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 갈 '차렷자세' 일본 왕, '뒷짐' 진 맥아더가 살렸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4] 전범 히로히토 上

1월 27일은 국제 홀로코스트희생자 추모의 날이다. 이스라엘 극우파들은 걸핏하면 지난날 유대인들이 나치의 전쟁범죄로 말미암아 대학살(홀로코스트)을 겪은 피해자임을 내세운다. 유대민족이 또 다시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으려면, 21세기 '깡패국가'라는 비판을 무릅쓰고라도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주변 민족을 군사적으로 억압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 정치지형에서 '좌파'로 분류되는 평화주의자들은 우파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유대민족이 지난날 홀로코스트를 당했다는 이유로 다른 민족을 노예화하는 상황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고 여긴다. 더구나 '문명의 세기'라 일컬어지는 21세기에 말이다. 그러면서 나치 홀로코스트가 남긴 교훈 가운데 하나는 "힘이 있다고 타민족의 평화적 생존권을 침해해선 안 된다"는 것임을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자기혐오 유대인'과 '자학하는 비(非)국민'

비록 소수파이지만 양심적인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이 바라는 땅을 돌려주고, 이스라엘은 평화를 되찾는 이른바 '땅과 평화의 교환'이 중동 평화의 지름길"이라 외쳐왔다. 하지만 극우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오히려 평화주의자들을 향해 “당신들은 자기혐오(self-hatred)에 빠졌어”라고 조롱한다. 유대인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자존감을 잃었다는 얘기다.

'자기혐오에 빠진 유대인들'(self-hating jews)의 일본판(版)이 ‘자기학대하는 일본인들’이다. 소수의 양심적인 일본인들은 “지난날 일본이 저질렀던 전쟁범죄 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합당한 피해 배상을 해야 마땅하다”고 말해왔다. 그런 그들을 향해 일본 극우파들이 하는 말은 "자학(自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비국민(非國民)이야”라고 딱지를 붙인다.

일본 사학계도 비슷한 상황이다. 일부 양심적인 사학자들은 “전쟁범죄로 얼룩진 일본의 어두운 과거사를 스스로 반성하는 차원에서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른바 ‘자성(自省) 사관’을 지닌 이들을 향해 일본의 보수 사학계는 “당신들은 자학 사관을 지녔어”라고 손가락질한다. 대동아공영권이란 해괴한 꿈을 꾸면서 군국주의에 강한 향수를 지닌 일본 극우파들은 ‘사죄’니 ‘배상’이니 하는 단어들을 아주 싫어한다.

▲ 중국 침략전쟁을 한창 벌이던 1938년, 일본 육군 열병식에서 백마를 타고 나타난 히로히토.

일본이 전쟁 피해국?

독일이 나치 전쟁범죄에 대해 나름의 성의 있는 배상을 해온 반면, 일본은 그렇지 않다. 배상은커녕 전쟁범죄 자체를 부인하기 일쑤다. 일본의 우파들이 왜 일본이 독일과는 다른가를 우기는 논리적 근거를 모아보면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일본은 독일의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과 같은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고, 둘째, 오히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은 전쟁 피해국이라는 주장이다.

일본이 전쟁 피해국? 물론 원폭 두 방으로 20만 명 넘는 민간인들이 죽은 사실을 떠올리면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적어도 2000만 명(일본 300만 포함, 추정치)이 죽었다. 지난주에 살펴봤던 난징 대학살을 비롯해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길고도 어마어마한 목록들을 떠올리면, 가해국 쪽의 무게가 훨씬 무겁다. 일본 극우파들이 그런 진실을 좀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과거사를 둘러싼 주요 논란거리다.

왜 그렇게 일본사회의 분위기가 과거사에 관한 한 뻔뻔스러울까. 일본인을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대체로 예의 바르고 싹싹하다. 하지만 집단을 이뤄 과거사를 보는 눈은 장님에 가깝거나 막무가내다. 일본의 검정 교과서에 그런 진실이 왜곡이나 축소, 또는 아예 빠져 있다. 공부 끈이 아주 짧다면 모를까, 대개는 모르는 척하기가 십상이다. 진실을 알면서도 왜곡하면서 우기자니 그런 짓도 힘들 것이다. 그 원인을 거슬러 보면 일본 국왕 히로히토(裕仁, 1901-1989)를 전쟁범죄자로 처벌하지 못한 것과 관련이 크다.

"히로히토는 재산 내놓고 물러나야"

여기서 잠시 눈을 감고 타임머신을 타고 1945년 8월15일 항복 직후의 일본으로 가보자. 1945년 5월초 나치 독일이 무너졌을 때 전쟁범죄자 처벌이 점령국들의 주요과제였듯이, 독일보다 3개월 뒤 전쟁이 끝난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히로히토가 전범 처리될 것인지가 큰 관심사였다. 전시 내각을 이끌었던 도조 히데키 같은 자들이야 당연히 체포돼 법정에 세워지겠지만, 히로히토는?

