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나라를 팔아먹어도 ○○당이야"…'정당 양극화'에 빠진 미국, 그리고 한국

[프레시안 books]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

미국 정치를 다룬 책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의 원제는 "왜 우리는 양극화됐나(Why we're polarized)"다. 대안언론 <VOX>의 창립자이자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에즈라 클라인은 이 책에서 미국 정치에서 '정당 양극화'가 심화된 과정을 추적한다.

책은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 승리에 대한 질문과 함께 시작한다. '트럼프라는 "기이한 인물"이 대선후보였음에도 왜 공화당은 30% 차이 패배나 20% 차이 승리를 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표차로만 보면 "2016년 대선은 공화당과 민주당 사이의 전형적인 경쟁"이었다.

저자는 "유권자들이 트럼프를 다른 공화당 후보처럼 대했다는 사실"을 미국에서 일어난 '정당 양극화'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으로 제시한다. 이때 '정당 양극화'는 양당의 이념적 거리가 멀어지고 지지자들의 정당 정체성이 너무 강해져 어떤 경우에도 지지 정당을 바꾸지 않는 것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이후 미국인들의 정치적 정체성이 어느 정도로 강해졌는지와 왜 이토록 강해졌는지에 대해 본격적인 추적이 시작된다.

▲ 노스캐롤라이나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기조 연설을 하고 있는 트럼프 전 대통령. ⓒAP=연합뉴스

'부정적 당파성'에 기초해 양극화된 미국 정치

저자는 먼저 선거에 대한 양적 연구로 미국사회에서 정당 양극화가 심화됐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어브래머 위츠와 웹스터의 연구에 따르면, 1972~80년 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가진 몫과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이 가진 몫 사이의 상관관계는 0.54였다. 2018년경 이 수치는 0.97까지 올랐다. 유권자들이 대선과 하원의원 선거에서 양당에 표를 나눠주는 일이 줄었고 한 당에 표를 몰아주는 일이 줄었다는 뜻이다. 각 정당 역시 이전에 비해 동일한 이념을 가진 정치인들이 모인 집단으로 변모했다.

변화의 근원에는 '부정적 당파성'의 강화가 있다. 자기 당이 좋기보다는 상대 당이 싫어서 자기 당을 찍는다는 것이다. 근거는 미 여론조사 기관이 흔히 쓰는 '느낌 온도(상대방에게 느끼는 감정을 1~100도 사이로 나타낸 것. 높을수록 긍정적)'다. 1980년 유권자들은 자신이 속한 당에 72도, 상대 당에 45도의 느낌 온도를 매겼다. 2016년 유권자들은 자신의 당에 65도, 상대 당에 29도를 매겼다. 자신의 당에 대한 온도가 7도 떨어지는 동안 상대 당에 대한 온도는 16도 떨어진 셈이다.

이러한 연구에 기초해 저자는 지난 50년 미국 정치에서 일어난 양극화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는 투표에서 특정 정당을 더욱 일관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투표하는 정당을 더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편 정당을 더 싫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양극화된 정치적 정체성은 얼마나 강력할까.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보통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합의나 규칙을 무시하게 할 정도로 강력하고, 오랜 시간 미국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해온 인종 정체성보다도 강력하다.

이력서에 정치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단서가 포함되자 민주당원들과 공화당원들의 약 80%가 자신이 소속된 당의 당원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 학점은 상관이 없었다. 공화당원 학생이 더 자격을 갖췄을 대, 민주당원들의 30%만이 그를 선택했고, 민주당원 학생이 더 자격이 있을 대, 공화당원들의 15%만이 그를 선택했다.

... 놀랍게도 이 연구에서는 당파성이 인종도 이겼다. 후보자들이 동등한 자격을 갖췄을 때, 흑인의 78%가 같은 인종의 후보를 선택했고, 백인의 42%가 그렇게 했다. 다른 인종 후보자가 더 놓은 학점을 받은 경우, 흑인의 45%와 백인의 71%가 타 인종 학생을 선택했다.

연구에서 제시한 학점의 자리에 정치인이나 그의 발언 혹은 행태, 정당이 제시하는 정책을 넣어본다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더 많이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연구자의 말을 빌려 이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함의를 짚어낸다.

