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질서 재편, 신안보·신경제, 그리고 북핵 시대
탈냉전 이후 30년을 거치면서 세계질서가 대전환의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미·소 양강 체제가 해체되고 지구화가 진행되면서 세계가 단일한 체제로 수렴되는가 했으나, 다시 미·중 전략경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중국의 영유권 주장과 이에 맞선 주변국 및 미국·서방국 간 대립이 위험수위를 넘나들고 있다. 중국의 대만 침공 시나리오까지 공공연히 회자되는 현실이다.
유럽에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으며, 러시아는 전략 핵폭격기까지 동원해 무력시위를 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동유럽에서 개시되었다는 기시감에 사로잡혀 있는 유럽에서는 전쟁 발발 여부를 떠나 복합적인 후유증이 초래될 우려가 크다.
중동을 위시해 지구촌의 지역 분쟁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강대국들은 국제문제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고 국제기구는 분쟁조정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 국제질서의 다극화와 함께 무극화 경향이 동시에 나타나는 혼돈의 시대다.
팬데믹과 기후변화를 포함한 새로운 현대 위험이 우리 앞에 놓여있는 신안보의 시대이다. 코로나19 사태는 우리의 일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으며, 정치, 경제, 사회적 영향을 넘어 국가안보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코로나19 발생 2년 남짓 감염자는 4억 명이 넘으며, 사망자는 600만 명에 육박한다. 기후변화를 방치할 경우 2050년 이후 통제 불가능한 위험에 직면할 것이라는 경고도 있다.
우리의 일상은 디지털로 연결되어 세계는 하나의 초연결사회로 전환했다. 글로벌 공급망은 각 국가의 생명줄이며, 첨단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면 경쟁에서 영원히 낙오하는 신경제 시대가 도래했다.
한편 지난 30여 년간 우리와 국제사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사실상 핵능력국가(Nuclear Capable Country)로 전환했다. 2021년 1월 노동당 제8차 대회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전술핵 개발의 본격화를 지시했으며, 북한은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단거리 발사체 개발에 노력을 집중했다. 한반도 전역이 북한의 핵위협에 노출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한반도 정전체제가 세계 최장인 70여 년간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핵문제는 한반도 분단체제가 낳은 대립의 산물이다. 북핵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분단체제의 대립구도가 해소되지 않는 한 한반도의 고비용 구조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북한의 핵 위협과 비정상적인 정전체제를 방치하고 한반도의 미래를 도모하기는 어렵다.
올해 1월 북한은 중거리인 화성-12형을 포함해 7차례나 미사일을 발사했으며, 2018년 4월 선언했던 자발적 모라토리엄의 파기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북한이 핵실험과 ICBM 발사를 재개할 경우 한반도 정세는 2017년 위기상황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며, 대화국면의 재개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출렁이는 국제질서와 날로 심화되는 미·중 전략경쟁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하며, 새롭게 대두되는 신안보와 신경제의 이슈들을 지혜롭게 풀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한반도 정세의 당면과제와 외교안보의 영역에서 문재인 정부는 중심 잡힌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으며, 20대 대선후보들도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외교안보가 실종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법하다.
한·미동맹, 사드, 선제타격론이 삼킨 대선 후보 토론회
대전환기의 시대적 과제에도 불구하고 20대 대통령선거 후보 토론회의 외교안보 분야 쟁점은 한·미동맹, 사드의 한반도 추가 배치, 선제타격론이었다. 종전선언, 전시작전권 환수, 한·중관계에 대해 일부 의견차이가 있었지만 한·미동맹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견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미동맹은 태생적으로 북한을 대상으로 한반도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협력관계지만 최근 미국은 주한미군을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 지역전략을 위한 자산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가시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주한미군의 성격변화는 한국의 외교안보에 핵심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대선후보 토론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다.
한·미관계의 해묵은 숙제들과 한·미 상호방위조약,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한·미 원자력협정 등의 불평등 조항과 독소조항 등에 대한 논의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엔군사령부(UNC)가 70여 년간 대한민국의 영토인 DMZ를 배타적으로 관리하는 비정상성에 대한 지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미동맹 지상주의 시대를 확인할 수 있는 대선후보 토론회였다.
사드의 경우 한반도 배치 주장과 반론, 그리고 중국의 반응을 둘러싸고 논쟁이 이루어졌다. 북핵 위협에 대한 사드의 효과성과 한국 자체의 미사일 방어망 개발 등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상식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미사일 방어망은 완전하지 못하며 한반도처럼 종심이 짧은 전장 환경에서는 효과가 더 제한적이다. 단 한발의 핵미사일 요격에 실패해도 결과는 재앙이다.
걸프전에서 미사일 방어망의 대명사인 패트리어트의 요격률은 실망할 정도였으며, 사드는 아직 실전에서 검증되지 않은 무기체계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견인해 내지 못하면 미사일 방어망의 효과는 극히 제한적이다. 미사일 방어망은 방대한 핵무기를 보유한 강대국 간 힘겨루기의 산물일 뿐이다.
선제타격론에 대한 논쟁 역시 공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전쟁상태를 전제로 선제타격론이 가능하다는 입장과 선제타격 언급 자체가 전쟁의 위험도를 높이는 것이라는 주장이 평행선을 달렸다.
지금까지 비핵국가가 핵보유국에게 선제타격을 한 사례는 단 한 차례도 없었으며, 강대국 간 핵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유도 상대방의 보복능력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걸프전에서 이라크는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에 의해 궤멸적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공격능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결국 스커드 미사일로 반격을 해 피해를 입혔다.
