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폐지 후 책임을 다하지 않는 권력자에게 묻는다"

[시민건강논평] 임신중지, 그 삶의 지평을 넓히는 책무에 대하여…

지난 6월 24일 트럼프 행정부에서 임명한 보수 대법관들이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헌법상 권리로 보장했던 1973년의 역사적 판결을 뒤집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덕분에 2019년 4월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대체 입법도, 후속 보완조치도 없이 '무정부' 상태인 한국 상황을 환기시키는 후속보도들이 이어졌다.

2019년 헌재의 판결은 지금까지 낙태죄가 태아 생명권에 대한 국가의 이중적 태도를 은폐하고, 여성의 몸을 국가인구정책의 도구로 이용하거나 자기 몸에 대한 통제를 원하는 여성들을 억압하는 기만적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결과였다.

당연히 후속대책은 그토록 많은 여성들이 생애과정에서 겪게 되는 임신중지 요구에 대하여 사회적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정상화하는 것이어야 했다. 낙태죄 폐지를 이끌었던 시민들은 피임이나 임신중지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성·재생산건강 및 권리 보호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법제도와 의료체계를 갖출 것을 요구했다. 특히 임신중지는 필수의료서비스로서 유산유도제 도입과 건강보험 급여화, 의료서비스의 접근성 확대를 통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요구들이 현재 한국의 보건의료체계와 결합(?)하는 것은 전혀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이미 25년 이상 국제적으로 효과성과 안전성이 입증되어 널리 사용되고 있는 유산유도약물을 허가·도입하고, 이 약품을 포함해 수술적 임신중지 서비스 등을 급여화하여 의료제공체계에 포함하면 될 것이었다. 그렇지만 2022년 7월 지금까지 그 당연히 기대된 책무를 실현하려는 정부도, 국회도, 의료 전문가들도 잘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2019년의 낙태죄 폐지는 성·재생산건강과 여성인권 확대라는 국제적인 규범과 국내 여성운동의 결집된 정치적 압력이 이끌어낸 시대정신의 선언이었다. 그러나 그 선언을 구체화하는 정책적 움직임으로 이어지지 않고 딱 거기에서 멈췄다. 우리는 그 이유가 여성의 정치경제적 권리를 확장하려는 젠더 규범과 질서의 재구축을 억제하는 강고한 젠더 불평등에 기반한 사회적 백래쉬가 작동하기 때문이라 본다.

그 결과는 어떤가? 국회는 개정 법안들을 통과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다른 동료의원들을 설득하지도 않고, 복지부는 그런 입법부재 상태 때문에 보험급여나 서비스 제공, 유산유도제 도입을 할 수 없다고 책임을 미루고, 식약처는 약품 도입에 대한 이해당사자 집단의 이견을 방치하고 있다. 임신중지가 ‘두 명의 생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의료행위라고 말하는 의료계가 유산유도제에 대하여 가교임상을 요구하거나 산부인과 전문의로 처방을 제한할 것을 요구하며 입법화를 지체시키는 것도 문제이다. 게다가 필수의료인 임신중지서비스가 가격과 품질 측면에서도 불투명하고 위험한 음성적 거래를 통해 개인들이 해결하는 문제로 계속 방치된다는 것은 단순한 경제 논리와도, 시민들의 기본적 사회권을 탈상품화하려는 복지국가 지향과도 전면 배치되는 일이다.

여성의 출산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여성 개인과 개별 국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밝히는 많은 학술적 연구의 결과는 명확하다.

임신중지를 할 수 있었던 여성들이 그렇지 못했던 여성들에 비하여 더 많은 교육을 받고, 더 나은 노동지위에서 더 많은 소득을 얻었으며, 평등한 사회참여와 건강한 삶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임신중지 거부의 경제적 결과 보고서, 턴어웨이 연구). 반면 적절한 시기에 임신중지를 하지 못하거나 출산을 해야만 했던 여성들은 사회경제적으로 이미 소외된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삶은 경제적으로나 건강상 더욱 위태로워졌다는 사실이다.

왜곡된 사회보장체계가 힘없는 여성들에게 불평등을 강요하면서 되돌릴 수 없는 비용을 부담시킨 셈이다. 그래서 최근 미국의 임신중지권 지지자들은 임신중지권리를 무엇보다 경제적 권리(abortion rights are economic rights)라고 주장한다.

한국에서도 임신중지와 관련해서 여성들이 직면하는 현실과 고통을 드러내는 자료와 연구가 적지 않지만 정부도, 국회도, 많은 보건의료전문가들도 책임 있는 정책결정과 후속 대책을 외면하거나 방관하고 있다. 이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탄압이며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권리에 대한 부정이며 동시에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정치의 구현이다.

다시 낙태죄 폐지 이후에도 책임을 다하지 않는 권력자들에게 묻는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대표성을 갖는다는 것은 경쟁 선거를 통한 선출이라는 민주주의 최소 정의 요건뿐만 아니라, 실제로 유권자들이 가지는 계급, 젠더, 민족 같은 사회적 속성을 반영하고 유권자들의 의견 전체를 실질적으로 대표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그런데 왜 임신중지는 여성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자기결정의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대표되지 않고 방치되고 억압되어야 하는가. 이 같은 결손의 정치를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가.

누구나 임신중지를 포함하여 피임, 임신, 출산, 가족구성, 섹슈얼리티에 대하여 억압이나 차별 없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성·재생산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정치적 정의, 경제적 정의, 문화적 정의를 달성하는 길이기도 하다.

책임을 회피하고 은폐하는 자들에게 계속해서 책임을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낙태죄 폐지를 외쳤던 시민과 단체들은 다시 여성들의 자기결정권을 강화하고 임신중지 서비스 접근성을 확대함으로써 민주주의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새로운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 이 운동은 의사결정자들의 방관과 무책임을 질타하고, 젠더불평등한 권력관계가 더 이상 용인되지 않도록 더 새롭고 강한 힘을 모으는 과정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우리 삶의 지평을 확장하고 변화시키는 일을 시민사회 구성원들의 참여와 연대로 만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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