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는 곧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에서 한 걸음 더 나가야…"

[기후위기, 백낙청을 다시 읽다] ③ 기후위기의 시대, 개벽세상으로의 체제 전환은 누가 이룰 것인가

백낙청의 국가 우선주의

백낙청의 일관된 눈높이는 국가에 맞춰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민의 삶을 말할 때조차 백낙청의 눈은 국가를 우선해서 먼저 보고 있다. 물론 그가 우선해서 보고 있는 국가는 국가주의자들의 그것과는 완전히 질을 달리한다는 점 또한 명백하다.

"촛불 이후의 새로운 세상은 남한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수호하고 삶의 질을 높여가기 위해서도 남북의 느슨한 결합이나마 우선 도모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세계사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범한반도적 공동체를 건설하는 변혁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먼저 대한민국에 실력을 갖춘 민주정권을 수립해야 하고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을 통해 한국경제의 활로를 찾는 동시에 동아시아, 나아가 유라시아의 지역협력에서 한반도가 걸림돌이 되어온 현실을 혁파해야 한다."

-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제3부 10장 '촛불'의 새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 278~279쪽

백낙청은 국가를 언급할 때 '우선'이나 '먼저'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백낙청이 무의식 속에서도 인민의 삶을 늘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백낙청은 '우선 먼저' 국가 차원의 전략을 말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민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시각과 전략이라기보다 엘리트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시각과 전략이다. 1966년 <창작과 비평> 창간 논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백낙청은 문학인과 지식인을 '엘리트'로 지목하고 엘리트의 결집을 우선해서 추구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방안으로서 엘리트 또는 먼저 세상의 실상을 깨닫고자 하는 인민을 변화시키는 전략은 매우 중요하고도 유의미한 전략이다. 나는 엘리트주의와는 다른 백낙청의 엘리트 '우선 먼저' 입장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다. 지식인 사회의 여론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엘리트가 대부분 인민 위에 군림하는 기득권이 되거나 대의정의 권력 엘리트로 전락한다는 점이다.

붓다는 깨달음 직후 자신의 깨달음을 전할 대상으로 함께 고행하던 다섯 명의 수행자를 찾아 걸어서 거의 300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진 미가다야(鹿野園)로 갔다. 그들이 우선 먼저 자신의 깨달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붓다는 가는 도중에 우빠까라는 아지봐까(ajivaka, 邪命外道)를 만나 자신의 깨달음을 설명했지만 우빠까는 코웃음을 치며 붓다를 비웃고는 가버렸다.

백낙청이 1960년대부터 엘리트를 강조한 것은 먼저 각성한 지식인과 문인들이 인민들을 각성하도록 이끌어주는 촉진자, 도우미, 좋은 이웃(善友) 역할을 해야 한다는 당위를 설파한 것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백낙청 이름짓기의 최대 걸림돌은 엘리트 우선 중심의 사고가 국가 우선 중심의 사고로 직행하는 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민의 삶이라는 시각에 서면 단순해질 수 있는 문제도 백낙청에게 오면 다소 복잡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본주의? 천황제를 정당화시키는 용어!

민주주의와 생태주의에 대한 백낙청의 지식은, 특히 서구의 이론에 대한 지식과 섭렵은 아마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해박할 것이다. 특별 대담 '다시 동학을 찾아 오늘의 길을 묻다'를 보면 이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be 동사가 갖는 그 특이성을 존재자나 실체가 아니고 그렇다고 니체가 말하는 것처럼 공허한 개념도 아닌 '스스로 그러함'과 같은 뜻으로 해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략) be라는 술부의 실제 의미가 역사적으로 달라진다고 하는 것이 원불교나 수운 선생이 말하는 시운時運에 대한 인식하고 통하는 면인 것 같습니다."

