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 장흥에서 "백광홍의 관서별곡"을 만나다.

백광홍(1522~1556은 전남 장흥 출신으로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효시로 꼽히는 '관서별곡(關西別曲)'을 지었다.

당시 최경창, 이달과 함께 문인이자 서예가로 이름이 났으며, 정유재란때는 이순신 휘하에서 활약했으며 난중일기에 '백진사'라며 어꼈던 인물로도 전해지고 있다.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에 있는 관서별곡 ⓒ프레시안(위정성)


일재(一齋) 이항(李恒.1499-1576)을 스승으로 두었던 그는 벼슬보다 학문에 뜻을 두고 성리학 연구와 시창작에 몰두했다. 그러나 부모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1549년 27세의 나이로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했고, 3년 후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정자(正字.정9품)에 임용되었다.


그는 1553년 순수한 학문 연구기관인 '호당(湖堂)'에 뽑혀 평소 지향했던 학문에 정진할 기회를 얻었으나, 1555년 봄 평안도 평사의 벼슬을 받아 외직에 나서게 되었다. '관서별곡'은 그가 왕명을 받아 관서지방을 향해 출발하는 것부터 부임지를 순시하는 노정을 시적 운치로 그려낸 기행가사이다.


'관서별곡(關西別曲)'은 25년 뒤 송강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에 직접적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중 부안의 처가에서 34세로 작고했다. 저서로는 한시 130수와 '관서별곡' 등을 모아 1899년 엮은 '기봉집(岐峯集)'이 있다.

당시 관서별곡(關西別曲)에 대한 칭찬이 잦았으나 일찍이 세상을 떠나 크게 빛을 보지 못하였다. 선생의 관서벽곡(關西別曲)은 정송강의 관동별곡(關東別曲)보다 25년을 앞서 불리고 두 선생 간에 교류가 있었던 점으로 보아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짓는데 구성과 표현 수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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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성

프레시안 광주전남취재본부 위정성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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