹이곤 한다. 진주만 기습 성공 뒤 해군복 차림으로 흐뭇한 하루를 보냈던 히로히토가 반전 평화주의자였다고? 그야말로 언어의 희롱이고 말장난이다.

▲ 1940년 일본 세균전 부대인 731부대 요원 둘이 중국인 포로를 상대로 박테리아 감염 실험을 하는 모습. 히로히토는 이 부대의 설립을 명령하는 문서에 옥새를 눌렀다.

"옥새를 우편 스탬프처럼 찍진 않지요"

끝으로, 731부대와 관련된 히로히토의 책임. 세균전을 준비하면서 적어도 3000명, 많게는 1만 명을 실험용으로 죽였던 731부대의 존재에 대해서 히로히토가 몰랐을까. 이 물음에 대해 확실하게 말해줄 일본 전문가는 별로 없다. 1936년 '전염병 예방과 수질 정화부대'라는 이름으로 창설된 731부대와 히로히토를 잇는 결정적인 '스모킹 건'이 없는 탓이다. 이에 대해 프랑스 저널리스트 에드워드 베르는 "의심할 여지없이 히로히토가 진실을 알고 있었다"고 믿는다.

"히로히토는 이 부대의 설립을 명령하는 문서에 천황의 옥새를 눌렀다. 황실 가족 한 사람도 저자인 나에게 ‘천황은 옥새를 찍기 전에 모든 문서들을 반드시 다 읽습니다. 옥새를 절대로 우편 스탬프처럼 찍지는 않지요’라고 말해 주었다."(베르, 245쪽)

히로히토를 감싸는 우파들은 "천황이 1945년 8월15일 성단(聖斷)을 내려 전쟁을 멈추었다"고 말한다. 전쟁을 끝낸 사람이 히로히토란 얘기다. 그렇다면 일찍이 군부 강경파에게 "침략 전쟁을 벌여선 안 된다"는 '성단'을 왜 내리지 못했을까. 측근들이 하는 말대로 그가 전쟁보다 평화를 사랑했던 '성군'이었다면 말이다.

아쉬움은 또 있다. 당시의 헌법상 군 통수권을 쥔 히로히토가 '성단'을 8월15일보다 좀 더 일찍 내렸더라면 어땠을까.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희생자 20만 명의 생목숨은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당시 누가 봐도 운동장은 기울대로 기울어 있었다. 그런데도 '1억 옥쇄'(玉碎)니 뭐니 하며 결사항전을 외치는 군부 강경파들을 통제하지 못한 책임은 오로지 히로히토에게 있다. 히로히토가 불기소된 가운데 도쿄 전범재판이 어떻게 대충 마무리됐는지, 그 재판이 두고두고 남긴 불편한 문제점들은 무엇인지를 다음 주에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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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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