- 특별좌담 '다시 동학을 찾아 오늘의 길을 묻다', <창작과 비평> 2021년 가을호, 107쪽

불가 용어로 한 소식 한 사람의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김용옥은 "새로운 생각을 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게 훨씬 유리"하다고 정확한 지적을 한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말을 모국어가 아니라 '플레타르키아(pletharchia)'라고 아무도 잘 모르는 생소한 그리스어를 끌어다 만들었다. 김용옥의 이러한 새로운 개념 만들기는 사실 그가 내세우는 '우리다운 기준'과도 배치되고 서구 근대를 폭파시켜버려야 한다는 그의 과감한 주장과도 정면에서 어긋나는 이름짓기일 수 있다. 자신의 새로운 말을 받아들일 사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의 인민들을 설정하고 있지 않는 듯한 현학 취미는 동학과 후천개벽의 사상과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백낙청은 김용옥이 인민이 주체가 되어 다스린다는 건 역사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발언을 할 때 이에 동의한다. 그리고 뒤이어 "민본사상이 평등사상과 결합하는 전환점이 너무 중요"하고 "요즘에는 수평주의 자체가 새로운 신이 되어버린 면이 없지 않지만 동학은 그와는 다른 도력의 상하를 존중하는 수평적 민주주의"라고 덧붙인다. 그러나 민주주의 대신 김용옥이 언급한 민본주의란 이름짓기 자체는 일본 지식인들이 천황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새로 만든 조어였다.(배병삼의 <우리에게 유교란 무엇인가>) 민본주의란 천황제나 왕정, 엘리트 우선의 귀족정, 대의정으로 곧바로 이어진다.

민본주의가 나쁜 개념만은 아닐 것이다. 민본주의나 위민(爲民) 정신은 사대부 양반들의 기득권에 맞서 투쟁하는 왕권의 존립 기반이기도 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세종과 정조의 개혁정책도 인민의 삶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동학과 원불교의 깨달음이 구현되는 현실 정치체제를 민본주의라고 이름짓는 것은 국가 우선의 시각에서 나온 해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인식하는 서구 근대의 민주주의, 즉 민주정이란 정확히 말하면 대의정이다. 19세기 말 한·중·일의 지식인들은 하나의 정치체제인 데모크라티아(democratia)를 번역하면서 이데올로기 수준으로까지 격상시켜 민주주의라고 번역했다. 그만큼 왕정을 폐기하고 인민이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서 제자리를 찾고자 하는 당시 인민들의 강력한 염원을 반영한 것이었다. 전 세계에서 민주정을 민주주의라고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는 곳은 한국, 북한, 중국, 대만, 일본 등 동아시아 한자문화권밖에 없다. 백낙청이 이를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용옥의 주장에 동조하는 듯한 발언을 하면서 촛불을 '수평적 플레타르키아'라고 부른 것은 뜻밖이었다.

민주주의는 소인들의 정치다

민주주의는 대의정과는 완전히 다른 정치체제다. 대의 민주주의, 선거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알콜제로 소주나 녹색성장처럼 말이 안 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논의할 때는 먼저 이 점부터 전제하고 시작해야 하고 꼭 직접 민주주의라고 별도의 이름으로 불러 분별하기도 한다.

민주주의는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동일한 독특한 이중 정체성의 정치체제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핵심은 통치자가 피통치자가 되고 피통치자가 통치자가 되는 교체에 있다. 동시에 주권자가 공동체와 국가의 주요정치를 결정하는 주권자 발의제와 소환제, 국민투표 제도가 핵심이다. 선거나 삼권분립 등은 민주주의의 핵심이 결코 아니다.

