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보도를 통해 우리는 실시간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보았다.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하는 일은 그 자체로 충격이다. 수많은 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사람들은 그들이 살 수 있기를 속으로 수십 번 수백 번 외쳤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며칠 동안 실시간으로 지켜봐야 했던 악몽 같았던 일들이 오버랩 되며 사람들은 더 큰 비통함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인 거리조차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실존적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건물이 무너진 것도, 폭탄이 떨어진 것도 아닌데 어떻게 거리에서 158명이 집단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죽음의 장면은 여러 질문을 던지게 한다. 미리 예방할 수 없었는가? 불가항력적인 상황이었는가? 당연히 막을 수 있었고 살릴 수 있는 목숨들이었다. 국가는 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태원 핼러윈 축제에 1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올 것을 예상했으면서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그리고 경찰은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경찰인력은 어디에 있었는가. 자원을 어디에 배치하느냐는 국가의 통치성을 보여준다. 윤석열 정부 하의 경찰은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는 데에 배치되지 않았다. 더구나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 4시간 전인 저녁 6시 34분부터 현장 상황을 알리는 신고가 빗발쳤음에도 정부는 이를 무시했다. 당연히 국가책임이다. 정부가 제대로 안전조치를 했다면, 모두가 살 수 있었다.
희생자에 대한 비난으로 가도록 방조한 정부의 대응
그럼에도 정부는 사과 한마디 없이 서둘러 "주최자가 없는 자발적 행사", '매뉴얼 부재'를 언급하며 정부책임론을 차단하고, 국가 애도 기간과 피해자 지원을 발표했다. 유족들과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장례비와 위로금 지급을 발표했다. 이러한 정부의 참사에 대한 대응 과정은 희생자․피해자* 에 대한 비난을 가능하게 했다. 정부 책임이 없다면서도 지원금 지급을 서둘러 발표함으로써 사람들의 시선을 '돈'에 쏠리게 만들었다. 정작 중요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과 재발 방지 대책은 관심 밖으로 밀렸다.
재난안전기본법과 경찰관직무집행법 등에 정부와 경찰의 책임이 분명하게 있으나 주최자가 없으니 안전조치 등의 예방을 할 수 없었다고 정부는 강변했다. "국가 책임을 따지기에 밝혀진 게 없다"는 식의 책임회피 어법과 대응은 개인책임론을 부각한다. 애초에 사람이 많은 축제현장에 간 것이 잘못됐다는 식의 비난의 화살이 SNS 에 돌았다. 놀러갔다 죽었다는 식의 개인과실론은 축제를 간 사람들과 가지 않은 사람들을 갈라 희생자들을 쉽게 타자화한다. 희생자들을 자신과 동등한 시민의 자격, 지위에 있는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혐오의 정동을 유발하기 쉽다.
이러한 것들이 얽혀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과 생존자들에 대한 국가 지원을 반대하는 국민동의입법청원에 많은 이들이 참여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위로까지는 좋습니다. 하지만 국가를 위해서 헌신하시거나 돌아가신 분이 아닌데 왜 무슨 이유로 특별재난지역 지정, 보조금 지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청원인의 발화에서 알 수 있듯이,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피해자의 자격은 '국가 헌신'으로 한정된다. 국가가 안전을 책임지지 않아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 전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의무는 사라지고 국가 헌신만이 피해자 지원의 핵심인양 떠돌아다니게 된 것이다.
애도를 가능하게 하는 것들
비난을 넘어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일은 희생자와 유족, 그를 사랑하는 이들과 남겨진 모든 이들에게 중요하다. 여당인 국민의힘 정진석 대표의 "지금은 추궁의 시간이 아니라 추모의 시간"이라는 말과 달리 애도와 책임의 규명은 단계적이거나 단일한 것이 아니다. 애도의 시간이 지나야만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필자가 만나는 산재 피해 가족들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없이 진정한 애도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 죽었는지,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자를 처벌하거나 사과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억울함과 상실감은 사라질 수 없다고 말한다. 국가는 애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만들어야 하지, 반대로 애도를 강요하거나 애도를 막아서는 안 된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충분한 애도 후에 진상규명을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럴 수도 있다. 사람마다 애도의 방식과 형태는 다양한 것이므로. 그런데 국가 애도 기간이 지난 후에 책임 규명을 하자는 말을 참사의 책임을 져야할 정부여당의 정치인이 해서는 안 된다. 다양한 방식의 다양한 애도를 차단하고 관제식 애도만을 유일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은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말일 뿐이다.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는 희생자와 유족뿐 아니라 참사를 목도한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다. 애도는 희생자들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일이자 남겨진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이다. 나아가 애도는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사회적 참사에서 사람들은 애도를 통해 떠나간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과정에서 희생자와 관계를 맺는다. 모르는 또는 아는 희생자들에게 말을 건네며 관계를 맺는 것이 애도다. 그 관계가 주는 책임의식으로 인해 참사를 만든 사회구조와 원인을 밝히고 재발방지를 위한 요구로 나아갈 수 있다. 사회적 참사에서 애도가 주는 관계 맺기와 책임의식은 연대의 감수성을 높인다. 416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해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 했던 행동들을 떠올려보라.
