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가면 해가 바뀔 무렵에는 대유행 국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다는 낙관적 전망도 있지만, 몇 년은 더 '비상한 일상'을 살아야 한다는 비관론도 있다. 하지만 이 국면이 마냥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이 종식되든 감기처럼 공존하게 되든, 이번 비상 국면에도 어쨌든 끝은 있을 것이다.
그럼 대유행을 겪고 난 뒤에 우리가 이 경험에서 건져내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엇인가? 가장 생생히 기억하며 이후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반추해야 할 깨달음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명쾌하면서도 깊이 있는 답을 내놓는 책이 있다. 영국의 페미니스트 이론-실천집단인 '더 케어 컬렉티브'가 작년 말에 발표한 <돌봄 선언>(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2021)이다. <돌봄 선언>이 제시하는 답은 제목 그대로 '돌봄'이다.
만만한 '좋은 말'만은 아닌 '돌봄'
맞는 말인 것 같다. 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있는 집이라면 다들 실감했을 것이다. 당장 어린이집, 유치원, 중고등학교가 문을 닫자 부모들은 일 하랴, 자녀 돌보랴 평소보다 훨씬 더 고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바이러스 확산 진원지 중 하나로 지목된 요양병원은 또 어떤가. 그간 노인 돌봄을 떠맡던 기관들에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는지 드러났다.
<돌봄 선언>이 나온 영국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 대유행 속에서 모든 사회는 두 가지를 동시에 절감했다. 하나는 서로에 대한 돌봄이 인간 사회의 생명을 유지하는 심장과도 같다는 사실이었다. 바이러스의 위협 앞에 우리는 타인과 '거리두기'를 해야 하기도 했지만, 위기의 순간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타인의 도움뿐이었다. 감염을 무릅쓰고 방역에 참여한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정도로 생명과 건강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그간 돌봄과는 전혀 상관없다 여겼던 택배 같은 노동 역시 넓은 의미의 돌봄 활동임이 드러났다.
다른 하나는 이렇게 소중한 돌봄이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시작한 그 순간까지 줄곧 약화되고 파괴돼왔다는 사실이었다. 신자유주의 시기 동안 국가의 복지 기능은 축소를 거듭했고, 그 중 핵심은 사회적 돌봄 활동이었다. 예컨대 1차 대유행 앞에 속절없이 무너진 서유럽 국가들을 보자. 보수 언론들은 영국, 이탈리아 같은 나라들의 국영의료체계가 문제라고 떠들었지만, 진짜 문제는 이들 나라의 국영의료체계 예산이 삭감되고 상당 부분이 사유화돼 감염병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돌봄이 위축된 만큼 바이러스는 승리를 구가했다.
서유럽에 비해 그나마 잘 대처했다는 한국도 상황이 그리 다르지 않다. 지금도 많은 의료인들이 바이러스에 맞서는 최전선에서 하루하루를 어렵게 버티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선거 때마다 돌봄 예산을 늘리겠다고 했지만, 대유행을 거친 뒤에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것은 국가의 돌봄 기능 강화가 아니라 난데없는 원격 의료 강화였다. 우리 시대는 아직도 <돌봄 선언>의 다음과 같은 진단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돌봄은 그 익숙한 어감과는 달리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좋은 말'만은 아니다. 누구의 귀에든 거슬리지 않으니 선거 때마다 그저 사탕발림 공약을 반복하면 되는 만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돌봄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지향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대유행 이전의 신자유주의와 충돌할 뿐만 아니라, 그 다음 세상을 둘러싼 논의에서도 그렇다.
가령 한국식 '공정'론을 보자. 요즘 젊은 세대의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하는 '공정'론은 경쟁하는 인간을 전제한다. 그러면서 경쟁 과정에서 나타나는 반칙을 비판한다. 반칙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이는 한국 사회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에 대한 정당한 공격이다. 그러나 경쟁이라는 무대만을 바라보며 삶의 다른 모든 측면을 그 무대의 그림자로만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이 공격은 편협할 따름이다.
