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이 '한반도에 핵무기를 없애자' 선언한지 벌써 30년

[현안진단] 북한의 핵무장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30년 게임' 승부는

남과 북이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발표(91.12.31)한 지 30년이 되었다. 당시 북한은 NPT 가입(1985)후 18개월 안에 체결해야 하는 IAEA 전면안전조치협정을 5년째 미루고 자체적으로 핵에너지를 개발하고 있었다. IAEA의 전면안전조치는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과 투명한 관리를 위한 핵심 장치다.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전면안전조치 이행을 끌어내기 위해 3가지를 행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핵부재선언(91.12)으로 이 땅에 단 하나의 핵무기도 없다(주한미군 포함)고 공식화하고, 연례 한·미 합동군사연습을 취소하며, 핵물질을 추출할 수 있는 우라늄 농축시설과 플루토늄 재처리시설을 남과 북이 함께 포기하자는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제안했다.

북한은 이를 수용해 전면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고(92.1) IAEA의 임시사찰을 1년간 6차례 받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IAEA는 북한의 보고내용과 중대한 불일치를 발견하여 특별사찰을 요구했고(93.1), 이에 반발한 북한은 NPT를 탈퇴하고 IAEA 사찰관을 추방하였다(93.3). 제1차 핵위기의 발단이다.

핵무기를 가지려는 북한과 이를 막기 위한 한국 등 국제사회의 치열한 30년 싸움 또는 게임(War without Firing)이 시작된 것이다.

"핵을 가진 자와는 손잡지 않겠다"던 김영삼 대통령 이후 역대 대통령은 북핵문제 해결을 최우선 외교안보 과제로 삼아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였다. 미국과 국제사회도 북한 핵무장을 국제안보의 중대 위협으로 인식하고 힘을 모았다. 그러나 북한은 결국 핵무장을 했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한·미 동맹의 군사적 위협, 최고 수위의 촘촘한 경제제재와 외교적 고립, 인권공세와 대북 심리전 등 적대적 환경 속에서 주민 생활의 고통과 희생을 감수하며 핵무장을 달성한 것이다.

겉으로 보자면 핵을 가지려는 북한의 절실함이 이를 막고자 한 우리와 국제사회의 절실함을 이겼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한 핵무장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국제사회의 한반도비핵화 노력은 북한 핵무기의 폐기를 목표로 지속될 것이다. 1차 승부는 가려졌지만 아직 게임이 끝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지난 30년간 한반도 비핵화 노력의 절실함을 저해한 내부적 요인으로 어떤 것이 있었나를 돌아보는 것은 미래를 위해 의미가 있다.

▲ 1991년 12월 13일, 정원식 총리(오른쪽 4번째)와 연형묵 북한 정무원 총리(왼쪽 4번째)가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제5차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를 타결한 후 대표들의 박수를 받으며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반도 비핵화의 절실함을 저해한 내부 요인 3가지

핵무장은 ① 핵물질의 확보 ② 핵실험을 통한 핵분열 기술 확보 ③ 핵실험 데이터를 바탕으로 통제 가능한 핵폭탄의 제조 ④ 별도 개발한 투발수단에 핵폭탄을 장착하는 무기화 ⑤ 핵무기를 운용전략과 함께 실전배치하는 핵전력의 확보 등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북한은 이 모두를 넘은 것으로 평가된다.

1차 핵 위기의 발단이 된 "중대한 불일치"란 북한이 그동안 (93년 초까지) 추출한 핵물질이 90g이라고 한 반면 IAEA는 수kg으로 추정한데서 비롯되었다. 핵무장 1단계의 초기였다. 이 때 막을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결국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렸다. 물론 근본 원인은 핵협상을 대하는 북한의 불성실함에 있다. 하지만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에도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것을 아래 세 가지로 요약해 본다.

첫째는 북한의 능력에 대한 과소평가이다. 붕괴론까지 포함된다.

1차 핵위기를 봉합한 제네바 기본합의(94.10)는 북한 핵시설을 폐기하는 대신 경수로형 원자력발전소를 지어주고 한반도 평화문제 논의를 합의이행의 최종단계에서 시작한다는 틀로 타결되었다. 핵시설 폐기는 발전소 핵심부품 납입과 함께 착수하며 그 전까지는 매년 중유 50만 톤을 지원하기로 했다. 경수로의 건설기간은 10년, 건설비용은 30억 달러로 추정했다.

합의 이행에 긴 시간이 소요되고 비용도 막대하다는 비판에 당시 제네바 협상의 주역인 로버트 갈루치 미국무부 차관보는 후일 "일단 핵 동결에 주력하고(시간을 끌면서) 핵 폐기는 상황전개를 지켜본다"는 기류가 협상 팀 내부에 있었다고 실토한 바 있다. 당시는 김일성 사망(94.7) 직후로 북한 붕괴론이 유행했고, 조만간 붕괴할 것으로 기대되는 상대와의 협상에 절실하게 임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이 굴복하거나 내부 붕괴에 직면할 것이라는 기대는 시간이 우리 편이라는 생각과 함께 스스로 대북협상 장벽을 높이 쌓게 만든다. 부시 행정부의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폐기) 정책이라든가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정책이 이런 식이었다. 지금도 북한 붕괴론은 북한과의 협상에 전력투구하는 것을 저해하고 있다.