민주주의는 소인들의 정치다.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정치다. 플라톤 등이 주장하는 철학자 독재정치, 공자가 말한 군자의 정치와는 전혀 다른 정치체제다. 물론 민주주의나 철인정치나 각기 모두 장단점이 있다. 그러나 인민이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인간다운 세상을 살 수 있는 최선의 정치체제는 그나마 민주주의다. 현자나 철학자로 추앙받던 지도자가 하루아침에 최악의 독재자로 변신하는 경우는 역사를 통해 수도 없이 경험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국가 이전의 공동체 정치체제는 거의 대부분 민주주의였다.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면 대체로 연방제 민주주의를 시행했다. 말하자면 민주주의와 연방제는 한 묶음이었다. 아메리카 이로쿼이족(Iroquois) 연합, 호데노소니(Haudenosaunee) 연방 등의 민주주의는 토마스 모어, 몽테뉴, 로크, 루소 등 서구 근대 정치사상가들에게 강한 인상과 충격을 주었다. 서구의 자연법 사상은 사실 인디언 사회가 서구에 준 일종의 선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로쿼이 연합의 민주주의와 연방주의 제도는 미국 헌법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1987년 미국 연방의회 상원은 이로쿼이 연합이 미국 헌법 제정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결의문을 채택한 바도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로쿼이 연합을 미국 건국의 '잊혀진 아버지(Forgotten Fathers)'라고 부르기도 한다.(여치헌의 <인디언 마을 공화국>)

민주주의는 김용옥과 백낙청이 말하듯 현실에서는 거의 없는 정치체제가 결코 아니다. 아테나이의 민주주의가 여성과 노예를 배제한 시민들만의 민주주의라는 비판은 맞다. 그것은 그 시대의 한계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나이의 민주주의는 아테나이를 강한 국가로 만들었고 다른 도시국가들 사이에서 우월한 정치체제로 받아들여졌다. 국가로 나아가지 않고 있던 비서구 사회에서도 수많은 연방제 공동체들이 있어 왔다. 오늘날에도 민주주의는 스위스에만 한정된 정치제제가 결코 아니다. 하나의 국가였던 미국의 주(state) 차원에서도 직접 민주주의는 주요한 정치체제다.

국가는 망해도 인민은 망하지 않는다

국가에 초점을 맞춘 백낙청의 한반도 나라만들기 이론에는 당연히 인민들의 공동체와 다양한 사회가 시야에 그렇게 중요하게 들어오지 않는다. 민주주의에 대한 시각 또한 국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공동체 민주주의나 다양한 지역자치의 민주주의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인민들의 세계관을 바꾸고 개벽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이름짓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와 국가에 대한 근본의 시각 전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구소련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국가는 망해도 인민은 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가 망하면 인민들은 물질생활의 결핍을 이웃과 공동체 사회의 힘으로 해결하는 사회성 동물의 본성을 금방 발휘해 나가기 시작한다. 공동체를 만들고 자유인으로서의 삶의 지혜를 곧바로 회복하면서 금방 생존의 활로를 모색해나간다. 재난공동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상호부조의 공동체야말로 인민들에게는 가장 강력한 사회안전망이다.

'던바의 수(Dunbar’s number)는 사회성 동물인 호모사피엔스의 생존 조건으로서 그 '사회'의 기준을 제시해준다. 한 사람이 터놓고 신뢰하는 사람의 숫자는 150명 안팎이다. 진화인류학자 로빈 던바(Robin Dunbar)는 무수한 역사 사실과 국가, 그리고 최근의 트위터 등 SNS까지 조사 연구한 뒤 인류가 출현한 이래 이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인간의 뇌가 그 이상은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로빈 던바의 <던바의 수>)

실제로 아마존 원시 부족 공동체의 평균 구성원도 약 150여 명이다. 구성원 수가 200명을 넘어서면 공동체의 일부가 따로 다른 지역으로 떨어져 나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다. 인류의 전쟁사를 살펴보아도 전우애로 똘똘 뭉친 전투 핵심부대는 150명 안팎의 중대 단위다. 인민이 서로 주체로서 신뢰할 수 있는 지역공동체와 그 지역공동체의 연대와 연합이야말로 국가 이전에 인민 삶의 근거지로서 아주 '오래된 미래'라고 말할 수 있다.

"개인이건 국가건 자본주의의 무한축적 원리에 충실하여 최대한의 돈벌이에 목을 매고 사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적어도 개인이나 한정된 집단 차원에서는 그런 세태에 맞서 자신을 지켜내고 나아가 이런 기막힌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돈벌이를 하고 경제에서 탈락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당장에 나 자신과 김종철을 이런 개인들 틈에 포함시켜도 되지 않을까.)"