인간에게는 다른 무대들도 있다. 아니, 그 다른 무대들이 한 사람의 삶에는 훨씬 더 중요하고 근본적이다. '돌봄'론은 그런 무대들에 빛을 비추며 우리의 관심과 전향을 촉구한다. 그 무대들에서 인간은 서로 경쟁하는 존재가 아니다. 서로 의존하는 존재다. 타인은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다. 비교에나 동원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돌봄의 시각에서 우리 각자는 오직 타인이 있기에 존립한다. 남이 나를 돌보기에 내가 있고, 그렇기에 나 역시 수많은 돌봄의 요청에 부응하며 한 삶을 보낸다.
여기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상호의존성'이 또한 '상호취약성'을 뜻한다는 점이다(위의 책, 30쪽). 우리는 각자의 잘남 때문이 아니라 못남 때문에 서로를 돌본다. '공정'론에서 주된 관심이 각자의 잘남을 어떻게 인정받느냐 하는 문제인 것과는 딴판이다. <돌봄 선언>은 영어의 care가 "보살핌, 관심, 걱정, 슬픔, 애통, 곤경"을 의미하는 고대 영어 caru에서 왔다는 사실로 이를 일깨운다(57쪽).
그래서 돌봄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생명체의 요구와 취약함을 전적으로 돌본다는 것, 그래서 생명의 연약함과 직면하는 것"은 "어렵고 지치는 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57쪽). 그래도 우리는 이 어려운 일을 해야 한다. 인간 사회 전체가 생존의 근본 요구로 이를 떠안아야 한다.
아이나 노인을 돌볼 일이 없는 인생의 아주 짧은 기간 동안이라면, 혹은 그런 고된 일일랑 모조리 화폐를 통해 남에게 떠넘길 수 있는 아주 소수의 사람이라면, 이런 진실에 눈 감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대다수의 삶이란 결국 남을 돌보고 내가 돌봄 받는 시간들을 보내다 가는 일일 뿐이다. 그러니 '돌봄', 이 두 글자의 무거움에서 도망칠 길은 없다.
자본주의의 지속인가, 돌봄 사회인가
한데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돌봄은 우리에게 근본적 선택을 다그친다. <돌봄 선언>이 코로나19 이후 사회의 방향으로 주창하는 것은 '보편적 돌봄'이다. '보편적 돌봄'이란 "모든 돌봄이 우리의 가정에서뿐 아니라 친족에서부터 공동체, 국가, 지구 전체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우선시되는 것을 의미"(41쪽)한다. 이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낸시 프레이저가 <전진하는 페미니즘: 여성주의 상상력, 반란과 반전의 역사>(임옥희 옮김, 돌베개, 2017)에서 가족임금과 복지국가의 궤적을 살핀 뒤에 내놓은 대안이기도 하다.
보편적 돌봄을 추구하는 사회라 ... 좋다. 보수파든 리버럴이든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지향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는 자본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지속과 돌봄 사회로 나아가는 전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탈성장 자본주의'가 모순어법인 것처럼 '보편적 돌봄 자본주의'란 말장난일 뿐이다.
왜 그러한가? 단적으로, 돌봄이란 인간 생명의 가장 애처롭고 연약하며 고된 측면들과 관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본주의란 마치 삶의 그런 측면들이 세상에 없는 양, 아니면 화폐와 시장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인 양 치부하며 존속하는 체제다.
인간이 돌봄 활동에 인생의 8, 9할을 보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는 그 인간들을 기계 앞에 세워 놓고 마음껏 일을 시킬 수 없다. 가족의 누군가에게 돌봄을 떠넘기게 만들고 나머지 가족을 공장에 불러 모아야만 한다. 그렇게 기계 앞에 대령한 이들이 마모되고 손상된 뒤에 그들을 누가 어떻게 돌볼지는 불문에 붙이고 말이다.
