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세계경제의 재편에 나서다

[해외시각] 서방의 경제 제재는 사실상 실패, 그리고?

우크라이나전쟁 발발 이후 100일간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액이 1천억 달러에 이르며 이 가운데 6백억 달러는 유럽 국가들이 지불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러시아는 전쟁 이후 매일 10억 달러씩을 벌어들인 반면, 하루 전쟁 비용은 9억 달러라고 한다. 미국/유럽의 경제 제재가 실패한 것이다.

또한 뉴욕타임스 보도에(6월 8일) 따르면 미국 정보기관들이 전쟁과 관련해 러시아의 군사 상황보다 우크라이나의 군사 상황을 더 모르겠다며 사실상 정보 실패를 인정했다고 한다. 2014년 이후 계속 우크라이나 군을 훈련시켜 왔고 전쟁 직전까지 200-300명의 CIA 교관을 상주시켰던 미국이 우크라이나 군사 사정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은 대단히 기이한 일이다. 이는 미국 정보기관이 우크라이나전쟁 상황을 잘못 판단했음을 자인한 것과 마찬가지다.

한편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이 러시아의 침공 가능성을 미리 경고했음에도 우크라이나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는가 하면,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평화는 가능하다. 단 평화를 위해서는 2차 대전 당시 핀란드가 했던 것처럼 일정 정도 영토의 양보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미국/유럽이 발빼기 수순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전쟁의 이면을 모두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이 전쟁은 (누군가에 의해) 도발됐거나(provoked), 방지되지 않은(not prevented) 전쟁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일어날 필요도 없었고, 막을 수도 있었던 전쟁이란 뜻이다. 교황은 러시아의 침공은 "야만적이고 잔인하며", 우크라이나인들은 "용감하게 저항하고 있다"면서 자신의 발언이 푸틴을 편드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중요한 것은 이번 전쟁은, 서방 언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러시아의 팽창 야욕에 맞서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미국/유럽 주도의 약탈적 자본주의 체제를 벗어나기 위한 거대한 경제 전쟁이라는 점이다. 관련해 <팔레스타인 크로니클> 편집자인 언론인인 램지 바루드의 글을 소개한다. 램지 바루드의 다음 글은 우크라이나전쟁의 본질적 측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원 제목은 "자유방임의 종말 : 러시아, 세계경제의 재편에 나서다(The End of Laissez-Faire: Russia's Attempt at Reshaping the World Economy)"이며 <카운터펀치> 6월 14일 자에 실려 있다. 편집자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 ⓒAFP=연합뉴스

