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보수와 진보가 국가의 시장 개입 정도와 국가 기능에 관한 태도의 차이가 아니라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대결 구도를 형성하게 된 데에는 분단과 일제 식민 지배라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분단과 일제 식민지배는 친일과 반일, 용공과 반공을 기준선으로 해방 공간과 정부 수립 과정은 물론 한국현대사와 정치사에 결정적 규정력을 행사해왔다. 이의 연장에서 냉전 세력은 분단을 이념 대결을 강화하고 반공논리와 안보 이데올로기를 도구화하여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악용해왔다.
민주화 이전의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서 민주세력에 대한 군사정권의 정치적 배제와 억압은 일상이었다. '용공'과 '빨갱이'의 탄생은 그 자체로 조작적이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보수 정권은 과거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색깔론'과 '좌파독재' 등의 시대착오적 인식을 가지고 민주화 운동을 폄훼하고 역사인식의 부재를 드러내곤 했다.
해방 직후 미군정청이 일제 강점기 친일 행각에서 자유롭지 않은 경찰·관료들을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에서 기용함으로써 오히려 조선 민중에게 단순히 법적인 면에서의 점령군을 넘어 실질적으로 위압적 통치를 한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더구나 '미점령군'이라는 표현은 보수나 진보학자를 막론하고 역사학계나 사회과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유통되는 개념이다.
최근에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미점령군' 관련 발언에 대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나 국민의힘의 반응은 지나치게 민감하다. 역사인식을 의심케 할 정도다.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을 하든지 북한으로 망명하든지"(김재원 최고위원), "빨갱이라고 핍박받던 주사파적 흐름이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됐다"(정진석 의원),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역사의 단편만을 부각해 맥락을 무시하는 세력은 국민들의 성취에 기생하는 것"(윤석열 전 총장) 등의 발언들이 그 예이다.
당내 대선 주자도 예외가 아니다. "대한민국 정통성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막말"(황교안 전 대표), "이 지사가 대한민국을 친일세력과 미점령군이 만든 지배체제로 더럽혀진 나라라고 이야기했다"(원희룡 제주지사). 이념공세를 통한 보수결집이라는 퇴행적 정치공학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를 보는 관점과 이념적 지향에 따라 미점령군과 친일세력 등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대선 주자나 정당이 역사에 대해 어떠한 생각과 인식에 근거하느냐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당장의 민생과 삶의 문제에 힘든 대중들에게 이러한 논란은 별로 관심이 없다.
이 지사가 발언한 곳은 이육사 문학관이다. 장소와 대화 상대의 맥락에서 친일과 미점령군을 거론했을 뿐이다. 설령 '친일'과 '점령군'에 대한 견해가 다르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얘기다. 국민의힘과 윤 전 총장 등이 마치 국가를 부정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문제 삼는다고 호들갑이니 국민의힘의 전신인 미래통합당과 자유한국당의 기시감이 그대로 묻어난다.
특히 박근혜를 구속하고 현 정권과도 각을 세워 이념에서 자유롭다는 인상을 줬던 윤 전 총장과 개혁적 이미지의 원 지사의 과민한 반응은 여전히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보수의 현 주소를 실감나게 한다.
논란은 잦아들었지만 언제든지 대선국면에서 역사논쟁은 재현될 수 있다. 논쟁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민생이 중요하지만 역사논쟁 또한 굳이 피할 일도 아니고 피해지지도 않을 것이다.
동일한 객체와 역사적 대상 및 사실(史實)에 대한 관점의 이념적 간극을 메워나가는 것은 한국사회에 던져진 난제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대상에 대한 역사적 편견의 배제와 친일세력이 해방 공간에서 어떻게 처신하며 생존을 이어갔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보편적 역사인식의 성찰은 필요하다. 역사를 직시함으로써 스테레오타입으로 화석화된 낡은 보수를 벗어날 때도 됐다.
대선 쟁점은 대외적인 외교 안보 등의 측면과 국내적으로 코로나19 이후의 사회구조의 전환 및 복지와 경제, 주거, 양극화의 해소 등 사회경제적 격차에서 비롯되는 제반 문제에 대한 공약과 정책이 되어야 한다. 가치판단의 차원을 넘어서 친일과 반일의 이념 대결적 요소가 대선의 주요 쟁점으로 부상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갈등을 강화함으로써 지지를 결집하는 전략은 수구에게나 먹히는 낡은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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