또한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 안에 그와 얽혀 있는 모든 돌봄 활동의 요구를 해결할 수단이 다 담겨 있다고 전제하지 않고는 이들이 생산한 상품과 서비스를 시장에 내놓을 수 없다. 상품과 서비스의 사연들을 깔끔하게 대변하는 '가격' 체계 안에는 돌봄을 둘러싼 온갖 구질구질한 이야기들이 섞여 들어선 안 된다. 그것은 임금의 테두리 안에서 이미 해결된 사안이라 치부돼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노동자의 생산물은 '가격'의 공화국에서 경쟁력을 갖춘 시민이 될 수 없다.
설령 이런 현실을 뚫고 돌봄이 정치 의제로 부상하더라도, 이는 다시 시장의 회로 안에 흡수되어 해결돼야지 다른 길이 있다 믿어선 안 된다. 자신을 '중산층'이라 믿는 자들은 시장에서 화폐로 해결하게 하라. 그럴 수 없는 자들은 국가의 낡은 수용시설을 택하든가, 아니면 홈리스의 삶을 택하게 하라. 여기에도 '선택'이란 말을 적용할 수 있다면 말이다.
보편적 돌봄을 추구하려면, 이런 식으로 운영되던 경제사회체제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선회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즉, 돌봄 사회는 자본주의의 '메타노이아', 고개 돌림, 전향을 요구한다. 노동자가 작업장을 통제하기에 산업재해 사망 제로가 상식인 사회를 요구한다. 만인이 돌봄 활동에 동참하기에 재산과 성별, 연령 등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돌봄의 부담을 지는 사회를 요구한다. 기후 급변에 돌입한 지구 생태계를 돌보기 위해 인간의 생활 방식을 바꿔가는 사회를 요구한다.
어려운 요청이다. 하지만 <돌봄 선언>은 '불가능한' 도전만은 아니라고 역설한다. 제대로 출발하기만 하면 된다. <돌봄 선언>은 그 출발점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시장에 잘못 흡수된 돌봄 활동을 회수하고 소득-일자리 보장과 보편적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시장 바깥의 삶의 가능성을 늘려야 한다. 20세기 복지국가의 한계를 넘어 21세기 돌봄국가를 발전시켜야 한다. 상호부조와 공공 공간, 커먼스와 공동체 생활을 키우고 이들을 서로 연결해 국가나 기업과는 또 다른 돌봄 주체를 육성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돌봄'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대두한 다양한 해방의 문제의식과 열망들의 중대한 교차점인 것 같다. 사회주의적 비판과 이상의 부흥, 페미니즘의 대중적 확산, 기후 위기가 다그치는 생태적 각성이 모두 여기에서 만난다. <돌봄 선언>은 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자본주의가 낳은 모든 모순에 대한 해답의 출발점, '돌봄'
사실 그 전부터 조짐을 보이기는 했지만, 코로나19 대유행 국면에서 동화와 백일몽, 광고 영상 같은 인류의 상징 세계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것은 두 초거대 재벌, 일론 머스크와 제프 베조스다. 이 둘은 모두 더럽혀지고 쓸모없게 된 지구를 벗어나 새로운 거주 행성을 찾아 떠나는 여행의 개척자를 자처한다. 지구를 망치고 나면 이곳을 떠나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더 나은 삶을 열 수 있다는 야망의 상징이다. 그런 삶을 향해 떠날 자들이 얼마나 소수일지, 아니 아예 그런 여행이 과연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달리 말하면, 이 둘은 정확히 돌봄의 반대를 표상한다. 또한 자본주의 역사의 정점이기도 하다. 이들은 지금이라도 지저분하고 힘들고 고뇌어린 돌봄을 향해 고개를 돌릴 수 있다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자본주의가 지속되려면,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을 따를 수 없다. 화성행 우주선에 탑승할 수 없는 우리가 진정으로 선택해야 할 것은 오직 인간의 의미를 다시 묻고 그로부터 요청받는 삶을 살아내는 것, 돌봄 사회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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