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차 대전 사이의 유럽 역사를 보면, 누구나 이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파시즘의 유혹과 공격을 물리치기가 그토록 어려웠는가?" 독일과 이탈리아 모두 이미 한 세대 넘게 의회제를 운영하고 있었고, 강력한 좌파정당과 노동조합들이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도 결과만 놓고 보면, 너무도 무력하게 파시즘의 득세와 집권을 받아들였고, 너무나 많은 이들이 스스로 민주주의가 아닌 독재를 선택했다.
이런 낯선 역사에 당혹해 하다 보면, 쉽게 이런 결론에 이르곤 한다. "100년 전이야 파시즘을 처음 경험하는 것이니 그랬겠지만,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역사적 학습을 한 지금이야 상황이 전혀 다르지 않겠는가." 실은 2010년대 대서양 양안 여러 나라에서 극우 포퓰리즘이 바람을 일으킬 때에도 많은 이들의 심정은 기본적으로 이러했다. 국수주의, 배외주의를 내건 극우파의 전진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라 믿었으며, 적어도 노골적으로 파시즘으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라 봤다.
2021년 현재, 이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2020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재선을 막은 게 결정적이었다. 트럼프가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백악관에서 쫓겨나자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극우파의 성장이 일단 멈추었고, 이제 지난 10년간은 세계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잠깐 동안의 일탈기였던 듯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만약 한 세기 전에 파시즘의 등장과 성장을 낳은 위기가 지금 동일하게 반복된다면, 위의 낙관적 예상이 맞아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1920-30년대 위기와 같지만, 그 양상이 너무도 다르다. 20세기 초의 위기는 단지 인간 사회 시스템의 위기였지만, 지금은 이에 더해 지구 생태 시스템의 위기로 폭발하는 중이다. 팬데믹 등의 다른 생태 위기들을 동반하며 점점 더 거대한 혼란으로 커가는 기후 위기로 말이다.
이 인류 초유의 사태 앞에서는 과거의 어떤 경험도 명쾌한 미래의 지도가 되어주지 못한다. 그 가운데에서 다시 파시즘, 즉 문명의 자기파괴의 위험이 엄습하고 있다.
'화석 파시즘'의 현재, '생태 파시즘'의 미래
기후 위기를 배경으로 파시즘이 이미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다고 진단하는 이들이 있다. 화석 자본주의와 기후 위기의 관계에 대해 깊이 있는 저작을 발표해온 스웨덴 학자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이 역시 스웨덴에서 활동하는 연구자-운동가 집단 '체트킨 컬렉티브(Zetkin Collective)'와 함께 낸 <흰 피부, 검은 연료: 화석 파시즘의 위험에 대해(White Skin, Black Fuel: On the Danger of Fossil Fascism)>(Verso, 2021, 국내 미번역)가 이런 충격적인 분석을 제시한다.
어느 나라든 신흥 극우파의 대다수는 기후 변화 부정론을 신봉한다. 처음에 이들은 기후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매년 심각한 기상 이변이 반복되자 더는 이런 태도를 고집할 수 없게 됐다. 그러자 이들은 기후가 변화하더라도 이는 인간 사회의 온실가스 배출 탓이 아니라 '자연적 요인' 때문이라는 입장을 전면에 내세웠다. 또한 기후 변화는 과거에도 자주 있었으니 호들갑 떨 일이 아니라고 강변하기도 했다.
전 세계 과학자들이 한 목소리로 정반대 진실을 외치는데도 이렇게 떠들려면, 과학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실제로 신흥 극우 세력들은 '좌파의 온상'인 사회과학계를 적으로 돌릴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역시 현대 사회의 병폐쯤으로 내몰았다. 이런 반계몽주의적 태도는 결국 극우파의 치명적 약점이 됐다. 집권에 성공한 극우 세력들은 코로나바이러스 앞에서 허둥대며 헛소리만 늘어놓다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 말았다.
한데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이런 입장을 고수하는 게 이들이 특별히 무지몽매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기만 했다면 그토록 많은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민주적으로' 집권에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들이 화석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해야만 부와 권력을 지킬 수 있는 집단과 긴밀히 얽혀 있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화석 연료, 즉 석탄과 석유, 천연가스를 뽑아내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이윤을 획득하는 화석 자본이 있다.
말름과 체트킨 컬렉티브의 신간은 이러한 연관관계를 깊이 파헤친다. 이 책은 미국과 브라질, 유럽 여러 나라의 신흥 극우파가 자국의 석탄-석유업계나 이와 직결된 제조업체들의 이익을 국민 혹은 민족의 운명과 일치시키며 기후 변화에 맞서는 양상을 분석한다. 그러면서 저자들은 이런 극우 포퓰리스트의 행태에 '화석 파시즘'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극우 포퓰리즘을 비판하더라도 보통 '포스트 파시즘' 정도로 칭하는 데 비하면 상당히 과감한 진단이다.
정말 '파시즘'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극우 포퓰리즘의 득세와 기후 위기가 직결돼 있다는 이들의 주장은 우리의 잠을 깨우는 기상 나팔소리와도 같다. 진지한 좌파 분석가들조차 대다수가 극우 포퓰리즘 열풍과 기후 위기를 서로 연관된 현상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다. 대공황과 나치의 관계처럼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만성적 침체가 극우 포퓰리즘의 배경이라고 생각했을 뿐, 자본주의의 최종-최대 위기인 기후 위기까지 시야에 넣지는 못했다.