-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제2부 4장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와 녹색담론: '이중과제론'에 대한 김종철씨의 비판을 읽고, 115쪽

백낙청의 이런 지적은 일견 맞는 말인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삶의 자존감을 지켜내면서 지금과 같은 기막힌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세계관대로 다른 대안을 실천하는 삶을 꼭 지금의 체제에 순응한 돈벌이로 비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소태산 박중빈(원불교 창시자)이 협동조합을 조직하고 간척사업을 벌인 것은 개벽세상을 준비하는 새로운 삶이었지 비굴하게 체제에 순응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백낙청 지음, 창비 펴냄) ⓒ창비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인민의 마음이 먼저 바뀌어야

'촛불혁명과 개벽세상의 주인노릇을 위해'. 백낙청 책의 서문 제목이다.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서문의 내용은 그가 지금까지 논의해온 거의 모든 현실의 과제를 다 망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66년 일찍이 "동양 역사의 효과적 갱생을 준비하는 작업"까지를 염두에 둔 '창작과 비평'이라는 잡지 제목의 이름짓기부터 시작해서 시민문학론, 민족문학론, 분단체제론, 근대의 이중과제론, 적당한 성장론 등 백낙청 이름짓기의 집대성은 아마도 '개벽세상의 주인'으로서 이름짓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주인노릇이란 촛불 주권자들의 인식 전환을 전제로 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행동이 없는 지식이나 깨달음은 그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함행동이 있어야 앎인식이 생긴다. 촛불 이후 주권자로서의 행동이 없으면 주권자로서의 정체성과 인식은 지속불가능하다. '빼앗긴 주권'을 탈환하지 못하면 주권자는 다시 노예의 상태로 전락한다.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민주공화국의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민주주의를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40조 이하부터는 차례로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이 국회와 정부, 법원에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른바 위임 민주주의, 대의정 체제다.

대한민국 헌법은 태어날 때부터 민주주의와 대의정이라는 한 회사 두 사업부 체제의 이중구조였다. 작전권이 없는 군대가 시체 군대이듯 입법-행정-사법권을 엘리트 대리인에게 빼앗긴 인민은 정치 주권자로서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다. 그나마 선거권 하나만 달랑 있어 간신히 숨만 쉬면서 연명하는 것이 현재 한국 주권자의 정치 현실이다.

촛불시민이 주인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런 헌법 체제의 변혁, 새로운 민주공화국 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현실, 국가체제 자체에 대한 인민들의 인식 대전환이 필요하다. 백낙청이 강조하듯이 '공부와 연마'가 필요하다.

백낙청과 김용옥, 박맹수가 이구동성으로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는 서구 근대의 시각으로 보아 왔던 세상을 이제는 다시 우리의 눈으로 완전히 다른 곳에 서서 근본에서부터 재검토하고 세상을 다시 낯설게 볼 필요가 있다.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은 유럽인들이 저지른 불의의 전쟁이었다. 아랍인뿐만 아니라 유태인도 닥치는 대로 학살한 대량 학살과 약탈의 전쟁이었다. 실제로 십자군 전쟁은 성지회복을 명분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동시에 동서 교회의 사실상의 1인 수장이 되고자 한 교황의 야욕, 상권을 확대하고자 한 베네티아 상인들의 농간, 물자 약탈과 일확천금을 노린 농민들과 불량배들의 합작품이었다. 교황은 십자군 병사들에게 미리 죄를 사해주었고 상당한 전리품을 약속했다. 당연히 십자군이 지나가는 원정로에 있었던 그리스도교 마을들은 약탈과 방화의 표적이 되었다.(아인 말루프의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이와는 백팔십도 달랐다. 동학농민군은 비폭력 평화 혁명을 천명했고 이를 실천했다. 동학농민군은 권력과 영토 확장, 학살과 약탈과 점령을 목적으로 일어선 것이 아니었다. 동학농민들은 탐관오리들을 내쫓아 나라를 바로 세우고보국(輔國), 도탄에 빠진 인민들의 삶을 구제함으로써 세상을 구하려고 구세제민(救世濟民)했다.