만일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에 핵탄두가 장착되었다면 전쟁의 양상을 바꾸고 상상하기 어려운 인명피해를 초래했을 것이다. 북한이 핵을 보유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그 결과는 승패에 관계없이 재앙이다.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한반도 전쟁 여부가 회자되는 것 자체가 우려스러운 일이다.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각 후보들은 외교안보 영역을 정치에 편입하는 데만 골몰했지 국가의 미래 비전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국민들은 시급한 한반도 정세의 안정은 물론 국제질서의 재편 및 신경제·신안보 시대에 지속가능한 국가발전을 견인하기 위한 설득력 있는 구상과 방향을 기다리고 있다.
외교안보의 패러다임 전환
2021년 대한민국은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그룹으로 진입했으며, 이는 유엔 역사상 최초의 일이다. 우리는 반도체 등 첨단기술을 선도하는 세계 10위권의 경제 위상을 정립했으며, 세계인은 한류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이루어낸 경험은 세계사에서 단연 독보적이다. 이러한 우리의 저력과 선진국 위상을 자산으로 외교안보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마땅하다.
이념의 편향과 국내정치의 정쟁구도를 초월하는 것이 중요하다. 냉전구도의 해체와 함께 이념의 시대는 오래전에 종말을 고했으며,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구분도 더 이상 의미를 지니기 어렵다. 남남갈등과 정쟁의 구도 속에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추진력을 발휘하는 것은 어렵다.
이번 대선에서 긍정적인 점은 고질적인 색깔론이 과거에 비해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 안의 분단체제를 극복할 때가 되었으며, 역량도 성숙해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통일과 북핵문제에 대한 현실적 시각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MZ세대의 통일에 대한 인식은 약화되고 있으며, 국민 대다수가 당장의 통일보다 평화적 공존을 선호하고 있다. 분단체제의 고비용 구조 해소를 위한 현실적 대안을 모색할 때다.
이를 위해서는 남북한 간 잠정적 특수관계를 제도화하는 남북 기본협정 체결이 시급하다. 남북은 이미 기본합의서를 도출한 바 있다는 점에서 실현가능한 대안이다. 체제경쟁의 실패와 한·미동맹과의 군사적 불균형이 북한이 핵을 개발한 원인이라는 점에서, 비핵화와 한반도의 긴장완화는 동전의 양면이다. 남북한 간 관계정상화와 장기적인 신뢰관계를 통해 한반도의 군사 긴장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고, 이와 병행해 북핵문제 해결을 도모하는 현실적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강대국 논리에 매몰된 수동적인 외교안보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전략적 위상을 바탕으로 능동적이고 현실적인 외교안보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야 한다. 미·중 전략경쟁 구도 속의 강요된 양자택일 관점을 과감하게 탈피해야 할 것이다.
한·미관계는 향후에도 양국의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지만, 한·미동맹에 대한 맹신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미국이 오커스(AUKUS) 출범과 함께 호주의 핵추진 잠수함 획득사업을 지원하기로 함으로써 호주-프랑스 간 수백억 달러 규모의 잠수함 계약이 파기된 사례를 상기할 일이다. 국익에 따라 동맹 간에도 얼마든지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다.
미국과의 특수관계에 일방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이를 주도해 나가는 이스라엘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미관계와 한·중관계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유일한 기준은 바로 국익이다.
또한 북한에 매몰된 외교안보 프레임을 과감하게 벗어나야 할 것이다. 장기간의 냉전체제와 한반도 분단체제로 인해 한국의 외교안보 정책의 시야는 북한문제로 협소화되었으며, 그 관성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의 외교안보 역량은 북한문제 해결과 주변국 외교에 집중됨으로써 한반도의 범위를 넘어서기 어려웠다. 탈냉전에 따라 북방정책, 동북아중심국가, 신아시아구상, 유라시아이니셔티브, 그리고 신남방 신북방정책으로 한국 외교안보정책의 공간을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노력은 있었지만 글로벌 차원으로 확장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제 글로벌 시각에서 한국의 국가발전을 도모하고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해법을 모색할 때다. 한국형 세계외교, 세계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은 더 이상 선진국을 추월하기 위해 쫒아가는 추격국가가 아니라는 점에서 신경제·신안보시대 선도국가의 위상을 정립해 나가야 한다. 새로운 안보위협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한편 반도체, 배터리를 넘어 새로운 미래 먹거리를 창출해 지속가능한 국가발전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인류공통의 문제 해결과 저발전국을 지원하는 글로벌 기여도도 높여야 한다. 2021년 8월 미라클 작전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난민 380여 명이 특별기여자 신분으로 입국했지만, 난민인권센터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0.4%로 유럽의 32%와 비교 자체가 어려운 현실이다.
신남방정책과 한류열풍에도 불구하고 아세안 지역에서 한국의 기여도는 최하위권의 평가를 받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은 당당한 선진국으로서 지구촌 사회에 대해 책임을 다해야 하며, 세계인에게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선진국 대한민국의 새로운 과제다.
임기 말 문재인 정부는 외교안보의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북한의 모라토리엄 파기를 막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재가동하는 대안의 마련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 종전선언에 대한 집착을 넘어 좀 더 창의적이고 파격적인 방식의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현 정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하지 못할 경우 정권교체기로 인한 공백의 발생은 물론 차기정부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재개하는 것도 쉽지 않은 과제가 될 것이다. 신정부 역시 출범과 함께 정책을 본격화할 수 있는 외교안보의 '준비된 정부'가 되어야 한다.
TV 토론은 지도자의 자질을 국민들에게 확인받을 수 있는 중요한 자리다. 각 대선후보들은 미시적 사안에 매몰된 논쟁을 벌일 것이 아니라,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외교안보의 비전과 그랜드 디자인에 대한 식견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국민들의 선택을 기다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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