아이엔가가 세운 가설에 따르면, 당파적 적대감은 현대 미국 사회가 허용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몇 안 되는 차별 중 하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정치적 정체성은 증오를 위한 만만한 구실입니다. 인종 정체성이나 젠더 정체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회 집단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정체성은 예외입니다. 공화당원은 공화당원이 되기로 선택한 사람이므로, 그들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식입니다."

정당 양극화의 구조적 요인, 인구·미디어의 변화와 인터넷의 발달

책의 중반부에는 미국에서 정당 양극화를 심화시킨 구조적 요인에 대한 저자의 주장이 담겨있다.

먼저 인구학적 변화다. 미국 사회는 점점 다인종사회가 돼왔다. 이에 따라 백인들이 쥐고 있던 기득권의 크기도 더디게나마 줄어왔다. 저자는 이 같은 변화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갖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백인-공화당과 비백인-민주당 식의 '정당 양극화'를 강화하는 좋은 토대를 제공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권력이 곧 없어질 수도 있고, 오랫동안 우리가 느꼈던 부당함이 곧 바로잡힐 수도 잇다는 느낌만큼 강하게 집단과의 동질감을 찾게 하는 것은 없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도 빼놓을 수 없다. "1995년의 열렬한 정치광이 듣거나 볼 수 있는 매체"는 "지역신문 한두 개, 라디오 방송 몇 개, TV 뉴스 세 개" 정도였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방송사들은 뉴스와 연애 프로그램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도록 편성표를 짜왔다." 사람들이 공통적인 정보원을 통해 정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오늘날은 다르다. 셀 수도 없는 매체와 개인이 경쟁하는 인터넷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그것도 목소리가 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전파한다. 

그렇다면,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접하면 양극화된 정치적 정체성은 약화될까. 미국의 정치학자와 사회학자들이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해당 연구에서 연구원들은 공화당원에게 진보적인 트위터봇을, 민주당원들에게 보수적인 트위터봇을 팔로우하게 했다. 두 집단 모두 반대 의견을 들은 후 "양극화한 정책적 입장이 강화"됐다. '부정적 당파성'이 다시 한 번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인터넷의 발달은 정치적으로 양극화된 개인들이 정치인과 극단적인 정치인과 연결될 힘도 키웠다. 이전의 세계에서 정당은 당파성이 강한 극단적인 후보를 엄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트럼프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다." 트럼프는 트위터와 같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변화하는 미국사회에 불만을 갖고 있는 개인들에게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 소액 기부, 소셜미디어 등 개인들이 트럼프에 대한 자신의 지지를 표할 수 있는 통로도 늘었다. 양극화된 개인들이 정당의 매개를 거의 거치지 않고 극단적인 정치인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정치인에 대한 정당의 통제는 약해졌다. 저자는 이를 '강성 당원과 약한 정당'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우리는 양극화된 정치를 극복할 수 있을까

미국사회의 정당 양극화를 바꿀 수 있는 방안이 있을까. 저자는 "내가 내리는 처방보다 진단을 더 확신한다"면서도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미국적인 상황에서 나온 수단과 개인적인 마음 다스리기 같은 것을 제외하면, 다당제와 친화적인 정치제도로 여겨지는 비례대표제, 중선거구, 순위투표제, 그리고 좀 더 실질적인 삶의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지방정치의 강화다.

저자의 진단과 처방은 한국사회에도 의미가 있을까. 지난 4월 한국행정연구원이 주최한 '우리나라 정치양극화 문제의 현황과 해법' 세미나에서 박준 국정데이터조사센 소장이 발표한 <정치양극화 수준의 국제비교와 시사점>을 보면, 한국사회에도 정당 양극화 현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보수, 진보, 중도 등으로 측정한 이념적 양극화는 심하지 않지지만, 지지 정당에 따른 대통령 긍정 평가와 부정 평가 비율로 측정한 정서적 양극화는 크다.

같은 자료에서 박 소장은 한국, 미국 등 양당제 국가에 비해 네덜란드, 스웨덴 등 다당제 국가에서 정당 양극화 경향이 약하다는 점을 함께 지적한다. 에즈라 클라인의 진단과 처방은 한국사회에도 시사점을 주는 셈이다.

▲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에즈라 클라인 지음, 황성연 옮김) ⓒ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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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내 집은 아니어도 되니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잘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과 여가를 보장하는 직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 모든 사람이 이 정도쯤이야 쉽게 이루고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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