우리 동학군은 칼에 피 묻히지 않고 이긴 것을 으뜸으로 삼는다. 어쩔 수 없이 싸우더라도 사람 목숨은 해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행진하면서 지나갈 때는 민폐를 절대 끼치지 않는다. 효자-충신-열녀-존경하는 학자가 사는 동네의 십리 이내에는 주둔하지 않는다.('대적시 약속 4항') 그리고 병든 자는 치료해주고 항복한 자는 받아들이고 굶주린 자는 먹여주고 도망간 자는 쫓지 않는다.('12조 계군호령') 그 당시 특파원들도 이런 농민군의 규율을 칭찬해요. (중략) 동학의 비폭력이 3.1운동, 그리고 2002년 효순이 미선이 미군 장갑차 사건 촛불집회, 2016년 촛불집회로 이어집니다.

- 특별좌담 '다시 동학을 찾아 오늘의 길을 묻다', <창작과 비평> 2021년 가을호, 128쪽

동학농민군은 실제로 12개 군호軍號가 적힌 군기를 들고 행진했다. 조경달은 이런 농민군의 비폭력 평화 기조를 향촌의 공동체 질서를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자신들의 정의로움으로 확신하면서 그 도덕성과 규율성을 내외에 과시한 것으로 해석한다.(조경달의 <이단의 민중반란>, 178쪽) 전주화약 이후 동학농민군이 펼친 '집강소 민주주의'는 인민의 자치와 마을공동체 민주주의의 극명한 사례이기도 하다.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결전이었던 공주대회전(大會戰)과 우금티전투에 대해서 죽창을 들고 '가자 한양으로' 식의 서사극이 많이 유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가장 왜곡된 오독이다. 동학농민군은 그렇게 죽창으로 기관총을 상대할 만큼 어리석은 대오가 결코 아니었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냉정하게 정세를 파악한 상태에서 월가 점령 시위처럼 서울 이남의 요충지인 공주를 점거농성하여 유생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하려고 했었다. "요컨대, 충군애국지심을 가진 전국의 사민(士民)들과 함께 항일 의려를 형성한 뒤 공주를 확거·고수(確據·固守)하면서 호서도회를 개최하여 '전주화약' 때처럼 평화적인 '정치협상'을 시도한다는 전술"이었다.(지수걸의 '1894년 '공주 대회전'의 성격과 의미') 그러나 이 전술은 동학군 내부의 배신과 이탈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듯이 30만 명 이상의 동학농민군과 조선 인민들이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당시 조선의 인민은 약 1800만 명 정도였다.

'홀로'의 감옥에서 탈출해야 '더불어'의 개벽 세상이 온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모두 저마다 자신이 만든 세상을 살면서 동시에 언어라는 소통체계를 통해 마을공동체와 국가를 만들어 공존의 세상을 살아간다. 그런데 근대 자본주의는 가족공동체까지 해체시키면서 79억 개 이상의 세상을 제각각 칸막이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우리는 이 감옥을 깨고 다시 79억 개 이상의 세상을 공존과 공유의 세상으로 바꿔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기후위기에 적응하고 극복하는 생존의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개목걸이처럼 우리 목에 채워진 서구 근대의 이원론과 극단의 개인중심주의 세계관을 과감하게 우물에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근대의 우물에서 뛰쳐나와야 한다. 성찰과 반성을 통해 자신의 우물 안 세계관을 뿌리부터 뽑아내는 대전환의 도약을 감행해야 한다. 검색에서 사색으로, '홀로'에서 '더불어'로 공동체를 재생시켜야 한다.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지 않으면 개인도 해방될 수 없고 사회와 국가 체제의 전환도 불가능하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기원전 9세기에서 2세기까지를 '축의 시대'라고 이름지었다. 이 시기에 계속된 전쟁과 폭력으로 인민들의 삶은 불안정하고 불안했다. 대량 살육과 살인은 일상이었고 불평등은 극에 달했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삶을 스스로 실천하고 모범을 보이는 현자와 예언자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인간 내면의 깊숙한 끝까지 들어가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고 명상과 초월의 체험을 통해 인간성의 원리와 세상의 진리를 깨달았다. 이들은 인민들에게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다른 삶을 창조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나아가 기존의 지배 체제를 허물고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설파했다. 인도에서는 붓다와 우파니샤드 명상가들이, 중국에서는 공자와 맹자, 노자, 묵자 등의 사상가들이,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예레미아, 이사야 등의 선지자들이, 그리스에서는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자들이 그들이었다.(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 울리히 두크로 외의 <탐욕이냐 상생이냐>)

