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있는 산업재해, 직업병...산재는 '노동의 문제'만이 아니다

[안종주의 안전사회] 산재노동자의 날 맞아 산재의 절반, 직업병에도 관심을

4월28일은 산업 재해 방지를 위해 국제연합(UN) 산하 국제노동기구(ILO)가 제정한 세계 산재 노동자의 날이다. 산재는 노동자만의 문제로 여기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그 가족의 문제이며 시민의 문제기이도 하다. 산재 가운데 상당수는 작업장 인근 주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쳐 많은 인명 피해를 내기도 한다.

심각한 산재 산업장은 주변 토양과 대기, 하천과 강 등 물을 오염시켜 생태계를 파괴하고 주민들의 생명을 위협한다. 주민들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대표적 산재 유형은 화재·폭발 사고와 화학물질 누출 사고, 그리고 분진 또는 대기오염물질이나 폐수 따위를 상습적으로 다량 배출하는 작업장이다.

산재로 인해 주민들까지 막대한 피해를 입은 역사적 사건으로는 1984년 인도 보팔 시에서 일어났던 유니온카바이드 사 농약공장의 메틸이소시안산(MIC) 누출로 인한 세기의 대참사와 2012년 경북 구미 제4국가산업단지의 휴브글로벌 화학공장의 불화수소 누출 사건, 그리고 2019년 한화토탈의 충남 대산공장에서 일어났던 스티렌모노머 누출 사고를 꼽을 수 있다.

산재 예방, 기업·노동자뿐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중요

산재 예방은 기업과 노동자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시민들에게도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산재를 노동자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 김용균 사망 사고를 계기로 시민단체와 노동·인권단체 등이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운동을 벌여 성과를 거두는 등 산재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의 새로운 흐름이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산재의 두 축 가운데 하나인 직업병보다는 나머지 한 축이자 좁은 의미의 산재인 사고성 산재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세계 산재노동자의 날을 계기로 넓은 의미의 산재에 포함되는 직업병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며 중요하다.

산재 피해 가족과 노동단체 등은 28일 세계 산재노동자의 날을 맞아 산재 사망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2021 최악의 살인기업’을 선정해 발표했다. 이날 ‘최악의 살인기업’으로는 한익스프레스가 뽑혔다. 이 업체는 2020년 4월 29일 경기도 이천시에 있는 한익스프레스 물류센터 신축공사 현장에서 우레탄폼·용접 작업 등을 여러 층에서 동시에 하다 화재가 나 하청노동자 38명이 숨진 공사를 발주한 업체다. 최악의 살인기업 특별상에는 쿠팡이 선정됐는데 2020년 3월부터 2021년 3월까지 9명이 쿠팡 관련 업체에서 일하다 사망했다.

2006년 이후 매년 발표된 최악의 살인기업을 보면 대형 건설사가 가장 많고 그밖에 중공업·제철회사, 화학기업 등이다. 역대 최악의 살인기업 특별상을 최근 받은 곳은 전국경제인연합회·질병관리본부·가습기살균제 사망 사고 기업(2016), 교육부·우정사업본무(2017), 국토교통부·우정사업본부(2018), 보건복지부·서부발전(2019) 등이다.

‘최악의 살인기업’, 건설사, 제철·중공업 기업이 뽑혀

이렇게 선정된 '최악의 살인기업'들은 대부분 사고성 산재로 한꺼번에 많은 노동자를 숨지게 한 사업장의 기업들이다. 하지만 연간 산재로 사망하는 비율은 사고성 산재와 직업병이 비슷하다. 매년 800~900명 가량이 산재 사고와 직업병으로 각각 목숨을 잃는다. 연간 2천명에 가까운 노동자가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산재 사고와 직업병 모두 우리가 똑같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노동 당국도 산재 사고의 경우 강력한 예방 대책과 처벌, 그리고 제도 개선, 안전 투자 등을 통해 짧은 기간에 그 가시적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반면 직업병의 경우 대부분 오랫동안 발암물질, 유해화학물질 등의 유해요인에 노출된 뒤 나타나기 때문에 산재 사고 예방에 주로 힘을 쏟고 있다. 교통사고 사망과 자살 등과 함께 문재인 정부의 국민 생명 지키기 3대 프로젝트의 하나인 산재 사망을 2022년까지 절반 줄이는 것도 산재 사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사망 사고가 한 명이라도 발생하면 중대재해로 본다. 이 때문에 적어도 작업장에서 산재 사고로 사망하면 곧 바로 산재 사망으로 집계되어 처리된다. 하지만 직업병 또는 직업성 질환의 경우 노화, 환경성 질환, 일반 질환 등으로도 유사 질환이 노동자에게서 생길 수 있어 실제 직업병인 경우에도 산재로 처리되지 않거나 인정받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숨겨진 직업병 사망이 많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직업성 암이다. 직업성 암도 우리 사회에서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발생해 노동자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직업성 암은 별로 생기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는 정부 공식 통계를 톺아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대한민국이 직업성 암 세계 최고 예방국가(?)

노동부가 인정한 직업성 암 환자의 비율은 국내에서 발생하는 전체 암 환자의 0.08%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체 암 환자 가운데 4% 가량은 직업 요인에 의해 생긴다고 분석한다. 물론 나라마다 이 비율은 상당한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직업성 암이 세계 평균의 50분의 1가량만 생긴다는 사실, 즉 대한민국은 직업성 암 세계 최고 예방국가라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겸연쩍다.