그럼에도 애도는 차별의 사회구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피해자의 자격을 묻는 가해자중심적인 사회, 순수한 피해자여야만 추모 받을 권리를 주어진다고 말하는 사회, 나이와 성별, 직업, 국적 등의 위계에 따른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희생자들에 대한 온전한 애도는 어렵다. 차별이 투영되어 나타나는 애도는 제대로 된 애도가 될 수 있을까. 차별이 투영된 애도로 인해 우리가 인간 존엄과 평등의 감각을 배우지 못하고 차별의 감각에 더 익숙해진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희생자들의 외모를 조롱하는 성차별의 사회, 청소년은 공부하는 주체로만 규정짓는 사회, 청년과 청소년을 동등한 동료 시민으로 바라보지 않는 나이 위계의 사회에서 우리는 제대로 희생자들을 애도하지 못했던 수많은 경험이 있다. 이태원 참사에서도 이는 반복됐다.
사망자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청년들을 여전히 "아이들"로 호명하는 이들을 보면서 과연 우리 사회가 희생자들의 삶과 죽음을 제대로 기억하고 소환하고 있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사망자 중 청년이 많다는 점이 피해자의 순수성으로 해석되는 현실도 여전하다. 피해자들은 아직도 '순수성의 심판대'를 통과해야만 애도 받을 자격이 주어지는 참담함을 어떻게 견뎌야 하나. "꽃다운 청년의 죽음"이라는 말이 전제하는 생명의 무게간의 차이와 차별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희생자들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과정은 낯선 희생자들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이어야 한다. 희생자 모두 자신의 삶을 살다 간 주체적 존재였음을 인정하는 태도로 애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어제 두 개의 언론사에서 피해자 유족의 동의 없이 희생자 명단을 공개한 것은 매우 우려스럽다. 동의 없는 명단공개는 2014년에 만들어진 재난참사보도준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애도를 왜곡한다. 명단공개는 굳이 유가족만이 할 수 있다는 정상가족주의의의 시선을 고수해서가 아니다. 희생자들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애도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삭제되고 본말이 전도된 채 명단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나 산재참사 등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 애도했던 이유는 희생자가 그저 숫자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일상을 누리고 희로애락을 겪었던 같은 인간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자는 뜻이다. 유가족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이유는 유가족이야말로 희생자를 가장 가까이서 보고 알고 기억할 사람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희생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의 삶과 꿈, 희망, 슬픔과 절망, 즉 개인의 서사를 우리에게 말해줄 때 희생자와 남겨진 자들과의 관계 맺기는 더욱 탄탄해지고 애도는 더 두터워진다. 이렇게 애도와 기억은 밀접하다. 구체적인 기억과 애도는 희생자의 부재를 구체화해 사회적 참사와 국가 책임의 크기를 실감하게 하고 남은 이들에게 '폭력의 구조'에 맞설 힘을 준다. 즉, 희생자를 호명한다는 것은 단지 이름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곁에 있던 사람들이 희생자의 삶과 죽음, 그리고 남겨진 자의 마음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다.
그런데 어제 공개된 명단에서 우리는 희생자들의 삶을 알 수 있는가.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라는 말이 있듯이, 그의 삶은 복합적임에도 이름만으로 환원하는 것은 오히려 깊은 애도를 방해할 뿐이다. 나아가 이름을 알아야만 애도할 수 있는가. 우리는 아직도 이름은 모르지만 신당역에서 근무하다 스토킹 살해당한 여성노동자를 애도한다. 그녀가 생전에 불법촬영과 스토킹 등 젠더폭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는지를 기억하고 애도한다. 더구나 여전히 피해자 비난이 있는 시기에 희생자의 명단 공개는 신중해야 한다. 누군가를 제대로 애도하려면 그가 죽어서도 존엄한 인간이었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에서부터 애도는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망각과 은폐로 애도를 가로막으려 것에 맞서는 행동이 명단 공개일 수는 없다. 동의 없는 명단 공개가 희생자와 유족을 대상화하는 태도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명단 공개가 아니라, 합동분향소 설치부터 현재까지 유족과 사전 협의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유족들이 모여서 논의하고 대책을 강구할 수 있는 지원조차 하지 않은 정부를 비판하는 한편, 희생자의 유족들이 모이고 시민사회의 도움을 받도록 하는 일이다. 그리고 제대로 애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애도할 것인가를 사유하며 행동해야 할 때이다.
*사망자와 부상자들을 포함한 개념으로서 피해자를 통상 사용하는데, 이번 참사에서는 정부가 분향소에서 희생자가 아니라 사망자를 일부러 사용했다. 희생자를 쓰면 국가책임이 연상될 수 있다고 우려해 책임회피를 위해 사망자로 명명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피해자로 명명하는 것이 희생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점, 그러나 여전히 피해생존자가 고통 받고 있는 현실에서 그들을 삭제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 때문에 희생자/피해자를 동시에 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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