이들이 공히 인민들에게 깨우친 지혜는 자기중심주의를 버리라는 상호주의의 도덕이었다. 이들은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당연한 상식에서 출발했다. 타인, 나아가 타민족에 대한 공감과 자비행의 실천이야말로 나의 삶을 고양시키고 전쟁과 폭력을 근절하는 지름길이었다. 나는 곧 너이고 우리이며,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돼 있는 '서로 주체'의 이웃이었다. 틱낫한 스님은 이를 상호존재(inter-being)라고 이름짓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느냐였다. 훈련을 받아 습관이 된 자비심의 실행이었다. 윤리와 도덕을 실천하는 삶이었다.

축의 시대 선각자들은 자신의 가르침에 따라 정신의 고양을 잠깐 체험했다가 다시 자기중심의 삶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늘 자비의 삶을 다시 환기시켰다. 이들은 정치를 외면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가장 철저하게 정치의 근본 지점으로 들어가 국가 폭력과 국가 간 전쟁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민 개개인들이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었다.

붓다는 자아란 우리의 감각기관과 신경계가 만들어낸 개념일 뿐이라고 설파했다. 작자(作者)는 없고 오직 행위만이 있을 뿐이라는 깨달음이었다. 나를 버릴 때 비로소 죽음의 공포와 온갖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붓다는 꼬쌀라국의 위두다하 왕이 자신의 종족인 샤까족을 멸망시키기 위해 군대를 몰고 쳐들어갈 때 세 번씩이나 침략을 저지하기도 했다. 붓다의 고향이기도 한 샤까족의 수도 까삘라왓투로 가는 길 중간의 죽은 고목 아래 뙤약볕 속에서 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꼬쌀라국의 대군을 가로막은 것이다. 당시 붓다는 모든 나라에서 존경받는 수행자이자 스승이었고 위두다하도 재가신자였다. 위두다하는 군대를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마가다국의 아자따쌋투 왕이 왓지족을 공격하려고 할 때도 붓다는 이를 저지했다.

경전이 전하고 있는 붓다의 모습에서 나는 천안문 사태 당시 윗통을 벗은 채 맨몸으로 홀로 탱크 부대 앞에 선 중국의 어떤 청년을 떠올린다.

촛불 주권자들을 주목하고 동학과 원불교의 후천개벽 세상을 주목하는 백낙청은 여전히 먼저 깨닫는 선각자 지식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오늘날에는 기후위기가 곧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라는 점이 어느 정도 상식이 되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도 상식을 넘어 한 걸음 더 나갈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가?"

-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제3부 13장 기후위기와 근대의 이중과제 대화 '기후위기와 체제전환'을 읽고, 360쪽

이 지점에서 나는 백낙청의 '변혁적 중도주의'가 개벽세상의 실천에서 어떤 행동으로 구체화될지 자못 기대가 된다.

붓다는 깨달음으로 가는 여덟 가지 올바른 길(八正道)을 설파하면서 바른 견해, 바른 생각과 함께 바른 언어를 제시한다. 백낙청이 강조하는바 변혁적 중도주의의 그 중도는 개벽세상을 여는 행동의 이름짓기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나는 이해한다.

백낙청은 인민의 삶을 해방시키기 위한 선각자이자 지식인으로서 서원(誓願, panidhi)의 삶을 살아왔다. 기후위기 시대 그가 새로운 개벽사상으로 가는 길을 위해 지을 '앎과 함'의 새로운 서원과 이름짓기는 과연 무엇일까. 

* 위 글은 웹진 <나비>에도 실렸습니다.(☞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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