지난 5월 31일부터 6월 초까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사우디, 바레인, 아랍에미리트 등 걸프협력회의(GCC) 국가들을 순방했다.(이들 국가들은 친미 성향의 산유국이지만 우크라이나전쟁과 관련한 서방의 러시아 제재에는 동참하지 않았다 : 편집자) 라브로프의 방문 목적은 세계의 지정학적 쟁투와 관련해 러시아와 GCC 국가들 간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중동, 특히 걸프지역은 현재 세계 경제 질서의 유지, 또는 미래의 새로운 경제 질서 창출에 결정적 중요성을 가진다. 만일 모스크바가 세계 경제와 관련된 아랍 국가들의 역할을 새롭게 규정할 수 있다면, 이는 (현재 미국 중심의 단극적 경제 질서에서) 다극적 세계 경제로의 이행을 완수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세계의 지정학적 재편은 단지 전쟁이나 다방면에 걸친 서방의 정치적 영향력에 도전하는 것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와 서방 간의 대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적 측면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우크라이나전쟁 이전까지 지구화(globalization)에 대한 도전, 또는 새로운 지구화의 필요성에 관한 논의는 주로 학술적 차원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번 전쟁을 계기로 이러한 이론적 논의는 현실적이며 시급한 문제로 대두됐다. 미국과 유럽 등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이 나라의 주권 수호나 독립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서방은 최근까지 자신들이 주도해온 현재의 경제적 지구화를 러시아가 완전히 파괴하거나 최소한 심각하게 손상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세계는 더 이상 두 개의 거대 군사 진영(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 또는 두 개의 거대 경제 진영(미국과 소련)이 투쟁을 벌이는 공간이 아니게 됐다. 1989년 미국의 파나마 침공과 1990년 이라크전쟁 이후 세계는 (미소 대결 체제에서) 미국의 독무대가 됐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전쟁들의 군사적, 지정학적 측면뿐만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파나마 침공과 이라크전쟁은 미국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 확보를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창립이라는 새로운 경제적 지배력 확보의 계기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99년 지구화 반대를 내세운 미국 시애틀에서의 반(反)WTO 시위는 그 규모와 강도 면에서 전례 없는 것이긴 했지만, '기업 주도 지구화'라는 세계 경제의 도도한 흐름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이 시위는 지구촌 시민사회의 지구화에 대한 강력한 반대를 보여주긴 했으나, 그 반대가 실질적이며 지속가능한 대안을 만들어내진 못한 것이다. 지구화가 미국/서구 주도로 진행되는 한, 약소국들이 자신들의 의지를 반영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지구화와 관련된 협상에서) 부자 나라들이 자국 산업에 유리한 특권들을 확보하는 동안, 대부분의 남반구 국가들은(Global South) 그저 서방의 주도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자유무역과 시방 개방을 설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국의 핵심 산업에 대해서는 보호주의를 굳건히 유지했다. 지구화란 자유와 민주주의의 성공 스토리라고 선전됐지만, 실상은 18세기 프랑스의 경제교리였던 '자유방임'의 싸구려 복제판에 불과했을 뿐이다.

가난한 나라들이 미국/서구의 지배에 왜 제대로 도전하지 못하느냐고 비판할 수는 있다. 사실 그들이 도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도전의 결과는 경제 제재, 정권 교체, 그리고 전쟁이었다. 착취적 자본주의에 맞설 가난한 나라들의 유일한 대안은 빈국들의 경제연합을 결성해 부자 나라들과의 협상에 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왜곡된 세계 경제 질서를 해체하기는커녕 일정한 영향력조차 미치기 어려웠다.

중국과 같은 거대 신흥국 경제는 지구화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이 세계 경제, 즉 서방 경제의 이익에 기여하는 한도 내에서. 그러나 최근 들어 중국의 경제력 증대가 정치적, 지정학적 영향력의 확대로 이어지면서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표현을 빌자면 '중국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경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현재 바이든 행정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크라이나전쟁에서 러시아에 대한 군사적 저지에 급급하면서도 반(反)중국 수사는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WTO 체제는 1994년 마라케시협정에 의해 탄생했고, 그 이전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은 1948년 출범했다. 이 두 개의 지구적 규모의 경제협정이 모두 지정학적 질서의 대변동 뒤에 태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후자는 2차 대전, 전자는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이후에 탄생한 것이다.

현재 러시아와 그 동맹국들은 우크라이나전쟁의 승리에 집중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경제적 균형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방의 경제적 헤게모니가 관철되고 있는 현재의 지구화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계 경제의 창출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러시아는 새로운 세계 경제 체제 출범에 기대를 걸고 있으며, 그 창설 과정에 동참하려 한다. 반면 서방은 분열돼 있다. 서방은 러시아 국경에 과거와 같은 철의 장막을 설치해 러시아를 고립시키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서방 경제 자체도 제재의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적어도 앞으로 수년간은 실현 불가능한 해법이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5월말 유라시아경제포럼 연설에서 러시아를 고립시키려는 것은 "불가능하며 현대 세계에서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우크라이나전쟁과 관련한 서방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라브로프 외무장관의 중동을 비롯한 남반구(Global South) 순방은 대안적 세계 경제 질서 창출을 위한 러시아의 관심을 말해준다. 이러한 모든 시도들은 지정학적 측면에서 세계를 재편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수십년에 걸쳐 지구화의 개념 자체를 새롭게 정의하도록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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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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