이윤근 노동환경건강연구소장은 2017년 국제노동기구(ILO) 보고서를 인용해 산업재해로 전 세계에서 연간 273만 명이 사망하며 이 중 26%가 직업성 암으로 숨진 것으로 집계됐다고 지난 3월 열린 관련 토론회에서 밝힌 바 있다. 유럽은 산재 사망자 중 직업성 암이 원인이었던 경우(2014)가 53%에 달한 반면 우리나라는 산재 사망자 가운데 직업성 암으로 인정된 경우(2019)는 6%(125명)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산재 자체가 여전히 홀대를 받고 있다. 노동운동 측면에서나, 국가 차원에서 그렇다. 언론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가운데에서도 직업성 암을 포함한 직업병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관심과 언론의 조명, 일반 시민의 중요도 인식은 매우 낮은 등 더욱 홀대를 받고 있다.

몇몇 직업의학 전문가와 관련 운동 단체는 직업성 암 등을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리기 위해 ‘직업성·환경성 암 환자찾기119(직업성암119)’란 모임을 결성한 뒤 지난 3월 우리나라의 직업성 암 실태를 알리고 그 해법을 찾기 위해 지난 3월 토론회를 연 것을 계기로 본격 활동을 시작했다, 몇몇 선구적인 전문가 등이 직업성 암의 중요성과 이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지 30여년 지나 힘겹게 각성의 싹을 틔운 것이다.

32년 전에 이미 직업성 암 관심 촉구 칼럼과 보도

직업성 암에 대한 관심은 32년 전에 처음 등장했다. 1989년 8월 20일 신생 언론사였던 <한겨레신문>은 ‘발암물 사용업체 안전대책 '허술'/직업성 암’이란 제목의 외부 기고 칼럼이 실렸다. 직업병 환자를 주로 보아오던 김양호(현 울산대 의대 교수) 구로의원 원장이 쓴 것이었다.

“직업성 암은 염료(물감) 취급·제조자의 방광암, 석면 취급자들의 악성중피종과 폐암, 크롬 취급자의 폐암, 코크스 작업자의 타르에 의한 폐암, 비소 취급자의 폐암, 전리방사선에 의한 백혈병과 피부암, 벤젠에 의한 백혈병 등이 있다. 이런 발암성 물질은 과거에는 물론 현재에도 국내의 산업장에서 특별한 안전대책이 없이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직업성 암은 예방이 가능하다. 따라서 더 늦기 전에 지금부터라도 직업성 암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정부와 기업, 노동자의 비상한 노력이 필요하다.”

몇 달 뒤인 1990년 4월 1일 이 신문에는 "직업성 암 외면당하고 있다 - '일반 암' 처리…공식보고 한명도 없어/발암물질 취급 수십만 명 '위험'에 노출"이라는 제목의 보도가 나갔다. 당시 이 신문사에 있던 필자가 쓴 기획기사였다. 그 뒤에도 간간이 직업성 암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보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직업성 암은 그 뒤 오랫동안 노동운동이나 산재·직업병 추방 운동에서도 주 관심 대상이 되지 못했다.

1993년 노동부는 부산의 한 석면방직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던 50대 여성이 악성중피종에 걸린 것을 국내 첫 직업성 암으로 공식 인정했다. 하지만 이 직업성 암은 그때나 그 이후 석면에 의한 암이 더 부각됐다. 한국타이어, 삼성전자와 에스케이하이닉스반도체 노동자 백혈병 등도 직업성 암보다는 삼성과 반도체 노동자 직업병이란 이름이 더 많이 일반에게 알려졌다. 포스코 직업성 암 발생도 포스코란 이름이 더 앞세워졌다.

코로나 공존(또는 이후) 시대, 새로운 직업병 관심 필요

‘직업성 암 119’의 출범과 활동을 계기로 잃어버린 30년 직업성 암의 역사를 되찾는 것은 물론이고 직업병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이 더 높아지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전체 암 환자의 0.08%에 불과하다는 직업성 암의 가짜 실태가 허물을 벗어던지고 4%의 진실을 알리는 참 모습을 드러내주길 기대한다.

노동과 직업은 영원하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서 직업의 종류도 크게 변화하고 노동자들이 다루는 물질이나 노동 환경도 크게 바뀐다. 코로나 공존 시대 또는 코로나 이후 시대에는 더욱 그럴 것이다. 직업과 노동환경과 취급 물질이 바뀌면 직업병의 종류도 바뀔 것이다. 직업성 암의 종류도 다양해질 것이다. 이를 제때 제대로 파악하고 대처하는 것이야말로 노동자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진정으로 지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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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주 박사는 <한겨레> 보건복지 전문기자를 지냈으며,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안종주의 위험 사회' '안종주의 건강 사회' '안종주의 위험과 소통' 연재 칼럼을 써왔다. 석면,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등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보건 및 환경 보건 위험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석면, 침묵의 살인자> <위험 증폭 사회> 등 다수가 있으며,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해 <코로나 전쟁, 인간과 인간의 싸움> <코로나19와 감염병 보도 비평>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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