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노동계의 산재보험 처리기한의 신속성 문제와 관련한 논란이 뜨겁다. 금속노조의 산재처리 지연 해결 촉구 근로복지공단 앞 농성도 52일 넘게 진행 중이다.
이에 대해 임우택 한국경제인총연합회 안전보건본부장이 지난 달 27일 <헤럴드경제>에 '신재보험 처리 개선, 급할수록 돌아가야'(바로가기)라는 제목으로 기고를 했다. 임 본부장의 주장은 산재보험의 취지를 왜곡하고, 일부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있다. 임 본부장의 주장을 기초로, 노동계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살펴본다.
한국에는 산재 조사 기한 자체가 사실상 없다
임 본부장은 산재보험은 업무로 인해 상병이 발생했다는 인과관계 확인 없이 적용이 불가능하므로, 사실관계 조사가 중요하고, 이에 해외 선진국의 질병 처리현황도 한국과 비슷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산재법상 인과관계는 사실적·의학적 인과관계에 기초해 있지 않다. 인과관계는 법리상 상당인과관계이므로, 사실조사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에 기초한 법률판단을 할 수 있다. 모든 산재사건은 이런 원리에서 판단되고 있고, 법원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사실조사의 충실성이 필요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고도의 정밀한 조사가 요구되므로 심의 판정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또한 현재 공단의 사실조사가 길어지는 중요한 이유는 첫째 사업장에 대한 자료조사, 현장조사, 문답조사에 대한 기한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근골질환의 경우 상당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 공단 자문의사 2명의 소견을 받고 있지만, 이를 판정위원회에서 반영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지사 자문보다 시간이 더 소요되는 특별진찰시 업무관련성에 대해 "매우 높음" 소견이 제출된 경우에만 판정위원회 회부를 최근에서야 생략하고 있다. 즉 "높음"인 경우에도 반영이 되지 않기 때문에 시간만 소비되고 있다. 넷째 직업성 암의 경우 기본 1년의 전문조사가 수행되고, 그 조사가 언제 끝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결국 임 본부장은 공단이 조사·판정을 장기화시키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사업장에 대한 문답조사 등 기한을 정확히 규정하고, 업무상 질병 인정 범위를 확대하고, 법제화하여 소요기간을 줄이자는 노동계의 주장이 과다하고 볼 수 없다.
임 본부장은 한국과 해외 선진국 사례의 처리기한이 비슷하다고 주장하지만, 산재보험은 각국의 직업병 처리 건수 등 현실에 맞게 운용되어야 한다. 임 본부장이 예를 든 독일의 경우 2020년 직업병으로 의심된 신고 건수가 10만 5759건이며, 그 중 3만 7886건이 직업병으로 인정됐다. 한국과 산재보험 적용 근로자수가 1800만 명대로 비슷한 프랑스는 2016년에 5만 1631건이 직업병으로 인정된 반면, 한국은 1만 5996건(2020년)에 불과했다. 산재신청 건수와 직업병 인정실태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차이가 있는 나라와 단순비교는 무리다.
산재보험도 각국의 특징에 맞게 운용되어 한다. 한국처럼 상병수당이 없고, 사회보험제도가 부실하며, 산재 신청을 노동자가 알아서 직접 해야 하는 제도와 산재보험의사(DA)가 직접 산재신청을 해주는 독일을 비교할 수 없다. 독일은 1925년도부터 통근재해를 보상했고, 프랑스는 1946년 통근재해를 법률에 명시했다. 반면 한국은 2016년 9월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도입되었다. 산재인정범위도 각국마다 다르다. 프랑스처럼 사업장 내에서 일어난 자살조차도 산재로 처리되는 책임추정의 원칙을 가진 나라와 동등하게 비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산재은폐가 심각한 한국의 현실 반영되어야 한다. 한국노동연구원의 김정우 전문위원은 지난 2월 학술지 '산업노동연구'에 발표한 논문에서 2/3의 산재사건은 은폐된다고 발표했다. 이는 2011∼2017년 사업체 패널조사 자료를 분석한 것으로 그동안 노동계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즉, 2/3의 산재사건은 신청조차 못할 정도로 은폐되고 있고, 그나마 신청하는 사건은 해고를 감당해야 할 만큼 생존의 위협을 받는 한국의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노동계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다.
2006년 노사정 산재 제도개선 합의문 왜곡 말아야
임 본부장은 현재의 제도가 2006년 노사정이 합의한 제도개선의 이행물이며, 이를 존중하여 다시 한 번 지혜를 모을 때라고 주장한다. 당시 "산업재해보상보험 제도 개선에 대한 합의문"은 5개 분야, 42개 과제, 80개 항목에 대한 합의를 하였다. 그러나 임 본부장은 당시 합의문의 자체를 왜곡하는 주장을 하고 있다.
당시 합의문 '2. 요양·재활부분'을 보면, '2-1 업무상 재해 인정기준'은 크게 '법체계 정비, 업무상질병 인정기준, 업무상 질병의 판정'으로 구분하고 있다. 업무상 질병의 판정은 "다만, 주치의·사업장·자문의 의견을 종합 고려하여 업무상 질병이 명확한 경우는 제외"라고 하여, 판정위원회 심의를 하지 않고 신속히 판정하라는 취지의 합의를 하였다. 이는 현재 노동계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주치의·사업장·공단 자문의사가 동일하게 업무관련성을 인정하는 경우 신속한 보상을 하라는 것과 동일하다. 당시 합의는 해놓고 실제 운용을 15년 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업무상질병 인정기준'의 합의문은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에 대하여는 중량물·과로지표, 업무수행성 기준, 업무관련성 대상 질환 등을 종합 검토하고 관련기준·지침 마련 등을 위해 근로복지공단 본부에 별도의 위원회를 둔다, 이 경우 위원회는 노사 추천·공익 전문가 등이 참여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현재 제정·운용되는 근골질환(6대 상병)이나 직업성 암의 고용노동부, 공단의 지침과 유사하다. 당시 합의에도 사실상 추정의 원칙의 기초를 마련해 놓았다. 이를 보다 강화하고, 법제화하는 노동계의 주장은 당시 합의와 연결되어 있다.
무엇보다 당시 합의문의 작성 주체에는 민주노총이 빠져 있다. 양대 노총이 노동자를 대변한다고 할 수도 없지만, 민주노총조차 빠진 이 합의문에 과연 전적인 신뢰를 보내는 것이 타당할지 의문이다. 뿐만 아니라 합의문은 "본인부담금 축소, 장해평가기준, 후유증상진료제도 개선, 요양중 국민연금 적용문제, 상병보상연금 수준 등" 중요한 사항에 대해 중·장기과제로 미뤄놓고, 본질적인 문제인 신속·공정한 보상과 판정 방안에는 함구했다.
15년 전의 합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15년간 경총을 비롯한 노동부, 근로복지공단의 직무 유기가 문제였다. 임 본부장은 당시 합의문을 다시 읽어보고, 자신들이 참여했던 최소한의 합의조차 이행·점검되지 않았던 현실이 산재노동자의 고통을 가중시킨 원인이었음을 이제는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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