전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제아무리 히로히토라고 하지 않았을까. 최소한도의 책임감을 지닌 인간이라면 스스로 처벌 받겠다는 뜻을 밝히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패전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국왕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을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결과는 상식 밖으로 매듭지어졌다. 히로히토는 전범으로 기소도 안 됐고 국왕자리를 지켰다.

패전 뒤 일본에선 히로히토가 법적 처벌을 받지 않더라도 패전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들이 당연히 나왔다. 반전평화운동 시민단체들과 좌파 정치세력들은 이참에 천황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파 안에서는 폐지보다는 낮은 단계인 퇴위를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패전 당시 일본내각의 대동아부 차관이던 타지리 아키요시도 그런 주장을 폈다.

항복 직후인 1945년 8월17일부터 10월9일까지 짧게 총리직에 있었던 인물이 히로히토의 고모부인 히가시쿠니 나루히코다. 그는 일본 왕족으로 총리를 지낸 유일한 인물이다. 타지리는 히가시쿠니 총리에게 "천황이 (만에 하나) 전쟁에 반대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침략과 그에 따른 전쟁범죄에) 침묵했다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도의적 책임이 있다"면서 '천황의 퇴위와 왕실 재산 처분'을 건의했다(하타노 스미오, <전후 일본의 역사문제> 논형 42쪽).

타지리의 생각은 '천황제 폐지, 히로히토 구속'을 외친 일본 좌파들의 주장과는 결이 달랐다. 국왕이 물러나고 재산을 처분한다면, 왕실과 일반 국민 사이에 새로운 유대감이 생겨나고 오히려 일본 재건의 계기가 될 것으로 여겼다. 1978년 타지리가 남긴 <회상록>에 따르면, 히가시쿠니 총리에게 그런 얘길 꺼내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찬성했지만, 총리가 실제로 국왕 퇴위를 위해 움직이진 않았다(하타노, 43쪽).

▲ 1947년 고베를 방문한 평상복 차림의 히로히토. 총에 착검을 한 미군 병사들이 바로 옆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다.

미국인 77%, "히로히토 엄벌해야 마땅"

진주만 공습으로 많은 희생자를 낳았기에 전쟁 중 미국의 여론은 히로히토에 대해 좋질 않았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전쟁이 끝나면 히로히토를 처형하거나(30%), 종신형에 처해야 마땅하다는(37%) 생각들을 품고 있었다. 전쟁책임을 면해주고 국왕으로 남겨두자는 쪽은 7%에 머물렀다.(에드워드 베르,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412쪽)

1945년 6월 갤럽 여론조사에선 미국인의 77%가 히로히토를 엄벌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런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1945년 9월 미국 상하원 의원들은 "히로히토를 체포해 전범재판에 넘겨야 한다"는 합동결의안을 통과시켰다.(허버트 빅스, <히로히토 평전> 삼인 603쪽)

히로히토도 그런 험악한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독일의 빌헬름 2세 짝이 나지 않을까 걱정도 했을 듯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한 뒤 독일국왕 빌헬름2세는 1919년 베르사이유 강화조약 227조에 따라 전쟁범죄자로 재판에 넘겨질 뻔 했었다. 분위기를 미리 눈치 챈 빌헬름2세는 전쟁 끝 무렵인 1918년 11월 중립국인 네델란드로 망명길에 나섰고, 전승국 쪽의 신병 인도 요구를 거부한 네델란드 정부 덕에 위기를 넘겼었다.

그렇기에 히로히토는 자신의 운명이 어찌될지 몰라 긴장 속의 나날을 보냈다. 거칠게 말하자면, '바짝 쫄아 있었다'고 보는 것이 틀림없다. 일본과 전쟁을 했던 소련, 중국, 호주, 네델란드 등은 "히로히토를 전범재판에 세워야 한다"고 강력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점령자인 미국 지도부가 내린 결정은 '일본이 군국주의를 포기하고 그 대신에 히로히토는 상징적 존재(입헌군주제 국왕)로 남겨둔다'는 것이었다.

이런 결정이 내려진 데엔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도조 히데키에게 모든 전쟁 책임을 떠넘기고 히로히토를 살리려는 일본 '보수 본류'들의 단합, 피점령국 일본의 안정을 중시한 워싱턴의 정치기류와 친일 로비스트들의 입김 등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히로히토의 기소 뒤 일어날 혼란과 유혈사태를 우려한 더글러스 맥아더(연합국최고사령관, 원수)의 판단이 결정적이었다.