둘째는 어느 정도 북한의 위협을 용인하며 이를 이용하는 태도다. 적대적 공생 등 음모론에 가깝지만 이를 부인하기 어렵던 시기가 있었다.

소련 붕괴이후 유일 초강대국 미국은 글로벌 미사일방어망(MD) 등 첨단무기 개발을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 시진핑 집권(2012) 이전의 중국은 도광양회(韜光養晦)로 바짝 엎드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시 대통령은 북한,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2002 시정연설)하고 이라크를 침공하는 한편 이란과 북한에 대해서도 군사적 압박 수위를 높였다.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의혹에 대해 미국이'제네바합의'의 보완보다 폐기를 선택(2002.10)함으로써 한반도에 2차 핵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후 핵협상은 미국의 단독협상이 아닌 한국과 중국 등이 참여하는 6자회담 틀로 추진(2003.8 1차 회담 시작)된다.

2차 핵위기를 봉합한 6자회담의 9.19 합의(2005.9)는 북한 핵폐기 이전에 불능화 단계라는 것을 두어서 단순한 동결 조치가 가진 취약점을 보완하고 미국과 일본의 대북한 관계개선 시기를 앞당겼다. 또한 그 단계에서 한국은 송전방식으로 200만kw의 전력을 지원한다는데 합의하였다. 전체적으로는 '제네바합의'의 기본 틀을 반복한 것이지만 진전된 내용이었다고 평가되었다.

그런데 9.19 합의 다음날 미국은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의 북한 계좌를 돈세탁 의심이 간다며 동결하였고, 그 바람에 9.19 합의는 이행에 착수도 못하고 2차 핵위기를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북한은 11개월 만에 핵실험을 강행(1차, 2006.10)하였고 이에 다급해진 미국은 변칙과 무리수를 써서 핵실험 6개월 만에 동결계좌를 풀어주었다. 9.19 합의 이행과정이 약 2년 간 지연된 것이다. 그 사이 북한은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결국 이런 사정으로 북한의 핵은 부시가 만들어 준 것(Bush's Bomb)이라는 풍자까지 나왔다.

셋째는 현상변경에 대한 불편함 또는 불안감이다.

최근의 종전선언과 관련된 논의에서 이런 조짐이 있다. 비핵화와 맞물려서 진행될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준비가 미진한 상황에서 평화체제 논의의 문이 열리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다.

종전선언이 정치선언이라지만 일단 평화문제 논의의 문이 열리게 되면 주한미군이나 유엔사 문제 논의를 피해 갈 수 없으며, 내부적으로도 국보법 등 분단질서에 기초한 안보법제에 궁극적 변화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일본이 유엔사 후방기지로서 주일미군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종전선언에 반대하고 있으며, 미국의 실무진도 이에 부정적이라는 것은 트럼프 행정부 당시 NSC 보좌관 볼튼의 회고록으로 공개된 바 있다.

그동안 북한의 핵 폐기 시기는 당기고 평화문제 논의는 뒤로 미루려는 것이 한·미 동맹의 기본적인 이해였다. 비록 종전선언이 당장 한·미 동맹과 유엔사 유지에 영향이 없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한반도 현상변경 요구에 명분을 준다면, 비핵화 협상에 주저하게 되고 북핵 해결의 절실함을 불러오기 어려울 것이다.

북한 '핵무기'와의 공존? 또는 '북한'과의 공존?

핵실험으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북한은 핵협상이 다시 공전되자 10년 만에 핵무장을 완성(2017.11)했다. 핵무장까지(2→3→4→5단계) 단숨에 도달한 이 기간에 한·미 동맹은 핵폐기 당위론만 주장하고 제재에 주력했다. 일각에서는 한·미 동맹과 국제사회가 북한 핵을 폐기할 능력도 의사도 없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제기하고 우리도 핵무장으로 대응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북한 비핵화 불씨를 되살린 것은 2018년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모라토리움과 한·미 군사연습이 일시 중단된 상황(雙中斷)에서 협상이 진행되었다. 북한은 핵무장을 완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북 적대정책 폐기와 한반도 평화체제를 조건으로 핵무기를 폐기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제네바(1994, 북·미 기본합의)에서 맨 뒷자리에 있었던 한반도 평화문제 의제가 베이징(2005, 9.19합의)에서 중간자리(불능화 단계)로 오더니 싱가포르(2018)에서는 앞 쪽에 자리를 달라고 한 것이다.

평화문제 논의는 불가피하다. 현재의 불안정한 한반도 정전체제를 시급하게 안정된 평화체제로 변경해야 한다는 데는 모두 공감한다. 그러나 안정된 평화체제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불편함과 불안감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반면 평화문제 논의가 미루어지는 만큼 북한의 핵무기를 우리의 머리 위에 얹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종전선언을 입구로 하는 한반도 평화문제 논의는 즉각 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만 종전선언만 따로 떼어 고려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종전선언 이후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대해서도 개략적인 그림이 나와야 한다. 이 로드맵에 대해 북한과 합의하기 전에 미국과 합의가 필요하고, 그 이전에 국민적 합의가 우선되어야 한다.

현상변경이 불안해서 평화문제 논의를 미루고 북한 핵무기를 용인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할지(북한 핵무기와의 공존), 아니면 더 이상 늦기 전에 북한 비핵화 길을 열고 남북 평화공존 논의의 문을 열 것인가(북한과의 공존) 하는 두 갈래의 길목에 우리는 다가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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