그러나 말름과 체트킨 컬렉티브는 이미 정치 무대의 중심에서 기후 위기가 작동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확실히 이러한 틀로 바라보면, 더욱 명확히 이해되는 대목들이 있다. 가령 신흥 극우파가 왜 배외주의, 인종주의 같은 낡은 카드를 다시 내밀고, 또 그런 카드가 상당수 대중에게 호소력을 갖는지가 드러난다.
기후 위기를 가속화하면서까지 화석 자본주의를 끈질기게 지속시키려는 중심부 국가들 내부의 노력은 기후 위기에 가장 취약한 지역들에서 이미 대혼란의 제1막을 열고 있다. 적도에 가까운 지역에 자리한 국가들에서는 2010년대 초에 벌써 농업-식량 위기가 닥쳐 생존을 위해 북상하는 난민들이 발생했다. 흔히 기후 위기와 연관돼 머리에 떠오르는지는 않지만, 식품 가격 인상이 촉발한 '아랍의 봄' 이후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 유럽 대륙을 찾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며, 역시 죽음을 무릅쓰고 미국 국경을 넘어 들어오는 중미인들이 그들이다.
화석 파시즘 세력은 한편으로 국내 정책을 통해 기후 위기를 악화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 위기의 직접적 결과인 기후 난민에 대해서는 국경에 장벽을 쌓는 것으로 대응한다. '검은 연료'를 지키기 위해 '흰 피부'만을 보호하는 장벽을 쌓자는 외침 ― 여기에서 '검은 땅'(나치가 독일제국의 생존기반이라 선포한 동유럽 곡창지역)과 '흰 피부'라는 고전적 파시즘 수사의 환생을 떠올리지 않기란 힘들다.
그러나 문제는 더욱 심각하고 복잡하다. 장벽 쌓기가 단지 극우 포퓰리즘 물결만 진정시키면 사라질 선택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말름과 체트킨 컬렉티브의 저작도 간단하게나마 이 점을 불길한 어조로 언급한다. 기후 위기와 연관된 파시즘 위험의 제1단계는 '화석 파시즘'이다. 그러나 화석 파시즘의 완강한 활약 탓에 기후 위기를 최대한 완화하려는 노력이 처절한 실패로 끝난다면, 그 다음에는 더욱 무시무시한 제2단계가 열리게 된다. '생태 파시즘' 단계다.
기후 위기 '완화'에 실패할 경우에 인류는 이제 기후 급변에 '적응'해야 한다. 현 수준을 넘어선 기후 급변이 어떤 양상을 띨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지만, 이미 드러난 두 가지 재난이 증폭돼 나타나리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농업 위기에 따른 심각한 식량난과, 남반구 국가들의 붕괴에 따른 대규모 기후 난민이 그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극우파뿐만 아니라 주류 정치세력도, 심지어는 그간 '녹색'을 자주 이야기해온 상당수 세력까지도 한 가지 처방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그 유일한 처방이란 장벽 쌓기다. 즉, 식량난과 난민 이동이라는 위협에 맞서 전쟁 국가의 태세를 갖추고 그에 맞게 국내에서는 일상적 비상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비록 뒤늦게 에너지 체제 전환 같은 조치를 취하더라도 순전히 국가의 폭압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부와 권력의 불평등이 해소되기는커녕 민주주의 자체가 돌이킬 수 없이 후퇴할 것이다. 때맞춘 생태 전환의 실패는 이렇게 전반적 파시즘화, '생태 파시즘' 시대를 열고 말 것이다.
현실은 이미 '파시즘 대 생태 전환'의 싸움
기후 위기의 실재를 부정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기후 위기가 참으로 심각하며, 이것이 인간 사회 탓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점점 더 늘고 있다. 그럼에도 기후 급변의 극적 양상에 걸맞는 극적인 생태 전환이 시작됐다는 소식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대응과 대비하면, 이런 현실이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널리 퍼진 다음 같은 판단과 심리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후 위기는 지구와 운석의 대충돌처럼 어차피 누구나 다 맞이할 종말이다. 그런 종말이라면, 그리고 어차피 뒤로 돌리기 쉽지 않을 바에는 지금의 정치 경제 체제에서 '살던 대로 살다' '함께 가는' 게 낫다."
그러나 기후 위기가 우리에게 허용하지 않는 것이 바로 '살던 대로 살다' '함께 가는' 것이다. 기후 위기의 가속화는 필연적으로 생태 파시즘 시대를 열게 돼 있다. 이 21세기 파시즘 체제에서 우리는 '살던 대로 살' 수 없을 뿐더러 '함께 가'지도 않을 것이다. 화석 파시스트들은 이 미래를 예고하는 선구자들이다.
이렇게 봤을 때, 생태 전환은 결코 먼 미래의 불확실한 가능성을 과장하며 호들갑을 떠는 일일 수 없다. 오늘의 생태 전환에 실패하고 내일의 전환에 또 실패할수록 10년 뒤의 파시즘은 기정사실이 된다. 생태 전환의 노력은 지금의 화석 자본주의 체제와 싸울뿐더러 이 싸움을 통해 미래의 파시즘과 싸우고 있다. 그렇기에 이것은 오늘날 '가장 급한'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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