▲ 1945년 9월27일 도쿄 미 대사관에서 만난 맥아더와 히로히토. 뒷짐 진 맥아더 옆에 선 히로히토는 차렷 자세다. 이 사진이 보도된 뒤, 일본인들 사이에선 국왕이 곧 물러날 것이란 소문이 퍼졌다. ⒸGaetano Faillace

"담뱃불 붙여줄 때 히로히토의 손이 떨렸다"

맥아더가 히로히토 처리를 저울질하고 있을 즈음인 1945년 9월27일 히로히토가 미 대사관을 방문함으로써 두 사람의 비공식 회동이 이뤄졌다. 누가 봐도 히로히토가 점령국의 장군에게 머리를 굽히는 것으로 비쳐지는 만남이었다. 한 달 전인 8월30일 일본에 도착한 뒤, 맥아더는 히로히토 쪽으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받았지만 "적절하지 않다"고 뒤로 미뤘었다. 히로히토는 맥아더가 자신의 운명을 어떤 쪽으로 요리해나갈지 궁금했겠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맥아더의 나이는 65세(1880년생), 히로히토는 44세(1901년생)로 21살 많았다. 긴장과 초조함을 감추고 애써 위엄을 지키려는 40대의 패전국 군주를 60대의 점령군 사령관은 느긋하게 살펴보았을 것이다. 맥아더가 죽던 해인 1964년에 나온 그의 <회고록>(Reminiscences)에 따르면, "내가 미제 담배를 권하면서 불을 붙여줄 때 히로히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고 한다.

뒷짐 진 맥아더, 차렷자세의 히로히토

히로히토가 미 대사관에 도착했을 때 미국인 사진사가 촬영 준비를 끝내고 대기 중이었다. 점령자와 피점령자 사이의 관계는 당시 둘이 찍은 사진에서도 묻어난다. 모닝코트와 줄무늬 바지의 예복 차림으로 단정하게 넥타이를 맨 히로히토에 견주어, 맥아더는 격식에서 비껴난 편한 차림이었다. 예복은커녕 넥타이도 매지 않았고 군복 셔츠의 윗단추는 풀어 제쳤다. 히로히토는 두 손을 내린 차렷 자세였지만, 맥아더는 두 손을 엉덩이에 걸쳐 뒷짐을 졌다.

둘이 나란히 서있긴 했지만, 약자가 강자에게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으로 일본 국민들에게 비쳐질 것이 뻔했다. 당황한 일본 정부는 다음날 모든 신문에 그 사진을 싣지 못하도록 했다. 도쿄의 연합군사령부가 일본 외무성에 항의를 한 끝에야 게재 금지가 풀렸다. 이틀 뒤 사진을 본 많은 일본인들 사이에선 국왕이 곧 물러날 것이란 소문이 퍼졌다.

사진을 찍은 뒤 두 사람은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겨 40분가량 대화를 나누었다. 일본인 통역을 사이에 두고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보도되지 않았다(2002년 10월 일본 외무성과 궁내청이 처음으로 부분 공개). 히로히토는 면담 내내 맥아더가 자신을 부드럽게 대해 처음의 긴장된 마음을 풀었다고 알려진다. 맥아더가 직설적으로 "당신은 기소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하진 않았어도, 히로히토는 눈치로 자신이 불기소될 것이라 짐작했을 것이다.

맥아더, "천황 망가뜨리면 (미군) 100만 필요"

미 CIA 전신인 전략정보국에서 심리전 책임자였던 보너 펠러스 준장을 비롯, 맥아더의 핵심참모들은 전형적으로 보수 우익 성향이 강했다. 누구보다 맥아더 자신도 그랬다. 당시 일본의 좌파 세력들은 천황제 폐기와 히로히토의 전범 처단을 주장했지만, 우익은 우익대로 히로히토 없는 일본을 생각할 수 없었다. 안정적인 일본 통치를 바랬던 맥아더는 히로히토를 기소할 경우 좌우 대립의 혼란 속에 유혈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 무렵 맥아더가 미 육군 참모총장이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보낸 전보 내용을 보자.

천황을 (전범자로) 기소하면 틀림없이 일본인들 사이에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것이며, 그 영향은 아무리 크게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천황은 일본인 통합의 상징이다. 천황을 망가뜨리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미군병력) 1백만이 필요할 테고, 그 군대를 무기한 유지해야 할 것이다(빅스, 629쪽)

뒤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미국이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여러 안건들이 '과거사'라는 이름의 미결 상태로 남게 됐다. 과거사 청산을 둘러싸고 지난 80년 가까이 많은 갈등이 생겨났다. 최근 한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미쓰비시중공업을 비롯한 일본 기업들의 강제노동 배상문제도 그 가운데 하나다. 히로히토에 대한 면책은 배상 문제뿐 아니라 일본인들의 '과거사 불감증'을 도지게 만들었다.

일본 군국주의 향수를 지닌 자들이 주장하듯이 히로히토는 전쟁 책임이 없는가. 있다면 도대체 어떤 전쟁범죄를 저질렀는가. 우파들의 주장대로, 군 통수권자 히로히토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나. 그가 전범자로 기소되지 않고 도쿄 전범재판을 비껴간 것은 일본과 동아시아에 어떤 후유증을 남겼나. 다음 글에서 이런 물음들에 대한 나름의 답을 독자들과 함께 찾아보기로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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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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