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패권경쟁 시대, 왜 지금 임진왜란을 다시 복기하냐고?

[최재천의 책갈피] <임진왜란> 김영진

"해 뜨는 곳의 천자(天子)가 글을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보냅니다. 별고 없으십니까?"

서기 607년 일본이 수(隋) 양제(煬帝)에게 보낸 국서(國書)다. 애당초 일본은 이런 나라였다. 1590년 가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황윤길과 김성일 등 통신사절들을 이렇게 대했다.

"공식연회를 한 번 열면서 떡 한 접시를 탁자 위에 놓고 질그릇으로 술을 마시게 하고, 인사나 권주도 없이 몇 번 잔을 돌리게 했다. 또한 그는 평상복 차림에 어린 아들을 안고 왔는데, 애가 오줌을 누어 자신의 옷을 젖게 만들자 좌중들 사이에서 그냥 옷을 갈아입기도 했다. 접견 후 히데요시는 황윤길과 김성일에게 각각 은 4백 냥을 주고는 곧장 귀국하도록 요구했다."

당시 조선의 무능과 국론 분열에 대해서는 돌이키기조차 싫다. 그렇게해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은 근대 이전 한·중·일 삼국이 벌인 유일한 전면전이다. 그리고 그 전장은 다름 아닌 한반도였다.

사실 "임진·정유왜란은 종종 7년 전쟁으로 간주되지만, 실제 군사적 대결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저자의 논리를 요약하면 임진왜란 시기의 군사적 대결기간은 1년 수개월이고, 정유재란 시기는 약 10개월정도로 전체적으로 해당 기간은 약 2년 정도이다.

중국 속담에 '귀신을 들이기는 쉬워도 내쫓기는 어렵다'고 했다. 명나라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명군의 파병 근거는 조명관계의 본질과 관련되는 문제였다.

유성룡은 "무릇 우리나라의 중국에 대한 충성 또한 이미 지극합니다. 이번에 (조선이) 화를 당하게 된 것도 오로지 중국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중국은 서둘러 (조선을) 구해주지 않아 천하의 난리가 생겨나게 했습니다."라고 했다.

명은 파병을 '황제의 속국에 대한 은혜로 간주'했다. 명나라는 왜란이 끝나고도 지정학적 이유를 들어 잔류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조선을 제쳐두고 명일간에 강화교섭이 이루어지기도 했고.

왜 <임진왜란>을 복기하냐고? 읽는 내내 불편하고 고통스러웠지만 책을 집어든 목표가 저자의 연구의도와 일치하는 것 같아 내심 좋았다. 미중 대립속에서 '선택하느냐', '선택당하느냐'라는 수준의 저급한 외교안보 담론이 현재를 지배한다. 참으로 수치스러운 외교안보관이다. 어찌 한반도 운명이 고작 선택의 문제수준이란 말인가. 저자가 에필로그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적었다.

"최근 확대되고 있는 미중간의 패권경쟁 상황에서 양자택일은 역사의 악순환을 반복하는 것일 뿐 궁극적인 대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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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예나 지금이나 독서인을 자처하는 전직 정치인, 현직 변호사(법무법인 헤리티지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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